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이 된 선교
저는 선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미션”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18세기, 극단의 시대. 원주민 과라니족의 마을로 선교활동을 온 ‘가브리엘 신부’와 살인 복역수 ‘멘도자’가 대조됩니다. 한 사람은 비폭력으로, 한 사람은 무력으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자 합니다. 다른 모든 스토리를 차치하고 저는 이 모습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정복과 선교가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미개한 원주민들의 구원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목적이 다릅니다. 과연 누구의 목적이 타당할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브리엘 신부의 목적이 타당하고, 원주민들의 구원은 그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들의 목적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다르더라도 그것이 과라니족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공히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려는 의도를 지녔습니다. 그것은 멘도자뿐만 아니라 가브리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제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평화의 복음은 전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 5:13-16)
저는 이 말씀이 곧 선교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역할이 있습니다.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역할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표현이 바로 “산 위에 세운 마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마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 마을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산 위에 세운 마을과 같은 곳을 보지 못했고, 상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세상은 가능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새로운 세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보면서 자신들이 살던 방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 완전히 다른 “산 위에 세운 마을”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매료되어 그곳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선교의 본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교회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거나 이방인들의 개종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할 따름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한 것은 그것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진정한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대로 사는 삶에 몰두하였고,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 하나님 나라를 본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오라고 부르거나 초대하지 않아도 다가와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이 되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 5:38-42)
점강법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이 말씀은 사실 실천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자신들의 요구나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돌아서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발적인 동의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사고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여 힘과 영향력을 소유한 이후에 그것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고, 그래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고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적인 사고입니다. 힘과 영향력으로 이루는 변화는 상대방의 자발적 동의라는 하나님 나라의 대 전제를 이루지 못합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과라니족”은 결국엔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발적인 동의라는 하나님 나라의 필수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힘에 의해 굴복했을 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남미의 그리스도인들이 미사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토착종교 의식을 버리지 않은 것은 이 같은 자발적인 동의의 과정 자체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예언자들을 보내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시기도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하늘에서 불을 내려 황급히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게 만드시거나 아예 그들을 없애버리시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오히려 구속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의 사랑에서는 그런 면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당신을 사랑하도록 요구하지도 않고 그렇게 만드시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자발적 동의에 의한 반응이 사랑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선교에서는 바로 이 자발적인 동의의 과정이 생략됨으로써 폭력적이 되었고, 폭력적이 된 선교가 그리스도교의 가장 현저한 우상이 되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제 생각에 동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선교란 절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선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선교가 우상이 되었다는 절대적인 증거입니다. 사랑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설사 가장 악한 악이라도 사랑은 그것을 용납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끝까지 그 악의 마지막까지 함께 할 따름입니다.
오늘날 선교가 우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이 진정한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렇게 복음을 보고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 복음의 삶에 투신한 사람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선교를 보고 싶고,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