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지도자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에서는 항상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를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은 모두가 정상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숨은 상처가 있고, 살아오면서 경함한 것들로 인한 트라우마도 존재합니다. 너무 심각해서 밖으로 드러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물속의 빙산처럼 더 크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이루어내는 합의는 아무리 공정하게 보여도 사실은 기울기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한 공동체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공동체의 원년 멤버였던 사람이 공동체를 떠났고, 인터뷰를 한 내용입니다. 내용들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하지만 마지막 결론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동체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의 교육문제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는 대부분 대안학교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공동체 식구들의 자녀들은 그곳엘 다니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그곳을 떠나 교육을 받게 됩니다.
아미시 공동체가 생각납니다. 아미시 공동체 역시 학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학교는 대안학교가 아니라 그냥 학교입니다. 그곳에서의 8년의 과정을 마친 후에 아이들은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럼스프린가”라는 기간을 가지게 됩니다. 육 개월(혹은 그 이상) 간 공동체를 떠나 바깥세상을 경험해보는 시간입니다. 기 기간 동안 살 수 있는 돈을 공동체에서 줍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동안 금지되었던 모든 것들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이 모든 것을 경험하도록 만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많은 것들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 기간을 마친 후에 아이들은 공동체로 돌아와 계속해서 공동체 안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공동체를 떠나 밖에서 살지를 결정합니다. 정확한 통계수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90% 이상의 아이들이 다시 공동체에서 살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미시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사는 곳으로 존재했습니다.
이 사실은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줍니다. 아미시들은 승려들이나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속세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자녀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아이들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라는 것이 단순하게 새로운 교회의 설립이나 더 나은 신앙생활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새로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위한 출가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기를 원하거나 세상의 방식이 머릿속의 가치관으로 작동하는 한 공동체는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경우 아무리 하나님 나라에 대해 듣고 배워도 그것은 가능한 생활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기사에 등장한 공동체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가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의를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돈을 대하는 방식을 확인해보라고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살고 가난을 지향하는지를 보라고 합니다. 저는 사실 그것만 확실하게 확인해도 절반은 이미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대하는 방식보다 한 사람의 신앙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돈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확인해야할 다른 그리스도의 가르침들과 하나님 나라의 방식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대하는 방식이며 그 다음이 권위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둘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사실 돈 없는 권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위대한 권위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식대로 작동하지 않고, 십자가의 방식, 다시 말해 섬김과 희생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는 공동체 안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가장 가난하게 살기만 해도 그 사람은 가장 복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저와 아내는 매우 바보같이 살아갑니다. 우리 부부는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돈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기꺼이 내놓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치도 서슴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십 원짜리도 함부로 쓰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위해서는 큰돈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부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면 바보가 됩니다. 사랑하면 기꺼이 져줍니다. 사랑하면 양보가 아니라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다 보면 일방적인 사랑이 쌍방향의 사랑이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아이들이 우리에게 똑같이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힘의 위대함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서로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줌은 물론 그보다 더 큰 섬김과 희생을 가능하게 합니다.
돈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돈을 따라 움직이는 권위를 무력화하는 것이 공동체의 가장 첫 번째 과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자끄 엘륄이 말한 “비 능력”을 소환합니다. 비 능력은 자신을 위해 단 한 푼의 돈도 허투루 사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동시에 비 능력은 권위를 소멸합니다. 비 능력은 권력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만드는 첩경입니다. 제가 본 기사를 통해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원년 멤버를 떠나게 만든 것도 자녀들의 문제를 가슴 아프게 만든 것도 바로 권력, 혹은 권위의 방식이 세상과 같이 작동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 돈 문제가 연관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돈을 대하는 방식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의 하나님은 허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돈을 미워하거나 업신여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종된 자기의 정체성을 부인합니다.
그렇게 주종관계가 분명하게 설정된 후에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특히 옳고 그름은 공동체가 가려야 할 사항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려주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동시에 성령 공동체가 됩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서 무분별해보이기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좋은 선택이 결정되고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한 결과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바보가 된 베드로를 소환합니다. 주님의 양떼를 위임받은 베드로는 양떼들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예언을 듣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요 21:18)
주님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위해 산산이 부서져 바보가 된 인간을 반석으로 삼아 당신의 교회(공동체)를 세우십니다. 기사를 보면서 그곳을 이끄시는 분들이 너무 똘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