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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염화시중의 미소

작성자늘 종|작성시간26.06.17|조회수5 목록 댓글 0

염화시중의 미소

 

테레사 수녀님은 선물로 받은 자동차를 경매로 팔아 그 자동차의 가격보다 비싸게 팔았습니다.

 

먼저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수녀님의 이런 행동이 과연 옳았을까요?

 

저는 그런 수녀님을 생각하며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리고 수녀님이 매우 유머러스할 뿐만 아니라 창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녀님에게 자동차를 선물한 것은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는 그분에게 발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마도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자동차를 받아 타고 다녔을 것입니다. 효율을 생각하고 힘과 영향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 나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은 효율이나 효과 따위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희생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이 살아야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다던가,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힘과 영향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력해짐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이 됩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 앞에서 절실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힘과 영향력을 추구하게 되는 일도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런 필요 앞에서 오히려 더 가난해져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오래 전 읽은 책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한 수녀님이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다른 여러 문제들로 인해 복잡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당장 내일 필요한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수녀님은 기도를 마친 후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 은화 한 닢을 호수에 던져버렸습니다. 한 푼이 아쉬운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은 하나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은화 한 닢을 호수에 던짐으로써 수녀님은 하나님을 꼼작 못하시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개입하시게 만들어 수녀님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상상하지 못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돈에 경도되었습니다. 돈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돈에 경도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일도 돈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돈에 종속시켰으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난을 모토로 삼은 테레사 수녀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돕기 전에 자신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사랑의 수녀회의 회칙에 적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고급 자동차를 받고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동차를 경매함으로써 수녀님은 돈을 업신여길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차용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수녀님처럼 사용해야 합니다. 얼마든지 세상의 방식을 차용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돈을 버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돈으로 무슨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비 능력”입니다. 비 능력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더 약한 사람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면 그 능력이 기적의 도화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섬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섬김은 단순히 희생하고 봉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능력이 없거나 모자라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팔이 없는 사람의 팔이 되어주고, 눈이 없는 사람의 눈이 되어주고, 마침내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이런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섬기기 위해서는 섬겨야 하는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그분의 생각이 바로 비 능력의 실천입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랑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꺼이 져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져준다는 사실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비 능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 능력의 실체를 다른 면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전에 테니스를 오래 쳤습니다. 예전처럼 치지는 못하지만 지금의 상태로도 테린이 수준을 못 벗어난 딸 부부보다는 잘 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제가 잘 하는 포칭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위는 그런 제 모습이 못마땅합니다. 더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위의 느낌을 잘 압니다. 제 잘못입니다. 상대방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또는 상대방이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제 잘못입니다. 제가 비 능력에 실패한 것입니다.

 

비 능력은 상대방이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떠올리기 못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길은 자신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산상수훈의 모든 교훈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한쪽 뺨을 맞은 후 다른 쪽 뺨을 돌려대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보처럼 보이고 등신처럼 보여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비 능력의 또 다른 축입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비 능력이 순식간에 능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제 경우는 이제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것도 반드시 떨어집니다. 오랜 기간의 가난과 무력함 속에서 저는 은밀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비 능력으로 행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선물로 받은 자동차를 경매로 판 수녀님이 유명세를 이용했다고도 하고,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 옳지 않은 방식으로 자동차를 팔았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수녀님의 능력을 봅니다. 그분은 자신의 능력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사용함으로써 비 능력으로 만들어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그분이 비 능력을 행한다는 사실도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수녀님을 보고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지 않으셨을까요? 그분들의 미소에 저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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