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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어쩌다 설교 하나 42.(그리스도교와 신앙)

작성자늘 종|작성시간26.06.23|조회수4 목록 댓글 0

어쩌다 설교 하나 42.(그리스도교와 신앙)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딤전 6:10)

 

모두가 알고 있는 성서의 말씀입니다. 때때로 경고의 의미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를 실천해보는 이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만일 돈을 사랑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거나 부인해 본다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떠오른 것은 수험생들 중 의대에 지원할 수 있는 학생들이 대거 반도체 관련 학과에 지원했다는 보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수험생들이 의대를 지원하는 이유도 그것이 안정된 수입을 보장하는 정도를 넘어 많은 수입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사가 되면 다른 여러 의미들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인류를 위한다던지, 병자들을 돌본다든지,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을 도울 수 있다든지, 사람들의 존중을 넘어 존경을 받을 수 있다든지 하는 여러 인생의 의미들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험생들이 의대에 목을 매는 진짜 이유는 돈입니다.

 

의대에 진학할 수 있는 우수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 우연히 본 한 섬의 노인들은 모두가 허리가 굽었습니다. 평생 엎드려 굴을 땄기 때문이랍니다. 그들은 물때만 맞으면 기를 쓰고 굴을 따러 나갑니다. 굴을 따 판 돈으로 손자들의 용돈을 주고 자식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그분들의 인생의 유일한 의미입니다. 물론 그런 돈을 통해 사람다움을 인정받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인생의 강력한 동인이 돈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런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그리스도교는 이상한 종교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종교 대부분은 인생의 부귀영화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상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눅 16:25-26)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소망은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그렇게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호사를 다 누렸기 때문에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가 인생의 부귀영화를 저주하는 종교라는 제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경우를 보면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습니다.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그런데 나사로는 그것을 이유로 천국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 역전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사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면 누가 그 신앙을 가지려하겠습니까? 물론 부자가 했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기 위한 비유라고 이 비유를 에둘러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부자로 살 수 없는 종교라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견지할 생각이 있는지를 면밀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부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 엄위한 지적을 에둘러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서는 부자의 기준이 상위 몇% 정도를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면 그 기준이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일용할 양식”은 급진적인 요구임에 틀림없습니다.

 

처음에 인용한 디모데전서의 말씀은 그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근거가 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

 

이렇게 성서를 이해하면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린 사람의 주인이 재물이었기 때문에 지옥엘 갔다는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해지고, 그것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성서는 명백하게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함께 그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욕망과 쾌락은 그것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롬 7:22-23)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의 경우도 “죄의 법”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포로가 된다는 것은 투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투항하지 않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죽음을 요구하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고 욕망의 충족과 함께 쾌락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행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죽음 직전에야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죄의 법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죄의 법을 따른 결과가 바로 “모든 악”입니다. 악한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호사를 다 누린 것이 지옥행의 이유입니다. 얼마나 합리적인 해석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서를 이렇게 이해하려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의 열심, 신앙생활에의 열심, 구제에의 참여 등등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가장 많이 드리게 해달라는 기도가 바로 그것이고, 신자들이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가 그 기도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묵상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욕망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의미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쳐서 복종시키고 돈을 미워하고 업신여긴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돈이 모든 것의 동인이 된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자본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신자유주의체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말도 안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는 정말 이상한 종교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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