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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여담(餘談) 1

쑨원(손문) 혁명의 일생 1: 쑨원의 성장과 흥중회 조직

작성자정태욱|작성시간15.03.22|조회수529 목록 댓글 0

쑨원의 삶은 그야말로 중국 혁명의 삶 그 자체였다고 하겠습니다. 28세에 흥중회를 조직하여 그 다음 해 최초의 봉기를 주도한 이후 쑨원은 죽을 때까지 중국의 혁명과 중국의 재건에 일로매진하였습니다. 그 살아 생전에는 중국 혁명과 중국 재건의 두 가지 일은 하나로 통합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으로 구현되었으나, 그 사후 양당은 분열하여, 한편에서는 중국 대륙의 공산주의와 타이완의 자유주의가 대립하고, 다른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마오쩌둥의 혁명의 길, 그리고 이후 덩샤오핑의 재건의 길로 순차적으로 분화, 진행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중국 혁명과 부흥의 과정은 한 세기 이상의 장구하게 진행된 것이고, 갈등과 대립, 분화와 시행착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다시 쑨원 개인의 사상과 역정 속에 이미 큰 씨앗이 뿌려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쑨원의 혁명의 이력과 그 청사진은 그만큼 포괄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이하에서 쑨원의 일생과 혁명의 전개과정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하의 논의는 주로 해롤드 시프린, 손문평전, 민두기 역, 지식산업사, 1990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다만, 시프린은 가능한 한 쑨원과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심지어 쑨원에 야유를 보내기도 하지만, 저는 시프린이 제공하는 정보에 기초를 두되, 가능한 쑨원에 감정이입하면서 그 혁명의 순수성과 열정을 살리는 데에 주력하고자 합니다.


쑨원은 1866년 중국 광동성의 광저우 근처 해안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광저우는 바로 홍콩, 마카오와도 이웃하고 있고, 청나라가 쇄국정책을 펼때에도 유일하게 서방과 교역이 허용된 곳이었으며, 아편 전쟁 이후 가장 먼저 개항된 항구이고, 이후 중국 노동력이 미국 등지로 나가는 데에 있어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쑨원의 부친은 성실한 농민이었으나 가계는 넉넉치 않았고, 큰 형은 일찍이 하와이로 진출하여 사업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어렷을 적 서당에도 조금 다녔던 쑨원은 서당 선생이 들여주는 태평천국의 무용담에 감동받고, 그 자신 '홍슈취안(홍수전)'을 영웅으로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13세에 쑨원은 큰 형의 부름을 받고, 하와이로 이주하여 서양 학문을 공부하고 또 형의 사업을 보조하기도 합니다. 하와이에서 4년 동안 영국계, 미국계 학교에서 수학한 쑨원은 서양 학문에 심취하였으며, 마침내 기독교 입교 세례를 받을 생각도 합니다. 정체성 상실을 걱정한 형은 쑨원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 보냅니다. 고향에 돌아온 쑨원은 더 이상 한 명의 동네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양의 여웅들과 인류 역사의 흐름을 친구들에게 역설하였고, 마을의 토착신의 형상을 파괴하는 등 중국인들의 무지몽매를 통타하다가 마을 어른들의 탄핵을 받아 쫓겨 나게 됩니다. 마침내 정말로 '제2의 홍슈취안'이 된 것입니다.


마을에서 쫓겨난 쑨원은 홍콩으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의학을 전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자신의 아르바이트와 형의 재정지원으로 학비를 댈 수 있었습니다. 사이에 잠깐 고향에 가서 부모님이 정혼한 여인과 혼인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청불 전쟁을 목격합니다. 청불전쟁은 바로 베트남의 종주권에 관한 전쟁이었으니, 10년 후 조선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같은 맥락의 것이었습니다. 무기력한 청나라는 청불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베트남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쑨원은 정부의 요청에 따라 파업에 동참한 민중들을 보면서 무능한 정부에 대조적인 민중들의 애국심과 헌신성에 감동받습니다. 쑨원은 이 때 '혁명', 즉 군주제에서 공화국으로의 혁명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생각하였다고 회고합니다. 


쑨원은 1887년 막 설립된 중국인 의학교(현재 홍콩 대학의 전신)로 옮겨 본격적인 의학 수업을 받습니다. 학교장 캔틀리의 총애를 받았고 1892년 최우등으로 졸업합니다. 이후 동서 의학을 합친 약방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술과 약방이 쑨원의 전부가 될 수 없었습니다. 쑨원은 명나라 멸만복명을 추구하는 '삼합회'의 동지들과 교류하였고, 폭발물 실험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쑨원은 체제 참여와 개혁의 가능성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894년 초 당시 청의 최고 대신 '리훙장(이홍장)'(당시 만약에 열강이 청을 대신하는 새로운 왕조를 내세우게 된다면, 그 군주자리는 당연히 리훙장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습니다)에게 장문의 국정 건의서를 올립니다. 


이 국정 건의서는 쑨원의 저술 가운데 최초의 것이며 또 국사를 포괄하는 것이니만큼 쑨원 전체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쑨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럽이 부강한 원인은 선박이 튼튼하고 무기의 날카로움과 방어진지가 굳고 병사가 강한 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각자 재능을 다하고, 지세(地勢)의 이(利)를 다하고, 만물이 쓸모를 다하고, 상품이 유통이 잘 되고 있음에 있습니다. ... 이 네 가지를 게을리하며 선박이 튼튼하고 무기의 날카로움만 힘쓰는 것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하면 곧 만사가 흥하고, 토지는 그 이용을 다하면 곧 백성이 먹기 살기에 족합니다. 자연은 그 용법을 다하면 곧 재료가 풍족해지고, 상품이 잘 유통하면 곧 재원이 많아집니다. 그런 고로 이 사(四)자는 부강의 대경(大經)이며, 활국의 대본(大本)입니다."


쑨원은 이와 같은 4가지 개혁을 법제화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한다면, 능히 20년 안에 서양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명치 유신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모두가 국계민생(國計民生)에 커다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른바 실천궁행을 바란다고 하면 반드시 못 속의 수초와 같이 백성은 이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상, 손문, 이홍장에의 상서, 손문 전집(하), 홍태식 역, 삼성출판사, 1974, 179-196쪽)


글의 형식이나 내용에서 이는 완전히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유학 사대부의 상소문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국계민생'에서와 같이 건의문 곳곳에서 '생민(生民)', '양민(養民)'의 단어가 나옵니다. 후에 쑨원의 삼민주의의 '민생주의'는 사실 이때 원형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쑨원은 이러한 장문의 건의문을 가지고 텐진으로 리훙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이 성실하고 용기있는 건의서는 불행히도 리훙장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청일전쟁으로 노심초사하던 노 재상은 무명의 청년을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망이 컸던 쑨원은 하와이로 향합니다. 하와이에 가서 화교 청년들을 규합하고 형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반청 조직, 흥중회을 만들게 됩니다. 혁명을 위한 장구한 행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홍콩으로 와서 의기투합하는 집단을 찾아 합세합니다. 그리고 흥중회의 맹세문을 작성합니다.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국을 재건하고, 공화국을 건설한다(驅逐韃虜,恢復中華創立合衆政府)". 그리고 그들은 한 달 후 광저우 점령의 놀라운 계획을 실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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