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시대에는 음력 시월이 상달이었지만, 현대에는 양력 시월이 상달인 것 같습니다. 곱게 물들어오는 단풍을 찾아 나들이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 해도 복에 겨운 일이지요. 이 좋은 철에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서정을 우려내어 봅니다만, 아무래도 각박해진 세태 때문인지 감정이 쉽게 풀려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10월을 문화의 달이라고 정해놓고 온갖 문화행사를 벌이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다독거려 보지만, 괜히 줄어든 공휴일만 셈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의 푸념인지도 모르겠군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10월 1일은 국군의 날, 3일은 개천절, 9일은 한글날, 24일은 UN데이...하면서 일요일과 함께 연이어 놀았지만, 지금은 개천절 하루만 국경일로 법정공휴일로 하고 있는데, 그나마 올해는 일요일과 겹쳤다고 투덜거리는 주위를 더러 접했습니다. 공휴일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대단히 미안하지만, 현실 앞에 솔직해지고 싶은데요, 그렇지만 한글날만큼은 우리 모두가 경하하며 우리 글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자긍심을 한껏 키우는 날로 삼았으면 했는데, 한번 공휴일에서 제외되니 다시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나 봅니다.
한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너무나 귀중한 이 유산을 우리는 제대로 대접하고 있는지 한글이 만들어져 널리 편 달을 맞아 한번 반성해 봅시다. 또 이 글을 갈고 다듬은 분들의 뜻을 새삼 기려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되는군요. 이 분들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학자라면 우리는 누구나 외솔 최현배 선생을 꼽음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요? 더구나 외솔 선생이 우리고장 울산 출신이요, 고향 울산을 무척 사랑하시던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민족의 스승이요, 위대한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을 이 시간 만나 선생과 교감하며, 외래문물에 물들어 가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들어내고 반성을 하여봅시다.
겨레와 한글을 위해 태어난 외솔 선생님의 숙명 같은 삶을 들여다보면 숙연해지는 마음을 감출 길 없음을 먼저 표현하겠습니다.
외솔 선생님은 1894년 10월 19일 당시 울산군 하상면 동리 그러니까 오늘날 중구 동동에서 최병수씨와 박순화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동동이라기 보다 병영이라고 하면 위치를 더 쉽게 이해하시겠군요. 외솔 선생의 부모님은 현배, 현구 형제분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가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다 한결같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깊은 충의의 가정임을 들여다보게 되는데요, 구한말에 태어나 80평생을 오로지 한글 연구와 보급, 국어운동 등 나라사랑 겨레사랑으로 일제의 같은 탄압과 옥고를 겪으면서도 불같은 삶은 산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아우인 현구, 사촌인 현표, 6촌인 원득 선생 역시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당시 병영의거에 참여하여 옥고와 태형을 치른 충의를 보였습니다.
외솔 선생의 본관은 경주입니다. 경주최씨지요. 이 일가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이중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결사대를 이끌고 서생포와 울산 도산성에서 왜병을 무찌른 큰 공을 세웠고, 뒷날 공조참판,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다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주영장으로 용인에서 싸우다 장열히 순절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바로 외솔 선생의 10대조가 되는데요, 이분의 후손으로 동학을 일으킨 수운 최제우 선생이 8세손이고, 아래로 외솔 선생은 11세손이 됩니다. 그렇지만 수운 선생과 외솔 선생이 직계는 아니고요, 외솔선생의 증조부와 수운 선생은 3종 즉 8촌간이었습니다.
그러면 외솔 선생의 윗대에서는 언제 울산으로 왔느냐, 여기에 대해 뚜렷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묘소가 울주군 언양면 반연리에 있어 일찍이 울산땅과 인연을 맺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일가는 바로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서 집성촌을 이룬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울산에서 터를 이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선생의 고조부 산소가 울주 범서면 백천에 있고, 증조부의 산소는 범서면 관문리에 있으며, 조부 산소는 웅촌면 대대리에 그리고 부친의 산소가 온양면 운화리 남창고등학교 정문 앞에 각각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선생의 5대조쯤 해서 울산에 입향 했다고 보여집니다. 충신의 피를 이어 받아 울산 땅에서 학식의 살을 보태었다고 할 수 있지요.
외솔 선생의 출생시기에 한글은 새로운 여명을 맞습니다. 선생께서 태어나신 1894년에, 관제를 개혁하고, 과거제도를 폐지하며, ‘사․농․공․상’을 평등하게 하는 등 일대 혁명을 일으킨 ‘갑오경장’이 일어났는데, 이 무렵 관보에 처음으로 한글이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5년에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써 기본을 삼는다’는 고종의 칙령이 내리고, 그 다음해인 189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순 국문판 ‘독립신문’이 창간되었으니, 한글의 여명기에 선생께서 태어나신 것이지요. 그는 여섯 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 같이 동네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이 서당 교육은 14살까지 이어졌는데, 훗날 선생께서는 그 서당교육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그저 하늘천, 따지 하며 그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 채 그저 읽기만 했으므로 이러한 교육이 얼마나 우리 겨레의 창의력, 독립성, 자주심을 저해하였을까 하는 생각만 하여도 지긋지긋한 일이다”고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이란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경험은 뒷날 필생 사업으로 한글만 쓰기를 부르짖고, 대학에서 전공과목을 교육학으로 정한 것은, 어릴 때의 지긋지긋한 경험을 밑바닥에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한문공부의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보여지지만, 그의 외삼촌이자 서당 훈장은 소년 현배의 신체가 허약하다고 글을 가르치는 분량을 제한하였으므로 7-8년간 배운 한문의 양이 많지 않았다고 외솔 선생은 회고하고 있습니다.
외솔은 어려서 몸이 무척 약했던 모양인데요, ‘나의 인생과 나의 학문’이란 글에는 “선천적으로 퍽 약하게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나가면, 바람이 분다고 치마로 머리를 덮어 씌워달라고 하기가 일쑤였고, 서당에서는 건강을 이유로 훈장이 글을 조금밖에 가르쳐 주지 않았으며, 서울로 올라와 중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온갖 병으로 언제나 의사와 약과 친하였고, 일본의 유학 시절에는 항상 고독과 약병과 친하였다”고 적으면서 만년에 수술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의사가 “선생은 두뇌의 힘으로 살아왔지, 신체의 힘으론 살아오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약한 몸으로 한문공부를 하던 중 울산의 선각자 김홍조 선생이 오늘의 병영초등학교의 전신인 일신학교를 세우자, 새 바람을 타고 새 교육을 받으니 외솔의 나이 14살, 1907년의 일이었습니다.
병영에 세워진 사립 일신학교에서 양숫자도 배우고, 체조와 일본말도 배웠는데, 한문공부에서 맛볼 수 없었던 흥미를 새 교육에서 맛보았던 모양이고, 여기서 특히 산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사고는 뒷날 ‘우리말본’이란 큰 저서를 내었을 때 논리 정연하고, 독창적인 글의 기초가 여기서 잡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4년의 과정을 마치고 지금의 서울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진학하게 되니 1910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만, 바로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점 당하고 말았지요. 그가 관립학교를 택한 이유는 당시 관립학교만이 관비로 일본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으므로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부터 관비 유학을 꿈꾸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자, 그의 표현대로 나라는 망하고, 학교는 일본사람이 주관하는 학교로 완전히 변모했지만, 외솔은 여기서 배움의 갈증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따로 학우들과 함께 주시경 선생이 운영하던 일요강습소인 ‘조선어 강습원’에 다니면서 국어를 새로이 공부함과 함께 주 스승의 한글사랑과 나라사랑하는 정신을 배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솔은 주시경 선생을 만나면서 외솔의 인생에 확고한 이정표가 세워진 셈이지요.
그러나 외솔의 학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주시경 선생과의 인연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외솔이 4학년 여름방학 때 부산 동래에서 강습회를 열고 강사로 나아간 사이 주 스승이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인데요, 나라 잃은 슬픔에 또다시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있었던 주 스승마저 잃게되자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강습소에서 100여명의 강습생들과 추도회를 열고 통곡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한글에 대한 무거운 짐을 받자는 각오를 다졌다고 보여집니다.
191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외솔은 처음 그가 노렸던 관비로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의 일어 한문과에 입학하였는데, 주시경 스승에게 이어받은 그 정신, 그 학문으로 일본말과 일본한문을 공부하게 되었으니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여의치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특히 교육학을 전공하므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여기에 대해 겨레의 혁신과 사회의 개조에 교육이 가장 근본스런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관비로 유학을 마친 그는 관립학교의 교원으로 복무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3.1독립만세운동이 한창이던 그 무렵 귀국한 외솔은 관립학교에 복무하기를 피하려 했는데, 이것은 그가 원하는 우리말의 연구 교육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는 병을 핑계삼아 고향 울산에 내려와 있다가 27살이 되던 이듬해, 전에 우리말 강습을 하여 인연이 있던 동래 고등보통학교 교원으로 2년간 근무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지요.
외솔의 생활은 여기에서 큰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것은 이 학교에서 온갖 정열을 다해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유명한 ‘우리말본’의 초고를 작성하였는데, 그것을 짓고자 여름이면 울산 북구 신흥사에서 홀로 정진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다시 일본 유학을 결심하는데, 그 이유는 ‘나라의 독립 자유를 얻자면 먼저 민족을 개조하고, 사회를 개조해야 하는데, 이 사업을 하려면 먼저 자신이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외솔의 나이 스물 아홉, 일본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여기서 교육학을 전공하였고, 대학 3년, 대학원 1년을 공부하는 동안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에 심취하였고 이의 영향으로 고국에 돌아가서는 ‘조선의 페스탈로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외솔은 대학원 시절 우리 겨레가 다시 독립국민으로서 되살아나기 위해 걸어야 할 길과 우리겨레의 근본적인 결함을 파헤치고자 ‘조선민족 갱생의 도’란 장편논문을 썼습니다. 이 논문은 1926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는데,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큰 충격과 감명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조선민족 갱생의 도’에는 ‘생명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는’ 장, ‘겨레의 중병을 진찰하는’ 장, ‘민족적 쇠약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민족갱생의 원리와 그 가능성’을 진단하고 ‘다시 살아나기 위한 노력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겨레의 중병을 진찰하기를 의지가 약하다. 용기가 없다. 활동력이 모자란다. 의뢰심이 많다. 저축심이 모자란다. 성질이 쾌활하지 않다. 신념이 부족하다. 자존심도 모자란다. 도덕심의 타락, 정치․경제적 파멸 등을 들고, 다시 살아남기 위한 대안으로 새 교육의 정신, 계몽운동, 체육장려, 도덕을 경장하기, 경제진흥, 생활방식의 개선을 외쳤는데, 이 내용이 7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선생의 혜안 앞에 부끄러워해야 할 오늘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외솔 선생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원 면허장 즉 교수 자격증을 받은 다음 귀국하여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 전문학교 교수로 12년간 재직하지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강제 사직 당했고, 다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등 파란만장한 생활을 하였지만 이 바탕에는 한결같이 겨레사랑과 한글의 연구발전, 보급하는 정신이 잠시라도 떠난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광복이 되면서 문교부 편수국장에 취임하여 교과서 편찬에 매진했고, 서울대 사범대 강사를 거쳐 연세대학교 교수, 부총장, 명예교수로 재직하시었는데, 평생을 한글과 같이 사시면서 ‘우리말본’ ‘한글의 바른 길’ ‘한글 갈’ ‘한글의 투쟁’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이 가운데 ‘우리말 큰사전’과 관련된 사연은 다시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오늘날 한글학회의 전신이 조선어연구회였는데, 이 모임의 중심 인물이 외솔 선생이었고, 이 학회의 대표적 업적은 뭐니 해도 ‘큰사전’의 편찬일 것입니다. 1929년 10월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각계 유지 108명이 뜻을 모아 ‘조선어사전 편찬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을 뽑았는데, 집행위원은 모두 조선어 연구회의 중심인물인 신명균, 이극로, 최현배, 이윤재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민족문화를 송두리째 말살하려는 일본의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악랄해지는 급박함 속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한 결과 그 대강이 짜여졌고 13년 만인 1942년 드디어 희망의 조판을 시작하였으나 교정이 시작될 무렵인 10월 1일 새벽, 저 유명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편찬에 관련된 학자 33인이 검거되어 흥원경찰서와 함흥 감옥으로 끌려가 혹독한 탄압과 고문을 받음으로 사업은 중단되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요. 이때 이윤재, 한징 두 분이 광복을 보지 못한 채 함흥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광복 후 사전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찾아내어 감격의 눈물을 닦으며 다시 원고를 손질하기 시작했지만 6.25 한국동란이 일어나 완간을 보기도 전에 또 중단되고 말았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원고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9.28 수복 후 급히 여러 회원들이 힘을 모아 원고를 두벌씩 베껴 옛날의 사고처럼 서울과 천안의 두 곳 땅속에 묻어 만약의 불행에 대비하였답니다.
이런 곡절을 겪으면서 태어난 우리의 국어사전과 우리의 한글을 우리는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요?
외솔 선생은 말과 행동에 한치의 차이를 두지 않던 삶의 본보기를 보인 실천가였습니다. 선생께서는 가정에서 명주나 모시옷마저도 거절하고 항상 무명옷을 즐겨 입었으며, 외제품을 쓰는 것을 보면 역정을 내고, 자제들이 어쩌다 외제 물건을 사다드리면 불호령을 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선생의 마음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습니다.
외솔 선생이 고향 울산에 대한 애정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이러한 사실은 선생께서 남기신 시조 가운데 잘 들어 나고 있습니다. “내 고향은 병영이다 경상도 좌병영이/ 날 길러준 이 고장이 언제나 나의 그림/ 그림을 한 아름 안고 또 다시 들렸세라”
나라 사랑, 겨레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한글과 같이 지내신 외솔 최현배 선생님은 1970년 3월 23일 새벽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77세로 별세하여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장현리에 잠들어 계십니다.
선생께서 마지막 남기신 유언이 “한글을...”하시다가 눈을 감으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들 겨레의 별을 잃은 심정으로 애도하였고, 평생을 뒷바라지에 애쓰신 부인 이장련 여사도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보름쯤 후인 4월 11일 세상을 떠나시니 두 분의 부부애를 짐작해 봅니다.
울산이 낳은, 아니 금세기의 위대한 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이렇게 우리들을 위해 살다 가셨지만, 우리는 이 분을 잊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태어나신 중구 병영동 613번지에 있던 선생의 생가는 흔적도 없이 밭뙈기로 변했으며, 며칠 전 10월 19일 선생의 탄신 105주년에 울산남부도서관에 있는 선생의 흉상 앞에 한 송이 꽃을 올리는 후학이 없었다는 것은 근본을 잊고 사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의 업적을 감히 이 시간에 논하기가 두려워 그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만으로 꾸며보았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울산이 낳은 위대한 학자의 생가만이라도 복원하여 울산의 자랑거리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10월 9일 한글날부터 10월 19일 외솔 탄신일까지 열흘간을 외솔을 주제로 한 잔치라도 연다면 삭막한 울산이 아닌 학문의 도시, 문화의 도시 울산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여봅니다.
1999.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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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복조 작성시간 08.11.23 하늘나라에 계신 시어머님이 경주 최씨였는데.... 외솔 최현배 선생님이 자랑스러웠지요. 그치만 한문을 공부하지 않음은 내잘못이면서도 아주쬐끔은 외솔 선생님 때문이라고도 핑계를 살짝 만들어 봅니다. 10월 9일과 19일 사이에 선생님의 생각을 함께 나누는 잔치를 벌이는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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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길순 작성시간 08.11.25 동감이여! 칼로 대항하던 독립운동가였더라면 아마 동상이 세워졌을 법한데, 너무 무심해 그분은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옥에 갇혀서도 만세 대신 한글 풀어쓰기를 연구했데 그것도 지필묵을 안 주어서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옥바닥에 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