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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본령

작성자늘 종|작성시간26.06.07|조회수8 목록 댓글 0

선교의 본령

 

테드 제닝스는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후의 그리스도교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후의 그리스도교는 다시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도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저는 그런 그리스도교 역사 이해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니거나 변질된 그리스도교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정교한 신학으로 그것을 가리고 거의 이천 년 가까운 유수한 역사를 내세워 그것을 합리화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각종 일탈들만 가중될 따름입니다. 특히 개신교의 일탈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헌금유용이나 세습과 같은 일들은 교회가 맘몬의 신전이 되었음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그런 곳에서 성범죄가 만연하고 사치와 허영이 조장되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한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제가 그 선교사에게서 느낀 것은 폭력이었습니다. 그의 사고와 행동은 폭력으로 점철되었지만 막상 그 선교사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함은 물론 그것을 믿음의 증거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최소한 그것이 평화의 복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강조된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강조하고 평화를 도모하기에 앞서 형제들 간의 평화가 전제되어야 함을 명심하고 예배를 드리기 전에 불화상태에 있는 형제들이 없는가를 헤아리고 그런 불화가 있는 경우 예배를 드리기 전에 찾아가 화해를 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어 평화의 전제가 형제들과의 화해라는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23-24)

 

그런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선교를 통해 새로운 신도를 모집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한 기도조차도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인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기도는 했지만 그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원수와 박해자를 위한 기도를 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회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익했던 것은 당시 사회의 약자들의 보호와 안녕을 위한 실제적인 방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의 문제는 언제나 가장 약한 약자들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논했던 노버트 브럭스(Nobert Brox)sms 초기교회에서 신교의 반영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놀랄만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세계 복음화에 대한 헌신이 맹목적이거나 소극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의미심장한 역사적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습니다.(알렌 크라이더, <초대교회의 예배와 전도>, KAP, p.21에서 인용)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선교나 전도에 대한 목회적 권고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주교이지 순교자였던 키프리안은 그의 저서 <에드 큐리늄(Ad Quirinum)>은 새신자를 위한 거룩한 120문항의 교훈을 담고 있는 교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를 총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형제들이 서로 도와랴 하고,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한다는 내용들이 있지만 불신자들의 전도를 촉구하는 내용은 단 한 구절도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비평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밀단체라고 이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빌미로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범죄의 성격을 띠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논리적인 추론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공장소에서 절대로 말하지 않고 화합을 가지지 않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실제로 네로의 박해가 있던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외부인들을 제외시켜야 할 필요가 생겼지만 그 이전에는 외부인들의 예배 참여가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박해 이후에는 외부인들이 들어오는 것이 실제적인 위협이 되었기에 금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안한 삶을 살기 원하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 출세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특히 이 부분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가 아니거나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그리스도교에는 기복주의나 간증 따위는 애초에 자리할 곳이 없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박해가 항상 있던 것은 아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라도 박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었고, 그래서 동료 순교자들의 행적을 후대에 전했으며 순교한 날을 기리고 그날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생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꾸준하게 늘었던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았고, 그런 그들의 삶의 모습이 외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외부인들이 다가와 그리스도인 지원자가 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도 그런 지원자들을 무조건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의 실천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며,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눅 14:27-30)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누리고 있던 모든 사회적인 특권들을 포기해야 했고, 언제라도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대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국교화 이후 복음 전파는 국가의 공권력이라는 폭력에 자연적으로 편승해야 했고, 그것은 식민지 정복의 선두에 선교사들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후로 선교는 폭력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 단념해야 하는 것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 안에서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가 사라지는 단초가 되었고, ‘정당한 전쟁’이라는 신학마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의 본령은 사랑입니다. 당연히 폭력이 없는 자발적인 동의를 기반으로 합니다.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다가와 하나님 백성이 되기 원하는 경우에도 그들이 포기해야 할 대가를 먼저 생각하게 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낳는 선교,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복음 전파야말로 그리스도교 선교의 오직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내면화하여 복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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