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단상

제 심장이 뛰는 이유

작성자늘 종|작성시간26.06.15|조회수6 목록 댓글 0

제 심장이 뛰는 이유

 

EoC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습니다. EoC는 Economy of Community의 약자입니다. 이것을 모두를 위한 경제라고 번역했지만 공동체를 위한 경제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공동체를 위한 경제와 모두를 위한 경제라는 의미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간과됩니다.

 

EoC는 약자를 위한 경제일 수는 있지만 강자를 위한 경제는 아닙니다. 경쟁에서 이기거나 애초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보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섬김”이라는 용어에 담으셨습니다. “섬김”이란 단순한 친절이나 배려가 아니라 양보이며 희생입니다.

 

이 섬김이라는 용어에서 자끄 엘륄은 매우 중요한 핵심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 능력”입니다.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비 능력은 무능력이 아닙니다. 비 능력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거나 사장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합니다. 비 능력은 섬김의 의미를 가장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복음 이해가 영 부족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많이 벌어 그중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정설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올무입니다. 그것은 돈의 속성을 간과하는 인간의 오만함입니다. 돈은 인간의 자아를 부풀립니다. 자아가 부푼 인간은 결코 섬김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섬김이 아니라 “자아실현”이며 “구색 맞추기”입니다. 그런 섬김은 자선이나 구제는 될 수 있지만 섬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섬김이 중요한 이유는 섬김이 단순히 어떤 재화를 나누거나 겸손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를 맞추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을 통해 능력으로 인해 발생하기 마련인 높낮이가 사라집니다. 제가 눈높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동등한 자리에 위치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이루어내는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평등은 사랑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면 높낮이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돈은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돈은 사랑을 왜곡합니다. 재산이 많은 노인에게 젊은 여인이 다가가는 이유는 너무도 뻔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여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돈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사랑의 시늉입니다. 돈이 사라진다면 그 사랑도 무의미해지는 것이 사랑의 왜곡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사랑이란 평등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그 평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과 능력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입니다. 서로 사랑하는데 자기 것을 주장하거나 경제적 불평등을 그대로 놔두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랑하면 오히려 상대방보다 더 낮은 경제적 상황을 만들려는 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저는 손자를 사랑합니다. 녀석이 말이 통합니다. 녀석이 그럴 때마다 제 사랑은 깊어집니다. 이번 주에도 내내 야채와 과일을 파는 곳을 기웃거렸습니다. 백화점엘 가면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지만 백화점을 이용하기에는 저의 경제적 상황이 조금은 열악합니다. 손자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직 나올 때가 되지 않아 복숭아가 비쌉니다. 대여섯 개가 들어 있는 박스 하나가 백화점에서는 이만 몇 천 원이고 야채가게에서는 만 몇 천 원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꺼이 그 비싼 복숭아를 삽니다. 손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를 위해서는 그렇게 비싼 복숭아를 결코 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서는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딸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의한 사랑은 이런 경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결국 EoC의 관건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행위이기에 돈이 주인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인본주의나 어떤 개인의 철학에 의해서도 그와 같은 경제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한 경제적 실천입니다.

 

저는 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가난하게 살기 운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연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경제적인 수준을 택하는가를 유심히 살핍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는 사치와 허영이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가난해질 수 있는 영적인 변화기 일어납니다. “청빈”이란 계율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EoC를 보고 심장이 뜁니다. 그것이 올바른 경제 정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경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토입니다.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마 10:7-10)

 

다 아시는 것처럼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로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하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이루어지는 일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열거되고 있는 것들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결핍의 해소”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경제 모토가 분명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러나 이 모토는 단순한 경제적 실천에 대한 명령이 아닙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행위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임과 동시에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평등입니다. 물론 섬김이라는 과정 역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의 “비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등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소유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불평등이 정의임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돈이 교회를 장악하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입에서 시장의 자유와 개인 소유의 절대성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증스럽다고 하실 것입니다.

 

제가 EoC라는 단어를 보고 심장이 뛰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맘몬의 수하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주변에는 EoC와 같은 경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EoC의 완성판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행 4:32-35)

 

EoC라는 단어를 보고 제 심장이 뛴 것은 초기교회와 같은 이런 교회 동동체가 그립기 때문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