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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하나님의 통치와 교회

작성자늘 종|작성시간26.06.22|조회수3 목록 댓글 0

하나님의 통치와 교회

 

오래 전 일입니다. 한 공동체를 방문하여 공동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에는 익숙한 대표기도가 다른 교회들과 달랐습니다. 대표기도 시간에 기도를 할 사람이 정해져 있지 않고, 누구나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도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초등학교 어린이였습니다. 물론 그 다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이어지지 않고 그대로 끝났습니다.

 

기존의 관점으로는 놀라운 일입니다. 대표기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교회와 예배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장로들이 그 순서를 맡습니다. 특별한 예배를 제외하고는 여자들이 대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표들이 없음은 물론 어린이가 대표가 되어 기도를 드렸다는 것은 여간 놀랍고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순서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그 시간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합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다른 교회에서 그런 순서를 만들었다면 대부분의 경우 대표기도는 침묵기도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어느 경우나 대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가 조직이 되었다는 가장 명확한 표시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표의 존재 유무는 교회의 본질과 연관된 사항입니다. 교회가 유기체라면 대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어 교회가 대의기구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없는 교단의 경우도 대표가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조직이 아니고 유기체여야 한다는 점 외에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권력이 없는 평등한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어떤 권위도, 어떤 권력도 없는 평등한 공동체로서의 교회에는 대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제 하나님 나라 이해입니다. 대표가 없다는 것은 지도자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를 통치하시는 이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그런 의미에서 직접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곳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인간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하나님 나라에는 어떤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이해입니다.

 

저는 그동안 수많은 목사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시라고 하면서도 교회의 목사가 교회의 머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런 말에 항의를 하면 목사님이 담임목사가 되어 보시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꺾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의 이해로는 권력이나 권위가 없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왕이 없던 사사시대를 과도기적인 시기로 생각하고, 왕이 없는 그 시기가 왕이 없었기 때문에 질서도 없고 저마다 자기의 주장을 하던 시대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사시대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들어보면 더 명확해집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 주어라.”(삼상 8:7-9)

 

인간 왕을 세우는 순간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은 왕이 되지 못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예언자들을 통해 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간혹 전달되는 수도 있었지만 전달되더라도 무시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옹립하는 순간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평등한 공동체가 아니라 일사불란한 조직이 되었습니다. 조직이 되고 왕이 옹립되는 순간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조직이 되어 그곳의 왕(통치자)으로 담임목사를 세우는 순간 하나님은 더 이상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하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를 많이 해도 하나님은 그런 곳(조직)에 머무실 수 없습니다.

 

저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표기도를 맡겼던 공동체의 시도가 신선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 대표기도라는 순서를 없애야 했습니다. 그래도 과도기적인 시도로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직이 지닐 수 있는 효율에 대해 무관심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사기가 비효율적으로 보이고 약해 보이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시선이 조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조직이 아닌 유기체를 논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상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평등한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연령별로 조직하여 연령별 선교회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선교회장 역시 생기지 않았습니다. 연령별 선교회장을 세우는 것이 목사의 권위와 교회의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조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독재자가 되지 않기 위함이었고,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평등한 교회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래 전 읽은 내용입니다. 한 자매가 교회에 나와 기도를 열심히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기도는 모름지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드릴 수 있어야 한다면서 중보기도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중보기도가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중보기도를 강조한 선배 신앙인을 찾아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제가 저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를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드린 중보기도의 내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위가 생기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매는 타인을 위한 기도라는 것을 애초에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애써 드린 타인을 위한 기도 역시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왕이 없는 사회, 조직이 아닌 교회를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정년이 지난 나이에도 교회를 추구하는 이유는 모두가 평등한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가 아니라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교회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이루어지는 샬롬을 보기 위함입니다.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성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성 안에 있고, 그의 종들이 그를 예배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고,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계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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