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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장

작성자토우,|작성시간26.06.14|조회수28 목록 댓글 0


중국에서는 수국을 보라색 태양의 꽃, 자양화紫陽花라고 부른다.

何年植向仙壇上
하년식향선단상

早晩移裁到梵家
조만이재도범가

雖在人間人不識
수재인간인불식

與君名作紫陽花
여군명작자양화



어느 땐가 신선의 땅에 심었던 것을

어느날 이 절로 옮겨 심은 모양이다.

인간세계에 있어도 사람들이 몰라보니

너에게 보라색 태양의 꽃,자양화라 이름 지어주노라

백락천이 항주자사로 있을 때이다.

아침일찍 초현사招賢寺를 방문하였다.

주지가 경내를 안내하였다.
뜰에서 보랏빛으로 탐스럽게 피어난 꽃을 보고 이름을 물었다.

주지도 꽃이름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 말끝에 백락천이 꽃을 들여다 보면서 시한수를 읊었다

색깔은 자줏빛이고 향기가 있는 것이 매우 아름다웠다.마치 신선의 세계에 있는 꽃 같았다.

그래서 자양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이후 중화권에서는 수국의 별칭으로 자양화를 사용하고 있다.

대원사에도 일주문을 들어서면 53,그루 백일홍사이로 산수국꽃이 예쁘게 피어난다.

산수국길 가운데로 그린 카페트가 깔려 대원사 1번도로가 되었다.

연지문에 들어서면 단풍나무가 가지를 펼쳐 파라솔을 만들고 있다.

단풍잎사이로 황금범종이 보이고 푸른빛 산수국이 소담스럽게 피어난다.

일본에서는 수국을 온나노 하나.여자꽃이라고 한다.

수국은 일본이 원산지이다.일본 사찰에 가면 갖가지 색깔의 수국이 도량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다.

일본말로 수국은 오타쿠사.혹은 온나노 하나라 부른다.수국은 산성토양에서는 푸른빛으로 피어나고 알칼리성 토양에서는 붉은 색으로 피어난다.그리고 피어서 질때까지 계속 색깔이 바뀐다.

온나노 하나는 여자꽃이라는 뜻이다.수국이 토양따라 색깔이 바뀌듯이 여자는 어떤 남자를 만나는 가에 따라 인생이 바뀐다는 뜻이다.수국의 꽃말은 변덕이다.

일본의 막부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독일인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시볼트는 수국의 한 품종에 오타쿠사.라는 학명을 붙였다.

오타쿠사는 일본의 현지처 이름이었다.
변덕이 심한 여자의 마음과 비슷하다 해서 아내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시볼트는 일본인들에게 서양의술을 가르치고 일본의 식물을 조사하고 연구하였다.그의 연구결과는 일본식물지로 간행되어 유럽에서 일본학 연구에도 영향을 끼쳤다.

시볼트와 오타쿠사 사이에서 구스모토 이네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다.그는 일본인 최초의 여자의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사진 1번 대원사 산수국앞에서 수국은 일본이 원산지이고 산수국은 제주도가 원산지이다,

사진 2번 대원사 일주문부터 김지장 박물관 까지 산수국이 피어난다.

이순신장군은 명나라장수들에게 접빈다례의 예를 갖추어 차를 대접하였다.

이순신장군이 명나라 장수를 맞아 정성스럽게 접빈다례(接賓茶禮)를 베풀고 소통한 명확한 기록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당시 유학자나 무관들에게 차(茶)는 사적인 기호품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손님이나 장수를 맞이하는 공식적인 외교 의례의 핵심 수단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명나라 장수들을 향해 예를 다해 차를 대접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이고 구체적인 기록을 소개한다.

​갑오년(1594년) 한산도 통제영에 머물던 시절, 명나라 장수 파총(把總) 장홍유(張弘由)가 병선 5척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의 진영을 방문했을 때의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4년 7월 17일

"식시(食時, 오전 8시~10시경)에 명나라 장수 파총 장홍유가 병호선 5척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나는 진다례(進茶禮)의 자리를 접빈진다례(接賓進茶禮)로 베푼 다음, 술잔을 서로 권하며 감개한 정을 나누었다."

장군은 단순히 차를 한 잔 내어준 것이 아니라, 손님을 정중히 영접하는 격식인 접빈진다례를 갖추어 대접했음을 일기에 분명히 명시했다. 치열한 전장 속에서도 최고 지휘관으로서 외교적 격식과 평정심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순신 장군의 이러한 정성 어린 다례 접대는 명나라 장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후대의 설화나 기록에 따르면, 장홍유는 무장(武將)인 이순신 장군이 군사력뿐만 아니라 고결한 문화적 소양인 다도 예절까지 완벽히 갖춘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명나라로 돌아가 장군의 다례의식을 크게 찬탄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명나라 장수들 사이에서 "조선의 이순신 통제사를 만나 차 대접을 받는 것"이 큰 기쁨이자 명예로 통했다.장군을 존경하는 의미로 명나라에서 가져온 귀한 찻숟가락이나 차항아리등을 선물로 건네기도 했다.

​전쟁 중 명나라 장수들과 술자리를 가진 기록도 많지만, 중요한 작전을 논의하거나 첫 만남을 가질 때는 차를 선호했다.

명나라 장수들 중에는 오만하거나 거친 인물이 많았다.이순신 장군은 이들과의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술로 자극하기보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차(茶)를 매개로 대화함으로써 조선 수군에 유리한 협조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했다.

정찬주 작가의 소설 이순신의 7년과 대원사 떡차에 얽힌 이야기가전해진다.

​정찬주 작가는 호남의 역사와 불교 문화를 깊이 연구해 온 작가이다.

그의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에는 전라도 남해안 일대의 의승군들과 이순신 장군의 교감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작가는 임진왜란 당시 보성, 여수, 순천 등의 사찰 스님들이 이순신 장군을 도왔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다. 스님들이 군영에 올 때 자신들이 직접 만든 대원사 떡차를 가져와 장군에게 바치거나 함께 나누어 마시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왜란 중 이순신 장군은 위장병과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는데, 소설 속에서 의승군들이 가져온 떡차는 장군의 아픈 속을 달래주고 팽팽한 긴장감을 이완시켜 주는 '선약(仙藥)'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보성 천봉산에 위치한 대원사(大原寺)는 예로부터 질 좋은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스님들이 전통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다도(茶道)'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대원사는 녹차수도 보성의 시배지이며 350년 수령의 고차수군락지가 있다.

​찻잎을 쪄서 찧은 뒤 엽전 모양으로 뭉쳐 말린 '떡차는 오랜 시간 보관해도 상하지 않고, 부피가 작아 군영으로 이동할 때 품에 지니고 가기 가장 좋은 형태였다.

​당시 스님들에게 차는 수행의 도구이자 상비약이었다. 전쟁터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순신 장군과 수군들이 전염병과 피로에 시달렸다.

그때 의승군들이 자기 절에서 정성껏 빚은 떡차를 가져와 대접한 것은 단순한 음료의 공양이 아니라 "장군님, 건강을 보존하소서"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의료적·정신적 지원이었다.

​역사적 사실(Fact)과 문학적 상상력(Fiction)을 연결해 볼 때, 의승군들이 자기 절의 차를 가져와 이순신 장군에게 드렸을 가능성은 100%에 가깝다.

명나라 장수 장홍유를 대접할 때 이순신 장군이 베풀었던 '접빈다례'의 차 역시, 물자가 부족했던 군영의 상황을 고려하면 전라도 지역(보성 대원사, 여수 석천사 등)의 의승군들이 장군을 지지하기 위해 가져온 차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사 장삼을 벗고 판옥선의 노를 저었던 의승군들이라면, 자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사찰의 야생 차를 다려 장군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했을 것이다.

정찬주 작가의 《이순신의 7년》은 이순신 장군이 난제를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로 의승군들의 헌신'과 떡차의 약효를 주목했다.

국난 극복의 현장에서 의승수군 스님들이 가져온 차 한 잔은 이순신 장군에게 조선을 지켜내야 할 또 하나의 따뜻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사진은 보성 열선루이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있나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선조에게 장계를 올리고 왜군과.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였다.


숙선옹주가 남긴 차시(茶詩)

시냇가 푸른 이끼에 앉아
솔잎모아 차를 달인다.
차한잔 마신뒤에 시를 읊으니
꽃사이로 나비가 날아 다닌다.

해질 무렵 난간에 기대어 서니
봄기운이 천하에 가득하다.
돌아 오는 새는 대숲으로 날아 들고
시냇가에 앉아 차를 달인다.

*숙선옹주는 정조임금과 후궁 수빈박씨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의 동복여동생이다.12살때 홍현주와 혼인하였다.

홍현주는 뛰어난 문장가이며 시문과 차를 즐긴 분이다.

초의는 스승의 비문을 홍현주에게 부탁하고법제한 차를 선물로 드렸다.

초의차에 반한 홍현주는 다도와 동국차의 유래를 물었다.

초의가 답으로 보낸 저술이 차의 책으로 유명한 동다송이다.

사진은 어린왕자의 고향별 대원사 아실암이다.

백제의 사천왕은 어떤 모습일까?

백제 장인들의 솜씨로 조성된 사천왕상이다.

일본. 호류지 금당에 1400년의 세월을 견디고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나무로 조각하고 채색을 했지만 오랜 세월 지나오면서 목조의 질감만 남았다.

조선 중기 이전 사천왕상이 남아 있지 않은 국내에서 백제시대의 사천왕을 볼 수 있는 이곳은 나라의 호류지이다.

장군상보다 문인풍의 백제 사천왕은 산문 입구가 아닌 호류지 금당안에 모셔져 있다.

모진 세월을 견뎌 내고 백제문화의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백제왕들이 썼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서구식 패션도 눈길을 끈다.

백제 사천왕을 통하여 백제 때 장군들의 무기와 복식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지적인 얼굴도 아름답다.

사찰에 사천왕을 모실 때 조선시대 조성된 것만 판박이처럼 재현하지 말고 백제 스타일 사천왕도 복원하기를 바란다.

일본은 문화유산을 처음 채색하고 금박한 상태로 보존한다.

한국불교는 금박이 벗겨지거나. 훼손되면 새로 금박을 입힌다.

고불古佛인지 신불新佛인지 구분이 안된다.

백제때 채색이 벗겨지고 목조질감이 드러나는 사천왕상이 아름답다

사진 1번 호류지 금당이다.

본존불 동서남북으로. 사천왕을 모셨다.

사진 2.3.4번 1400여년전 백제의 장인들이 만든 목조 사천왕상이 훼손없이 보존되어 오는것은 기적이다

세상일은 하나씩 줄이기를 원하고
내 마음은 하늘과 함께 노닐기를 구한다.

조선의 천재시인 허균이 남긴 차시 6편을 간추려 옮겨 적다.

1.누실명

반 사발의 차를 마시고
향 한자루 피운다네

한가롭게 묻혀 살면서
건곤과 고금을 생각하네

남들은 누추한 곳에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만 내게는 맑은 신선의 삶이라네

마음과 몸이 편안한데
누가 누추하다고 하는가

내가 누추하다고 하는곳은
몸과 이름이 함께 썩는 것이거늘..

2.용단차

용단을 잘게 쪼개 달이나니
그 맛은 밀운도 저리 가라하네

갈증나서 일곱잔을 모두 마시니
답답함을 없애주는 품이 제호보다 낫도다.

호남에서 따온 차가 특별히 맛있다고 하니 이로 부터 나는 천지차의 노예가 되었도다.

3.조용한 반나절

바람은 활짝 핀 꽃을 어루만지고
새소리와 어우러지네

검은 대숲에 비내리니
푸른 차연기가 젖는구나

조용한 반나절을 맑은 마음으로 보내니
평지에도 신선있음을 이제야 알겠구려

4.은사발로 차를 마시네

소원의 주랑엔 해가 기울었고
처음 달인 햇차를 은사발로 마시네

연못에 심은 연꽃 푸른잎을 펼치는데
비 맞은 장미는 꽃을 활짝 피었구려..

5.차솥과 경전

차솥과 경전이 나의 생활이고
청려장과 나막신이 나의 행장이네

조만간 임금님이 돌아감을 허락하면
초야에서 두건벗고 마음껏 노래하리

6.시에는 기교가 필요없다.

꽃찾고 달담는데
두셋이 동반하고

차달이고 향사르니
거동이 단아하다.

모임에는 약속이 필요없고
의식에는 겉치례가 필요없다.

시에는 기교가 필요없고
바둑에는 승부가 필요없다.

세상일은 하나씩
줄이기를 구하고

이 마음은 하늘과 함께 노닐기를 구한다.

경신일도 기억하지 못하고
갑자도 망각해 버린다면

이것이 바로 티끌세상의 선경이요.
불가의 정토라네

사진 1번 대원사 아실암의 아침풍경이다.

사진 2번 대원사 일주문 수국길이다.

사진 3번 대원사 연지문 탐스런 산수국이다



고려불교를 멸망으로 이끈 두가지 이유

첫번째 이유 ㅡ고려의 왕이 티벳라마들에게 수계를 받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국왕과 공주가 원나라에서 온 티베트 라마승에게 직접 수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해진다.

​수계장면은 고려의 유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당시 국왕이었던 충선왕과 그의 부인 계국대장공주는 티베트에서 온 라마승들에게 수계를 받았다.

​티베트의 라마승 팔합사(八哈思) 등 19명이 오니, 왕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상왕 충렬왕)와 아들(국왕 충선왕), 그리고 원나라 공주까지 온 왕실 일가가 한자리에 모여 티베트 라마승에게 무릎을 꿇고 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기존 고려 국왕들이 받던 전통 불교의 '보살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고 말한다.

​삼매야계(三昧耶戒) 수용: 전통 보살계는 대승불교의 도덕적 규범을 따르겠다는 약속이지만, 티베트 밀교의 수계는 삼매야계라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국왕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계를 주는 라마승 앞에서는 철저히 고개를 숙이고, 라마승을 부처와 동등한 법왕으로 받들어야 했다.

성리학자들의 시선에서 이 사건은 국가의 기강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한나라의 국왕이 정체불명의 외국 승려발밑에 엎드려 절대 복종을 맹세하는 모습은, 유교적 왕권과 국가의 존엄성을 완전히 짓밟는 행위였다.

원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이 숭상하는 종교에 왕실 전체가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성리학자들에게 심각한 굴욕으로 다가왔다.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이 보기에 고려 국왕들의 이러한 행태는 국왕이 제정신을 잃고 이단의 승려에게 나라의 영혼을 팔아넘긴 꼴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건국 이후 불교를 철저히 공적 영역에서 배제하고 왕실의 수계를 법으로 금지하는 강력한 배불 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두번째 이유 ㅡ 불교 사찰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을 뺏기 위해서이다.

​성리학자들이 내세운 숭유억불의 명분 뒤에는 권문세족과 사찰이 독점하고 있던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새로 세운 조선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겠다.는 아주 강력한 경제적·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었다.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비롯한 배불 논쟁은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사상적 공격 수단이었다.

​고려 말 사찰은 종교 시설이 아니라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거대 재벌이었다.
사찰 토지는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지였다. 권문세족들이 세금을 안 내려고 자기 땅을 사찰에 위장 기부하거나, 사찰이 고리대업으로 농민들의 땅을 빼앗으면서 전국 비옥한 토지의 상당수가 사찰 소유로 넘어갔다.

사찰에 소속된 노비 역시 국가에 군역을 지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농민들이 가혹한 세금을 피해 스스로 사찰의 노비나 승려가 되면서, 국가가 부릴 수 있는 군인과 세금을 낼 백성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조선을 건국했지만, 당시 국가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공신들과 관료들에게 줄 월급조차 부족했다.

​새 왕조가 유지되려면 토지와 노비가 필요한데, 그 대부분을 구세력인 권문세족과 사찰이 쥐고 있었다.
사찰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생존이 걸린 필수 과제였다.

​정도전과 사대부들은 사찰 재산을 환수하기 위해 치밀하게 법과 제도를 바꾸어 나갔다.

​1단계: 과전법(科田法) 실시 (1391년, 조선 건국 직전)
​사찰이 부당하게 소유한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몰수하고, 이를 신진사대부들의 관료 조세원으로 재분배했다.

​2단계 도첩제(度牒制)로 인력 통제
​아무나 승려가 되지 못하게 국가가 허가증(도첩)을 발급하고 비싼 세금을 물리게 했다. 이로 인해 사찰로 도망쳤던 수많은 양민과 노비들이 다시 국가의 통제를 받는 농민으로 환원되었다.

태종·세종 대의 대대적인 사찰 통폐합
​이방원(태종)과 세종대왕 시절에 이르러서는 수천 개에 달하던 사찰을 수십 개로 강제 통폐합했다. 이때 사찰이 보유했던 막대한 토지와 수만 명의 사찰 노비가 공식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어 군인으로 편성되거나 국가 소유 노비가 되었다.

​"불교는 이단이다"라는 사상적 공격은, 사찰이 독점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합법적으로 빼앗아 국가 곳간을 채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정치·경제적 명분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대대적인 배불(排佛) 정책이 시행되면서, 수백 년간 기득권을 누리던 사찰들은 줄줄이 폐쇄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다.
절에서 쫓겨나거나 승려 자격을 박탈당한 수많은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 혹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절에서 쫓겨난 승려들의 운명은 크게 네 가지 경로로 나뉘었다.
​조선 조정이 승려들을 내쫓은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부족한 군사력 확보였다.
​머리를 기르고 강제로 환속당한 젊고 건장한 전직 승려들은 곧바로 국가의 정식 군인으로 편성되었다.
​고려 말 사찰에서 승병으로 활동하며 무술을 익혔던 이들은 조선 초기 북방의 여진족을 막아내거나 남방의 왜구를 토벌하는 최전선 군사 기지에 배치되어 험난한 군 생활을 해야 했다.

​사찰이 통폐합되면서 사찰 소유였던 수많은 '사찰 노비'와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승려들은 신분이 급격히 추락했다.
​조선 왕조는 이들을 대거 국가 소유의 공노비(公奴婢)로 전환했다.
​사찰에서 기술을 배우거나 예술적 재능이 있던 승려들은 조선 사회의 신분제 아래에서 최하층 천민인 광대. 사당패, 또는 장인집단으로 흘러 들어갔다.
​절에서 불상을 조각하고 종을 만들던 기술자들은 국가 관청의 노비 장인이 되었다.

​사찰 의례에서 재를 지내며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던 승려들은 민간으로 흘러들어 가 광대나 무당의 무리에 합류했다. 조선 시대 유랑 예인 집단인 '남사당패' 등의 뿌리에 환속 승려들이 깊게 연관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도성(한양) 출입이 금지되고 사찰 재산이 몰수되는 와중에도 불교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승려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 암자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조선 유학자들의 온갖 멸시와 핍박을 견디며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사찰이 도심에서 사라지고 한국의 사찰들이 대부분 '깊은 산골에 위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때의 배불 정책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산대사나 사명대사 같은 고승들도 평소에는 산속에서 숨어 수행하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승병을 일으켜 유학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귀족신분으로 대접받던 고려불교는 한순간에 천민신분으로 추락하였다.
조선불교의 승려들은 모든 기득권을 박탈당하고 불교라는 틀도 내려놓고 민중속으로 들어가서 맨손으로 불교의 새싹을 키우게 된다.

사진은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배척에 앞장선 정도전 초상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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