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유럽은 지금 난민 문제로 표류중입니다. 인류보편 가치를 수용해 난민들을 수용했던 나라들에서 난민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특히 스웨덴과 같이 복지에 앞섰던 나라는 더 큰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은 이제 한 걸음 물러나 난민들을 수용소에 가드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수용소가 세워진 나라에 유럽 전체가 비용을 지불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인류보편 가치를 수용했던 대가를 치르면서 극우가 주장하는 이기적인 국가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매우 극단적인 난민에 대한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지금도 인천 공항에는 입국조차 하지 못하고 공항에서 몇 년을 머무는 외국인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들이 바로 난민입니다. 우리나라는 난민에 대해 엄격한 입국조치를 취함으로써 난민 문제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일 누군가 그런 난민들에게 인류보편의 가치를 내세워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하면 극우로부터가 아니더라도 심각한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미 지구는 그런 난민 문제가 아니더라도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후위기나 플라스틱 혹은 쓰레기 문제와 같은 것들은 단순한 환경오염이 아니라 인류보편 가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동안은 선진국의 쓰레기를 수입하는 후진국들이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더 이상 쓰레기를 감당할 수 없지만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국 쓰레기로 인한 오염은 후진국 문제로 끝나지 않고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어 기후이변과 같은 또 다른 문제들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면서 난민의 수를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인류보편의 가치는 결과적으로 온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인 마음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극우들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하는 미래는 결국 난민들의 퇴치로 말미암아 더 불안한 시대가 되고 종말을 가속화할 것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한한 인간의 한계지만 결국 공멸을 향한 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한 기사에서 바울이 ‘난민 사역자’였다는 내용의 글을 보았습니다. 난민은 단순히 국가로부터 터나거나 쫓겨난 사람들이 아니라 희생양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문명은 “희생의 체제”입니다. 모든 문명의 탄생은 희생양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번영은 그 나라의 희생양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런 희생양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문명이 세계화됨으로써 난민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혹자는 내전과 같이 자신들이 일으킨 문제로 인해 난민이 생겼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무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거나 그곳의 천연자원을 미끼로 주어지는 지원과 같은 선진국들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런 내전은 양상을 달리하거나 계속 이어진다 해도 지금과 같이 더 많은 희생과 난민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이기심이 온 세상에 관영한 것입니다. 성서는 그것을 어둠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어둠이 관영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어둠에 맞서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기적으로 치닫는 세상에서 비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라는 말에 담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인류보편의 가치는 결국 모든 인류를 위한 것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비이기적인 사람을 넘어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그리스도인 본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비이기적인 행동들을 죽는 것으로 오인합니다. 하지만 비이기적인 행위를 통해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적인 전쟁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은 것이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어둠인 이유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빛입니다. 단 한 줄기의 빛으로도 어둠 속의 실상을 드러내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빛인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어둠에게는 치명적입니다. 만일 빛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산 위에 세운 마을”이 될 수 있다면, 아! 그건 상상만 해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인류보편의 가치를 넘어 온 인류의 구원을 향한 놀라운 행보입니다.
공동체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개인주의가 충만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간다는 것은 끔찍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 인간이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이기심을 억제하고 인내라는 덕목을 쌓아 마침내 서로 사랑하게 됨으로써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신천지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창조 때 이미 주어졌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샬롬’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궁극적인 모습이지만 ‘개인구원’이라는 비성서적인 영적인 올무에 함몰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극우들의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롬 8:18-21)
오늘날 전 지구적인 상황을 이처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난민들은 썩어짐의 종살이를 하게 된 피조물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을 막아 가두어 놓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고, 그렇게 돼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단순한 개인구원이 아니라 온 와 온 피조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방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제국주의가 되어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이 불행한 현실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뜨이기를 바랍니다. 성조기를 휘두르며 올림픽공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위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을 서고 있는 이 암담한 현실은 얼마나 상징적입니까? 그들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교 제국주의의 모습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극우들의 행진은 공멸을 향한 인류의 아우성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 4:9)
그리스도인들은 아우를(난민들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