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업
“한국을 대표하는 EoC 기업 성심당은 1956년 천막 찐빵집에서 출발해 현재 1600명의 직원을 품은 거대 로컬 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심당의 놀라운 점은 IMF 외환위기나 대형 화재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오히려 지역사회 및 직원들과 고통을 나누며 재기했다는 것이다. 성심당의 성장은 단순한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위기 때마다 되돌아온 '관계의 축적'이었으며, 수익을 사회에 환원(지난해 16억 원)하며 부유함이란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빚어지는 것임을 증명했다.”-가톨릭 지금 여기 기사에서 인용
저는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심장이 뜁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한 분이 제가 경제활동을 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말한 경제활동 역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일컫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을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른 삶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달라진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돈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은 뭐니 뭐니 해도 모니(돈)가 최고라는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모니가 아니라 무조건 사랑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돈과 사랑이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의 동인은 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의 동인은 사랑입니다.
위 기사에서 성심당의 성장이 위기 때마다 되돌아온 ‘관계의 축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기사에서 말하는 ‘관계의 축적’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동인이 될 때 관계의 축적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의 축적이 이루어질 때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결국 위 기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심당이라는 기업이 추구하는 바가 복음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성심당은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교회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심당이 보여주었듯이 하나님 나라는 기업의 생존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직원들과 고통을 나누었습니다. 단순히 직원들과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와도 고통을 분담했습니다. 이 사실 역시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대안사회로서 세상을 전복시키는 일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역사회와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성심당이라는 기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자들과의 연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희생의 체제”인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제가 경제활동을 할 것이라는 어떤 분의 예상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신용불량자로 거의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매순간 달라지고 있습니다. 사고가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점점 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커지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열정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나이 든 노인인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단정을 내립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앞으로 제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자기합리화는 자기 연민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자들의 나라입니다. 작은 자들의 나라에서는 소외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도 큰 자가 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보다 작은 자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평등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구도 크고 작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다스리지 않음은 물론 어떤 큰 자도 군림하지 않는 권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크고자 하거나 위대해지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이루어지는 평등을 오히려 불의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고, 개인의 소유를 절대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빈부의 격차를 아랑곳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의와 질서라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사고로는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샬롬의 구현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고를 지닌 채 경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교회들마저 저마다 더 큰 교회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한 지체인 다른 교회들을 능멸하고 경쟁 속으로 몰아넣으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교회가 스스로를 “좋은 교회” 혹은 “건강한 교회”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허무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모든 초점이 돈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결코 아니라는 주장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경쟁 속에는 힘이 자리하게 되고, 결국은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될 따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이 “선교? 그거 다 돈이지요.”라는 말이 나오고 “구제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지요.” 따위의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동인이 돈이라는 사실이 이처럼 명백한데도 자신들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그곳에서 주인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일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을 불러다 일을 시키고, 한 시간 일한 경우에도 하루치 품삯을 똑같이 지불합니다. 일을 잘 하기 때문에 먼저 불려온 사람들은 자신들도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되자 불평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초점이 돈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포도원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 비유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돈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행위였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없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불의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더 많이 사랑하고 계속해서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날마다 조금씩 가난해져서 마침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용할 양식마저 필요 없게 되는 순간 주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물조차 마실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죽음의 순간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하면서도 끝까지 소유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두가 돈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경제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무슨 커다란 기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도 저는 그 일을 하고 있고, 제 소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아니 생명이 남아있는 한 그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저의 삶입니다. 사람들은 성심당과 같은 기업에 주목하지만 섬심당 뿐만 아니라 그런 제가 바로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