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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심히 어려운 선택

작성자늘 종|작성시간26.06.10|조회수7 목록 댓글 0

심히 어려운 선택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사실임을 알아도 그 이유를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다르게 생각합니다. 박해 때문이었다는 사고가 일반적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잘못된 종말론에 경도되었다는 식의 이해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반대의 사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사회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고지론”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효율을 위해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었고, 특히 개신교에서는 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복주의”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신학적으로 완전한 안전판을 만들었습니다.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아무것도 안 해도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개인이 무엇인가를 구원에 덧붙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가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주장하려는 사람은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교회 밖으로 추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다니던 신학교의 교수님 한 분이 “열매로 알리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굉장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분은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피하며 교수직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자칫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인간의 행위를 강조할 수 있는 위험한 제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책의 제목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를 부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사고할 수 있거나 겸손한 목사님들은 그러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담임목사가 되어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개구리 올챙이 시절의 이야기로 돌변합니다. 오히려 자신도 그러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로 자신을 더 좋은 목사로 생각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렇게 담임목사가 된 목사들은 자기 교회라는 우상을 섬기는 그리스도인 아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담임목사를 따라 교인들 역시 교회를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는 어리석은 우상숭배자들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저의 지적은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됩니다. 누구도 제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형교회 목사들과 같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나 신학교 교수들과 같은 신학자들에게 귀를 기울일 뿐 저와 같은 사람이 하는 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기한 것이 제 글이 칼럼으로 수십 년 동안 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런 매체들에 기고한 적도 없고, 특히 제 글이 실리고 있는 매체를 후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는 제 글이 지금도 칼럼으로 실리고 있는 것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미친놈이라면 제 글을 싣고 있는 사람들은 더 미친 분들입니다. 아전인수 같아 보이겠지만 오래도록 숙고한 후에 저는 이 일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임을 아는 것이라는 믿음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로마는 “종교의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종교들이 난무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들”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들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의 대인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멸시를 받는 사람들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성공한 사람들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완전히 반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섬겼습니다. 애초에 성공할 수 있는 기회마저 사라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성공에서 멀어진 것은 그들이 경쟁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경쟁하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경쟁하지 않음은 물론 경쟁에서 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망한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직업을 오히려 버려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죽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살아보십시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어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래 전 제가 아는 목사님이 제가 쓴 글에서 하나님 나라의 평등이 오히려 불의한 일이라며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선교단체의 간사출신이었습니다. 논쟁이 불거지자 그 선교단체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 편을 들어 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평등이 불의이며 결과적으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는 하향평준화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태도가 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폭력적이었습니다. 오늘날 일베와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세상의 저항”임을 알았고, 그들의 폭력을 보고 “세상의 저항”이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을 죽인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직접적인 사형선고가 없고, 종교재판과 같은 폭력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감당할 수 없어 추방하고 죽이려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실제로 돈이 주인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죽으려고 환장을 한 사람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눈에는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들처럼 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난은 저주이고, 부자가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정 반대의 나라입니다. 가난해져야 들어갈 수 있고, 모두가 가난하게 살려고 할 때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결국 죽으려고 작정을 하지 않으면 그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기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우회로를 만들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풍자한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뒤뚱거리며 교회를 드나드는 거위들이 된 것입니다.

 

저는 “박해”보다 배나 더 무서운 것이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소유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체제”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하기를 포기하고, 죽을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나 지금이나 똑같이 심히 어려운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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