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단상

정신을 차려야 할 때

작성자늘 종|작성시간26.06.14|조회수5 목록 댓글 0

정신을 차려야 할 때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공부를 많이 합니다. 새신자반을 시작으로 단계별로 성서공부를 이어갑니다. 성서통독은 평생의 과제입니다. 실제로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에 비해 엄청난 성서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도 많이 합니다. 특히 대표기도와 같이 말로 하는 기도에 능통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와의 만남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성서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고, 기도도 잘 하는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사회의 신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제가 사업을 한다면 그리고 누군가와 동업을 하거나 사업파트너가 필요하다면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가급적 피할 것입니다. 이유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거나 종교적인 행위는 많이 하지만 성품의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는 동업자나 사업파트너로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서지식이나 기도를 많이 하거나 잘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다지 밀접한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개신교 목사로서 저는 성서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유창하게 기도도 잘 하는 많은 이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세련된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지만 결국 돈의 노예들이었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얼마 전 아르헨티나에서 온 동기목사가 저를 만나겠다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정말 친했지만 거리상 만나지 못했던 반가운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주일에 온누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저는 온누리교회와 같은 교회야말로 이 시대 가장 악한 교회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물론 정말 친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게 연락을 끊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오늘날 개신교 교회의 모범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고국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려던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분은 제게 작별인사도 없이 돌아가버렸습니다.

 

저는 그동안 온누리교회 신자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특히 그곳의 장로님 한 분을 만난 후에는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부심이 강한지를 절감해야 했습니다. 그분의 거들먹거림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저를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저는 그 자리에 머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교역자로서 담임목사님의 만류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제 경험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제가 그동안 깨닫고 알게 된 많은 것들을 기준으로 최소한 저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식의 문제나 기도의 유창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하히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에 따라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여하히 서로 사랑하느냐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형제애는 이미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 역시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정의나 진정한 섬김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합니다.

 

그곳에서 선포되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저는 언제나 조용기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나사로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고, 저는 너무도 기가 막혀 그 설교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더 우려스러웠던 것은 그런 내용을 설교를 들으면서 그 수많은 예배 참석자들이 쉬지 않고 아멘을 외쳐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모습이야말로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비단 그곳뿐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조용기 목사를 흉내 냈습니까. 그들은 경상도 사투리를 마치 방언처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와 그분을 추종하는 분들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대부분의 교회들 역시 스타일은 조금 다르지만 동일한 논조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유명한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는 한 설교 비평가에 의해 “예수 성공, 불신 실패”로 요약되었습니다. 그 요약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목사로서 저는 수많은 설교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설교들의 내용이 대동소이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신학자도 있었고, 교수도 있었고, 유명한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든 것을 통해 제가 발견한 것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설교들이 그런 제 결론에 확신을 더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동전 두 닢을 드린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가장 많이 넣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해석들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그 설교들은 과부가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밝히기는 했지만 헌금의 액수에 관한 이해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했다는 말씀을 들었고, 헌금은 모름지기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한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돈을 미워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조용기 목사도, 과부의 헌금의 액수가 가장 많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유가 다 드렸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모두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말씀 이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아무리 성서공부를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드리고 유창한 기도를 드린들 그것은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새 사람이 될 수도 없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내가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왜 잘 살기를 바라지 않겠느냐는 믿음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감히 말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아니라 “맘몬의 신전”들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런 말을 하는 제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더욱 분명한 맘몬의 신자입니다.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바야흐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이런 자기기만이 충만한 곳이 되었습니다. 물론 입으로는 여전히 “성령충만”을 외치지만 말입니다. 이런 자기기만에 대한 답은 이미 성서에 이렇게 분명하게 들어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미 6:6-7)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

 

미가서의 이 말씀을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분명하게 정의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