고려불교를 멸망으로 이끈 두가지 이유
첫번째 이유 ㅡ고려의 왕이 티벳라마들에게 수계를 받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국왕과 공주가 원나라에서 온 티베트 라마승에게 직접 수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해진다.
수계장면은 고려의 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당시 국왕이었던 충선왕과 그의 부인 계국대장공주는 티베트에서 온 라마승들에게 수계를 받았다.
티베트의 라마승 팔합사(八哈思) 등 19명이 오니, 왕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상왕 충렬왕)와 아들(국왕 충선왕), 그리고 원나라 공주까지 온 왕실 일가가 한자리에 모여 티베트 라마승에게 무릎을 꿇고 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기존 고려 국왕들이 받던 전통 불교의 '보살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고 말한다.
삼매야계(三昧耶戒) 수용: 전통 보살계는 대승불교의 도덕적 규범을 따르겠다는 약속이지만, 티베트 밀교의 수계는 삼매야계라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국왕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계를 주는 라마승 앞에서는 철저히 고개를 숙이고, 라마승을 부처와 동등한 법왕으로 받들어야 했다.
성리학자들의 시선에서 이 사건은 국가의 기강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한나라의 국왕이 정체불명의 외국 승려발밑에 엎드려 절대 복종을 맹세하는 모습은, 유교적 왕권과 국가의 존엄성을 완전히 짓밟는 행위였다.
원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이 숭상하는 종교에 왕실 전체가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성리학자들에게 심각한 굴욕으로 다가왔다.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이 보기에 고려 국왕들의 이러한 행태는 국왕이 제정신을 잃고 이단의 승려에게 나라의 영혼을 팔아넘긴 꼴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건국 이후 불교를 철저히 공적 영역에서 배제하고 왕실의 수계를 법으로 금지하는 강력한 배불 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두번째 이유 ㅡ 불교 사찰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을 뺏기 위해서이다.
성리학자들이 내세운 숭유억불의 명분 뒤에는 권문세족과 사찰이 독점하고 있던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새로 세운 조선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겠다.는 아주 강력한 경제적·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었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비롯한 배불 논쟁은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사상적 공격 수단이었다.
고려 말 사찰은 종교 시설이 아니라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거대 재벌이었다.
사찰 토지는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지였다. 권문세족들이 세금을 안 내려고 자기 땅을 사찰에 위장 기부하거나, 사찰이 고리대업으로 농민들의 땅을 빼앗으면서 전국 비옥한 토지의 상당수가 사찰 소유로 넘어갔다.
사찰에 소속된 노비 역시 국가에 군역을 지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농민들이 가혹한 세금을 피해 스스로 사찰의 노비나 승려가 되면서, 국가가 부릴 수 있는 군인과 세금을 낼 백성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했지만, 당시 국가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공신들과 관료들에게 줄 월급조차 부족했다.
새 왕조가 유지되려면 토지와 노비가 필요한데, 그 대부분을 구세력인 권문세족과 사찰이 쥐고 있었다.
사찰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생존이 걸린 필수 과제였다.
정도전과 사대부들은 사찰 재산을 환수하기 위해 치밀하게 법과 제도를 바꾸어 나갔다.
1단계: 과전법(科田法) 실시 (1391년, 조선 건국 직전)
사찰이 부당하게 소유한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몰수하고, 이를 신진사대부들의 관료 조세원으로 재분배했다.
2단계 도첩제(度牒制)로 인력 통제
아무나 승려가 되지 못하게 국가가 허가증(도첩)을 발급하고 비싼 세금을 물리게 했다. 이로 인해 사찰로 도망쳤던 수많은 양민과 노비들이 다시 국가의 통제를 받는 농민으로 환원되었다.
태종·세종 대의 대대적인 사찰 통폐합
이방원(태종)과 세종대왕 시절에 이르러서는 수천 개에 달하던 사찰을 수십 개로 강제 통폐합했다. 이때 사찰이 보유했던 막대한 토지와 수만 명의 사찰 노비가 공식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 군인으로 편성되거나 국가 소유 노비가 되었다.
"불교는 이단이다"라는 사상적 공격은, 사찰이 독점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합법적으로 빼앗아 국가 곳간을 채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정치·경제적 명분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대대적인 배불(排佛) 정책이 시행되면서, 수백 년간 기득권을 누리던 사찰들은 줄줄이 폐쇄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다.
절에서 쫓겨나거나 승려 자격을 박탈당한 수많은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 혹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절에서 쫓겨난 승려들의 운명은 크게 네 가지 경로로 나뉘었다.
조선 조정이 승려들을 내쫓은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부족한 군사력 확보였다.
머리를 기르고 강제로 환속당한 젊고 건장한 전직 승려들은 곧바로 국가의 정식 군인으로 편성되었다.
고려 말 사찰에서 승병으로 활동하며 무술을 익혔던 이들은 조선 초기 북방의 여진족을 막아내거나 남방의 왜구를 토벌하는 최전선 군사 기지에 배치되어 험난한 군 생활을 해야 했다.
사찰이 통폐합되면서 사찰 소유였던 수많은 '사찰 노비'와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승려들은 신분이 급격히 추락했다.
조선 왕조는 이들을 대거 국가 소유의 공노비(公奴婢)로 전환했다.
사찰에서 기술을 배우거나 예술적 재능이 있던 승려들은 조선 사회의 신분제 아래에서 최하층 천민인 광대. 사당패, 또는 장인집단으로 흘러 들어갔다.
절에서 불상을 조각하고 종을 만들던 기술자들은 국가 관청의 노비 장인이 되었다.
사찰 의례에서 재를 지내며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던 승려들은 민간으로 흘러들어 가 광대나 무당의 무리에 합류했다. 조선 시대 유랑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 등의 뿌리에 환속 승려들이 깊게 연관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도성(한양) 출입이 금지되고 사찰 재산이 몰수되는 와중에도 불교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승려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 암자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조선 유학자들의 온갖 멸시와 핍박을 견디며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사찰이 도심에서 사라지고 한국의 사찰들이 대부분 '깊은 산골에 위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때의 배불 정책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고승들도 평소에는 산속에서 숨어 수행하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승병을 일으켜 유학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귀족신분으로 대접받던 고려불교는 한순간에 천민신분으로 추락하였다.
조선불교의 승려들은 모든 기득권을 박탈당하고 불교라는 틀도 내려놓고 민중속으로 들어가서 맨손으로 불교의 새싹을 키우게 된다.
사진은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배척에 앞장선 정도전 초상화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