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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여담(餘談) 1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고대 아테네 헌정사

작성자정태욱|작성시간22.03.13|조회수154 목록 댓글 0

소크라테스 재판 :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재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희랍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재판은 아테네 민주헌정사의 성장 및 몰락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재판은 주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세노폰의 <메모라빌리아(소크라테스 회상)>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소위 불경죄, 즉 종교적인 죄목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와 분리되어 순전히 종교적인 문제로 처벌받고 죽임을 당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재판의 정치성은 그가 기소된 죄목 그리고 그 기소자의 면면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먼저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신을 섬겼다’는 죄명, 그리고 청소년들을 타락시키고 선동하였다는 죄명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일종의 정치재판, 이데올로기 재판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기소자들(고대 아테네는 지금처럼 검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민사소송하듯이 형사고소를 하고 원고로서 법정에 서게 됩니다)은 멜레토스, 아뉘토스, 뤼콘 등 3인으로 나오는데, 그 가운데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상재판의 단골 소송꾼으로 알려져 있고(Richard Bauman, Political Trials in Ancient Greece, London/New York; Routledge, 1990, 109-111쪽 참조), 아뉘토스는 당시 지배적인 정치세력인 민주파의 주요 인사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아테네의 주요 정치 세력에 의하여 추진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소크라테스가 정치재판의 피해자, 아니 정치적 책임추궁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하여 기소자들의 증언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당시 아테네의 정치상황을 통하여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재판은 기원전 399년에 있었습니다. 이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게 최후로 패배한 기원전 404년에서 오래지 않은 때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아테네는 그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정에 반대하는 스파르타와 연결된 과두주의자들의 쿠데타도 발생하게 됩니다. 과두파들은 기원전 411년 및 404년 두 차례에 걸쳐 민주 정부의 전복을 시도합니다. 특히 두 번 째 쿠데타는 잔혹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하고, 또 대다수 가난한 시민들의 시민권이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과두파는 아테네 시민들 다수의 민주정체에 대한 애착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스파르타 주둔군이 물러나면서 곧 과두파 세력은 청산되고 맙니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패배, 민주정치의 실패 그리고 잔인한 쿠데타 등을 겪으며 아테네 민중들의 감정은 격앙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이전부터 비판적 사고와 발언으로 명망이 높았던 철학자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참된 앎’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성 사회의 인식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방종과 경박함을 계속 지적하였으며, 그 한계를 인식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 대한 ‘등에(말이나 소를 쏘아서 움찔하게 만드는 벌과 같은 곤충)’의 역할을 자임하였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변론>에서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얘기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가서 신탁을 해 보니,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처럼 우둔한 사람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신탁의 결과이므로 확인해 보자는 취지에서 아테네에서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정치가 시인들 등을 찾아다니며 말을 걸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가장 현명하다는 신탁이 정말 맞는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능청스럽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최소한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앎의 기본은 인식의 한계를 인지하는 데에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기소하기에 이른 아테네 사람들의 오만함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참고로 또한 기억해야 할 것으로 그 델피의 신전에 새겨진 경구가 있습니다. 신전에는 두 개의 경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와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너 자신을 알라’를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원래 아테네인들의 민족적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인간의 무지함에 대한 각성, 그리고 그러한 각성에 기초한 참된 앎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열정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테네인들의 지성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렇게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에서 그렇게 높은 정신적 작품들이 그렇게 많이 산출된 예는 달리 볼 수 없습니다. 아테네인들보다 더 위대한 조각가, 더 위대한 역사가, 더 위대한 비극작가들은 이후에 나오지 않았다는 칭송, 아테네인들은 인류 지성사의 정점이며, 인류 최초의 지식인들이었다는 상찬은 과장만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이디스 해밀턴(이지은 역), 고대 그리스인의 생각과 힘, 까치, 2009, 15쪽]

 

그와 같은 아테네의 계몽, 인식론적 각성, 참된 지식을 향한 끝없는 도전은 아테네의 민주정을 가능케 하였고, 고대의 가장 위대한 문명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아테네는 페르시아를 제압하고 에게해 및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때가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최절정기였습니다. 아테네의 모든 시민(성인 남성)은 거의 완전한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향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정상에서 아테네 사람들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교훈을 망각합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주도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맺어 희랍의 200여개의 도시국가들의 맹주가 됩니다.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은 희랍 세계는 물론 에게해 전역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였습니다. 아테네의 무역과 식민 사업은 더욱 발전하고, 노예의 조달은 더욱 원활해집니다. 아테네는 상거래 원칙, 재판권, 도량형, 화폐 등을 아테네 중심으로 설정하였습니다. 다른 작은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에 정기적으로 공납을 바쳐야 했으며, 해상교역에 있어 아테네에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아테네의 재판권에 복종해야 했습니다. 아테네는 이를 페르시아에 맞서 희랍세계를 보호하는 희랍 민족의 영도자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얘기하였습니다.

 

아테네의 제국주의와 함께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변질됩니다. 제국주의 혜택 속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모두 노동에서 해방된 특권계급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승리와 패권 그리고 넘쳐나는 부와 영광에 도취되었습니다. 한계를 잊어버리고, 절제를 잊어버리고, 방자하고 오만해졌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의 자유는 방종으로 변질되었고,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개인적 야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정치는 이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대중적 인기를 다투는 ‘전리품’처럼 되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중우정치, 플라톤에 따르면 ‘관람객들의 비위를 맞추는 공연’과 같은 것으로 변질됩니다.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정책은 가속화되었습니다. 원래 희랍 민족의 최대, 최강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의 권역까지 침식해 들어갑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테네 델로스 동맹체제에 벗어나려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패권국가의 꿈을 꾸고 있던 아테네는 그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미틸레네와 멜로스 섬에 가하려고 했거나 가해졌던 아테네의 잔혹한 집단 학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이와 같은 강자의 논리에 젖게 되면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내부적으로 허물어지게 됩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과두파들에 항쟁하면서 민주주의를 이룩하였지만, 제국주의로 나아가면서 과두정의 ‘수탈의 정치’, ‘힘의 정치’를 닮아갔던 것입니다. 강자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황폐화시켰습니다. 결국 아테네는 희랍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자중지란을 드러내며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그리고 과두파들의 쿠데타를 불러왔습니다.

 

그 전쟁 중 아테네 민주정의 문제점은 알키비아데스라는 인물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체 과정에서 아테네의 실질적 군사령관이었지만, 동시에 아테네를 배반하고 적국에 투항․협력한 배신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서 대중의 사랑을 가장 뜨겁게 받은 인기 정치인이자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질시와 미움을 산 방탕한 정치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최고의 미남, 최고의 연설가이면서도 동시에 충동적이며 야심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장년 소크라테스는 청년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군대에 복무하였고, 한 막사에서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그 둘은 절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당시 아테네에서 일상화되어 있어 동성연애의 관계까지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천품과 능력을 평가하고 훌륭한 인재로 키우려는 멘토의 역할을 하였을 뿐입니다. 도리어 성적 탐닉과 방종에 젖은 알키비아데스를 깨우쳐 진정한 ‘앎’의 세계로 이끌려고 무던 애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알키비아데스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어떤 인물들에 대하여도 방약무인하게 행동하였는데, 오직 소크라테스에 대하여만은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으로 소크라테스를 꼽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테네는 결국 그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몰락해 갑니다.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명성과 치부의 호기로 삼았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휴전기였던 소위 ‘니키아스의 평화’ 기간 중에 알키비아데스는 대중들의 대중심리를 파악하고는 ‘주전파’의 지도자로 단숨에 부상합니다. 거기에는 그의 매혹적 외모, 달변, 올림픽 경기에서 전차 경주를 휩쓴 시대의 우상이라는 배경이 작용하였던 것입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시민들의 호전성을 부추겼습니다. 마침내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선을 확대하여 이탈리아의 식민지 그리고 페니키아, 카르타고까지 모두 정복할 꿈을 꿉니다. 아테네 대중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테네는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이탈리아 반도 아래에 있는 시칠리아 섬의 원정에 나섭니다. 시칠리아는 스파르타를 고립시키고, 아테네의 지중해 패권을 공고히 하는 데에 요충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리한 원정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알키비아데스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알키비아데스는 출정하기도 전에 탄핵 송사에 휘말립니다. 시칠리아 원정 전날 일단의 무리들이 술에 취하여 아테네의 신성한 신상을 모독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알키비아데스의 행위라는 설도 있고, 알키비아데스 반대파의 모략극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아테네 민주정은 한편으로는 거국적인 전투를 위해 출정하는 최고의 사령관으로 알키비아데스를 선출해 놓고는 다른 한편으로는 불경한 신성모독의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여 그를 소환하여 법정에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이미 이렇게 자중지란과 방향상실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알키비아데스는 그 소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전쟁 상대국인 스파르타에 투항해 버렸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은 대참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아테네는 이후 국력을 다시 온전히 회복하지 못합니다. 한편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서 ‘적응’하여(화려하고 방탕한 삶 대신, 스파르타 식의 투박하고 절제된 삶) 잘 살아가는 듯하였는데, 결국 일을 벌입니다. 즉 스파르타 왕비와 간통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비는 왕이 반 년 간 전장에 나간 사이 임신을 하여 아들을 출산하였던 것입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서도 머물 수 없었고, 페르시아로 넘어갑니다. 이번에는 전 희랍 민족의 적국에 투항한 것입니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기회를 엿보다 아테네에서 스파르타와 공모한 제1차 쿠데타가 발생하자, 다시 아테네의 수호신으로 등장합니다. 스파르타의 해군을 완파하고, 아테네로 귀환하였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전에 선고받았던 사형과 재산몰수의 판결을 무효로 하고, 다시 아테네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합니다. 그러나 이미 크게 위축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는 스파르타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도 더 이상 승리를 지속하지 못합니다. 이에 다시 환멸을 느낀 아테네 대중들은 알키비아데스를 다시 형사소추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는 또다시 도주하여, 북쪽 흑해 주변의 트라키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재기를 노렸으나, 아테네는 최종 패배를 당하고, 알키비아데스는 이제 모두에게 버림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최후를 맞게 됩니다. 플루타르크는 그의 죽음에 대하여 페르시아의 수색대에 쫓겨 사망하였다는 설과 함께, 유부녀를 유혹하여 바람을 피우다 그 남편과 가족들에 의하여 맞아 죽었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테네와 알키비아데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떻게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이렇게 지리멸렬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이런 ‘막무가내’의 인물이 그렇게 여러 번 최고 사령관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퇴행적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테네의 제국주의는 종말을 고합니다. 델로스 동맹도 해체됩니다. 아테네는 더이상 부와 영광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외부에서 충원되던 노예의 수도 급감하고, 외부로부터 수탈하거나 징수하여 왔던 경제적 이득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아테네는 여전히 공연과 행사의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대규모 시설들을 유지하여야 하였고, 공공행사도 줄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부유층들이 기꺼이 재정부담에 나섰습니다. 그것을 명예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국주의적 수혜가 없어지면서, 부유층들의 재정압박도 가중되었습니다. 아테네의 보통 시민들은 민회와 시민재판에서 부유층들에게 계속 국가의 비용부담을 강제하였습니다. 부자들은 더 희생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스파르타의 후원을 받으며, 두 차례의 내란을 감행합니다.

 

기원전 411년 첫 번 째 쿠데타가 발생합니다. 이때의 주요 지도자가 테라메네스입니다. 그는 비록 과두주의자이긴 하였지만, 온건파에 속하였고, 민주정과도 관계가 나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아테네 민주 정체를 변경하고자 하였습니다. 400인 비상위원회를 조직하고, 이후 5000명의 시민단을 중심으로 하는 회의체를 구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온건파였던 테라메네스는 과격파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일차 쿠데타는 곧 와해됩니다.

 

기원전 404년 제2차 쿠테타는 잔혹하였습니다. 과격한 과두파들은 가난한 시민들의 정치적, 법적 지위를 박탈하고자 하였습니다. 민주정의 핵심이었던 민회, 시민재판 참여의 자격을 제한하고자 하였습니다. 3000명의 시민들, 즉 부유층에게만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였습니다. 재판권은 500명 위원회에 전속시켰습니다. 시민들의 정치참여에 제공되었던 수당도 박탈하였습니다. 저항하는 시민들 1500여명이 학살되었습니다. 민주파 가운데 부유한 시민들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많은 민주파 인사들이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 쿠데타의 주역은 카르메니데스와 크리티아스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소크라테스에게 배운 바가 있었고, 또 플라톤의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혹자는 그러한 관계에 주목하여 소크라테스를 과두파 사상가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자신의 제자로 생각하였는지는 의문입니다. 쿠데타가 잠시 성공하였던 기간 동안 소크라테스는 크리티아스 과두파 치하에서 오히려 핍박을 받았습니다.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 즉 그의 비판적 사고가 과두 체제에도 위험하다고 판단하였고, 소크라테스에게 청년들과 대화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과두파 정권에 불복종을 감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과두파 정부는 부유한 외국인들을 구속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일을 소크라테스에게 맡겼습니다. 과두파의 폭력적 조치들에 소크라테스를 동참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명령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과두 정부가 더 지속되었다면, 아마 자기는 이미 처형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어떤 정부 하에서든,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소임, 즉 ‘등에’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제이든 과두제이든 그것의 한계를 말하고 항상 최선의 정치, 절대적 선에 대하여 말하였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를 귀족제 혹은 군주제 지지론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저술은 남아 있지 않지만, 플라톤의 기록으로 그렇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주지하듯이 플라톤은 철인(哲人) 통치를 희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적 통치자에 대한 열망, 모든 통치자들의 이념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현실 정치 체제에 대하여 플라톤은 참주제(타락한 군주제), 과두제(타락한 귀족제), 중우정(타락한 민주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타락한 체제들 가운데에서 중우정이 그래도 제일 덜 위험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주로 살았던 시대는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민주주의가 최절정을 지나 타락해 가던 때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당면 과제는 바로 아테네 민주정체의 문제점이었을 것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통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진리와 정의가 국가의 사명이라고 보았습니다. 통치는 고도의 지성과 덕성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주의는 대중적 인기의 늪에 빠졌습니다. 중우정치가 되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그 전쟁 기간 중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내내 비판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영원한 진리 인식은 프로타고라스의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비교됩니다. 프로타고라스는 당시 민주주의의 대표 철학자로 평가되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의 신화를 통해 민주주의가 어떻게 ‘선사’되었는지 말합니다. 즉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명을 받아 인간 세계에 정치의 능력을 모든 인간들에게 차등 없이 골고루 전달하였다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현실의 인간들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선과 정의를 지향하였다면,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면서, 인간사회에서의 상대적 실용주의를 강조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테네 사람들은 그 민주주의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까지 핍박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프로타고라스가 태양을 금속 원소들의 융합체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신성모독 죄를 씌웠습니다. 심지어 그의 책을 불태웠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대표 지성 프로타고라스도 아테네 민주주의 대중들의 변덕에 희생된 것입니다. 전쟁 시기 아테네 민주주의와 학문의 자유는 정치적 목적과 대중적 감정에 굴복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자면, 그 다음 차례였다고 판단됩니다. 전쟁과 쿠데타의 잔혹한 혼란기에 정치는 철학과 사상을 통제해야 했고 여기에 과두파이든 민주파이든 차이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스파르타와의 내전에서 패배하고, 과두파의 잔인한 쿠데타를 겪은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과두파 주동자들에 대한 처단은 불가능했습니다. 과두파를 후원하는 스파르타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민주정, 그 배후의 실력자 아뉘토스는 다른 대상을 찾았고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 표적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의 한계에 대하여 계속하여 비판을 제기해 온 대표적 ‘반 정부 사상가’였으며, 한편으로는 아테네 민주정을 파탄으로 이끈 알키비아데스의 스승이었고, 과두파 쿠데타 주역들도 한 때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과두파 쿠데타에 대한 공분을 달래고, 민주파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단속하는 데에 그만큼 효과적인 대상이 달리 없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결국 ‘국가의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타락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소크라테스 재판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플라톤이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된 결정적 계기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원래 아테네 시민들의 자랑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지적 스승으로 존중받고, 또 그의 철학 행위는 최고 수준의 지적 대화로 사랑받았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희곡에서 소크라테스를 희화화한 것은 오히려 아테네에서의 그의 인기를 방증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패배와 굴욕에 떨어지고, 흉포함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어서 아테네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아테네는 과두파의 두 차례의 쿠데타를 이겨내고 민주정을 지켰지만, 그 민주정은 더 이상 예전의 시민정신에 충만하였던 그런 민주정은 아니었습니다. 페리클레스 웅변이 상징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위대한 성취였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헌정사는 아테네의 계급차별을 넘어서, 인간적 보편성을 확대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정점에서 아테네인들은 여전히 또 다른 특권의식과 패권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노예제, 제국주의, 수탈의 경제학이었습니다. 사실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토대는 그렇게 건강치 않았습니다. 물론 아테네 민주주의가 초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아테네는 일찍이 노예들이 있었지만, 초기 아테네 경제는 노예노동보다 시민의 노동에 기초하였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전쟁 승리 이후 아테네의 패권이 확대되고 노예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노동은 전적으로 노예의 일로 치부되고, 시민들의 특징은 오히려 노동에서 해방된 상태, 즉 ‘여유(schole)'에서 찾게 됩니다. 노동천시의 사상이 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동에서 해방된, 즉 타인의 노동 위에서 인생을 누리는, 노동을 천시하는 삶은 문화라기보다 문화의 타락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불로소득의 기생적 삶이며, 탐욕과 차별의 삶일 뿐입니다. 그러한 퇴행적 문화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옳게 작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 아테네 민주주의 전성기에는 이른바 ‘노예천성론(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즉 본래적으로 노예에 맞게 태어나는 인종이 있고, 본래적으로 자유인에 맞게 태어나는 인종이 있다는 인종주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팽배하게 됩니다. 덧붙여 이미 멜로스 사태에서 언급한 대로 아테네인들은 실력설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즉 강한 아테네가 약한 다른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식입니다. 지배의 권리는 강한 자의 것이고, 복종의 의무는 약한 자의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이 역시 강자의 자기중심적 편의주의와 탐욕의 반영인 것입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지만, 어떠한 헌정질서도 불로소득과 차별 및 배타의 원리에 기초한 것인 이상 그것은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현대 민주주의는 과연 그런 위험 혹은 그런 혐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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