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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51연대.

작성자칸타빌레|작성시간26.06.14|조회수1 목록 댓글 0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성군도 일시적으로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고성지역은 국군 없이 경찰이 방어하고 있었다.

 

경찰은 8월 1일부터 인민군의 공격을 방어하다, 8월 15일경부터 고성지역에서 철수했다. 북한군이 고성에 진입한 것은 8월 15일경, 고성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8월 17일경이었다.

 

1950년 8월경 고성을 공격한  인민군은 5군단 제7사단 제51연대 산하 1대대였다. 이후 군경이 고성을 수복한 것은 40여 일이 지난 9월 24일경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1950년 8월, 인민군 제7사단은 예비사단인 51연대와 52연대를 진주 및 의령 일대에 집결시켰다. 해당 7사단 51연대는 진주시를 거쳐 마산 및 통영 방면으로 진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이와 관련된 당시의 주요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집결 및 진출 (1950년 8월): 인민군 7사단 예하 51연대와 52연대는 8월 15일경 진주 지역에 집결했습니다.

 

통영상륙작전 (1950년 8월 17일): 51연대 예하 1개 대대가 고성을 거쳐 기습적으로 통영을 점령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국군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통영상륙작전을 감행, 이들을 격퇴하고 원문고개를 탈환했습니다.

 

마산 전선 투입 (1950년 8월~9월): 진주와 의령 일대에 머물던 인민군 7사단 병력은 이후 마산/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추가 동원되어 미 제25사단 및 국군과 치열한 고지전을 벌였습니다.

 

 

국군과 미군은 마산을 점령하고 이를 통해 부산까지 점령하려는 북한군의 45일간 공격을 막아내었다. 북한군은 미군의 적극적인 방어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북한군 6사단과 7사단은 수천명의 사상자와 포로 3천여 명 등의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의 피해도 컸다. 전력이 감소된 제24사단 29연대는 임무대 편성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상술된 포병 피해를 포함해 1천여 명의 전사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20명이 실종되었다.

 

 

8월 31일 23시 30분, 북한군은 2개 사단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9월 1일에 북한군 7사단은 남강을 도하하미군미 35연대를 공격했다.

 

미군은 공군 지원과 VT신관을 사용하는 포격 지원을 받아 북한군을 저지 했으나, 미군 35연대 1대대와 2대대 사이의 간격이 뚫리면서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이 후방 지역으로 침투했다.

 

미 35연대 1대대는 북한군의 정면 공격을 3차의 전투 끝에 저지했고, 북한군 제6사단 제13연대장 한일동 대좌가 여기서 사망했다.

 

한편 북한군의 공격 첫 날,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은 워커 중장에게 8군 예비대인 27연대 2대대의 투입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킨 소장은 독단으로 마산에 있던 27연대 2대대로 하여금 35연대의 후방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후에 워커 중장은 이를 묵인했다). 이들은 폭우와 탄약 부족으로 고전하기도 했지만 9월 4일에는 침투한 북한군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특히 공중지원이 큰 역할을 했는데, 킨 소장도 “근접항공지원이 사단을 구했다”고 평했다.

 

미 25사단은 9월 1일부터 7일까지 후방지역에서만 북한군 사체 2,000여구를 매장했다.

 

한편 9월 8일과 9일에 쏟아진 폭우로 강의 수위가 2m나 높아짐에 따라 북한군 도하가 어려워지자, 25사단은 한 숨 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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