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유일당 운동의 배경>
‘민족 유일당’ 운동은 바로 ‘민족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임시정부에서 초기부터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대동단결을 이제, 정부가 아니라 정당의 차원에서 수행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전의 임시정부에서는 사실 정당에 대한 특별한 인식이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원래 전통적으로 ‘정당’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붕당(朋黨)도 ‘사조직’으로 인식되어 공식적으로는 불허되는 것이었고, 서구에서 루소도 일찍이 파당을 일반의지 형성에 저해요소로 보았고, 미국 건국 초기의 정치인들도 정당 대결을 매우 우려하였습니다.
임시정부 헌법에도 정당 관련 규정이 없었음은 물론 의정원도 정당제를 기초로 운영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러 정파, 예컨대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의 3개의 정파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정당 정치’는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이동휘만이 ‘한인 사회당’ ‘고려 공산당(상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비밀조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임시정부의 중심이 ‘유일당 결성’ 운동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민족 유일당’ 운동이 바로 민주주의적 정당정치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명칭 그대로 ‘유일당’ 운동이었습니다. 복수 정당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즉 헌정 체제상으로는 ‘당-국(Party-State)’ 체제를 지향한 것입니다. 권력의 통일적 핵심으로서의 정당을 말하는 것이지, 정부를 향한 다양한 정당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구의 정당 민주주의가 아니라 소비에트 레닌의 혁명당 이론 그리고 중국 국민당의 이당치국(以黨治國)론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독립운동 진영 ‘유일당’ 운동은 코민테른의 민족정당 결성 노선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상황, 특히 ‘국공합작’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 독립운동과 관련된 세계적 상황을 떠올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당시 일본과 대결의 가능성이 있으면서 한 민족이 의지해 볼 수 있는 열강은 미국, 소련, 중국이라고 할 것입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나라였으며, 제1차대전 후 세계질서를 좌우할 수 있는 패권국가가 되었습니다. 마침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고, 자유와 평화의 국제질서를 선도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벅찬 희망으로 파리 강화회담에 참여하고자 하였고, 거족적인 3.1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립된 임시정부도 친미적인 이승만 대통령 체제로 출범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리 회담에서 우리 민족은 입장이 거부되었습니다. 파리 강화회담 이후 아시아 태평양 문제를 다루는 워싱턴 회담도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정부는 그 회담에 다시 한 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미일 대립의 가능성을 엿보면서, 한민족의 문제가 거론될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워싱턴 회담에서도 우리는 철저히 외면되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오히려 더 가까워졌습니다. 일본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대 해군력을 보장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좌절하였고, 미국에 대한 환멸은 결국 이승만 임시정부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고 할 것입니다.
소련은 20세기 세계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국가였습니다. 서구에서 가장 전제적이었던 로마노프 왕가, 가장 비참했던 봉건 체제를 전복하고, 노동자 농민의 평등 세계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로 규정하고 제국주의 타도를 공언하였습니다. 실제로 레닌의 소비에트 정권은 그들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포기하고자 하였고, 중국에 대한 불평등 조약도 해소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의 식민지 해방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일본은 러시아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시베리아 지역에 6만이라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한 번의 러일 전쟁이 임박한 듯 보였습니다. 한국의 독립 투사들은 소련과 동맹을 맺고 일제와 일전을 벌이는 것이 독립의 첩경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라 민족의 적폐였던 차별과 수탈의 체제도 일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파리 강화회담과 워싱턴 회담에서 서구 열강들은 우리 독립운동진영에 너무 큰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임시정부의 한 축이었던 이동휘의 한인 사회당 세력은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의 교섭에 앞장섰으며,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정권으로 바꾸어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이동휘는 한형권을 특사로 파견하여 레닌을 만났고, 레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혹은 한인 사회당)에 200만 루블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이후 이동휘가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 인사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소련 영역에 별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소련은 세계 공산주의를 지도하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즉 세계적 차원의 공산주의 유일 국제당을 조직하였습니다. 1921년 극동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식민지 해방의 당위와 소련의 지원을 천명하였습니다. 이동휘, 박헌영 등 공산계열 인사들은 물론 김규식, 여운형 등 미국에 실망한 민족주의 인사들도 참석하였습니다. 이어서 1922년 코민테른 제4차 회의 동양문제에 관한 일반 테제에서 ‘반제국주의통일전선’을 결정하였습니다.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코민테른의 위력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이념적으로 각국의 공산조직들은 코민테른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코민테른 제4차의 민족정당 결성 노선에 따라 중국 공산당은 국공 합작에 참여하였고, 우리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협동노선을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무엇보다 크게 참고한 것은 중국의 사례일 것입니다. 원래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은 망국의 설움에 사무친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구원의 복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만주족으로부터 해방 그리고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또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혁명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전도에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혁명 당시 손문의 세력은 독자적인 무력이 미미하였고, 사상과 규율에서 투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의 공화혁명은 최대 군사력의 보유자 위안 스카이(원세개)에 의하여 찬탈당하였고, 위안 스카이 사망 후에는 군벌들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손문은 중국 남부에서 광동 정부를 수립하여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세계 열강들과 결탁한 북경의 군벌들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손문은 자신의 국민당을 혁명정당으로 변모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였지만, 아직 민주주의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투철한 선각자들에 의한 ‘훈정(訓政)’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1919년 일제의 야욕과 그것을 승인한 서구 열강에 항의하는 전 인민적 5.4운동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이 완전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손문은 그에 큰 시사를 받았습니다. 혁명정당은 단지 소수 엘리트의 정당이 아니라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력을 갖추어 함을 절감하였습니다. 또 레닌의 반제국주의 식민지해방의 공언은 무척 고무적인 것이었습니다. 손문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군대를 육성코자 하였습니다. 레닌도 손문의 공화혁명에 대한 지원으로 제국주의를 타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1924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공식 결합합니다. 소위 ‘연아용공(聯俄容共)’ 혹은 ‘국공합작(國共合作)’입니다.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원들을 개인 자격으로 입당시키고,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으며 당을 개조해 나갔습니다. 국민당은 당의 체질을 강화할 수 있었고, 신생 공산당은 국민당이라는 터전을 확보한 것입니다. 손문은 소련의 도움으로 황포(黃埔) 군관학교를 설립하였고, 손문은 장개석을 러시아로 파견하여 연수를 받게 한 후 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황포 군관학교는 이후 국민당 군대의 주축이 되었고, 국민당 북벌의 원동력이 됩니다. 참고로 이 황포 군관학교는 한인 식민지 청년들에게도 독립의 희망이었습니다. 수백명의 청년 용사들이 그곳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본명 장지락)도 이 학교를 나왔습니다. 해방 후 북한의 2인자가 되는 최용건은 학교의 교관이었습니다. 이러한 중국 국공합작의 선례와 국민당의 약진은 우리 독립운동을 위한 새로운 방략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인사들도 민족운동 역량의 통합이 정부 차원에서는 실패하였지만, 정당 차원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렇게 ‘민족대당’을 통한 ‘이당치국(以黨治國)’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임시정부의 실질적 산파가 안창호였듯이, 민족유일당 운동의 지도자도 안창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창호의 노력으로 북경에서부터 ‘민족 유일당’에 대한 합의가 성사되기 시작합니다. 이전 국민대표회에서의 개조파와 창조파가 이제 임시 정부 차원이 아니라 정당 차원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독립당 조직 북경 촉성회’가 결성됩니다. 임시정부의 국무령 홍진도 민족 유일당 결성에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에 전력을 투구하기로 하였습니다. 국무령을 사임한 것입니다. 아마도 임시정부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민족 유일당의 권위를 존중하겠다는 의사표시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 상해에서부터 유일당 운동을 직접 주도합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계열에서 임정 옹호파, 개조파, 창조파, 공산 계열에서 화요파, 상해파(ML파)를 망라하는 상해 촉성회를 성사시켰습니다. (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292쪽)
민족 유일당 운동은 사실상 좌우 합작 운동이었습니다. 통합 임시정부가 노령의 좌파 정부와 상해의 우파 정부의 통합이었고, 국민대표회도 독립운동 세력의 좌우 진영이 임시정부의 개조 혹은 창조를 위한 다툼이었듯이, 민족 유일당 운동도 혁명계열과 민족계열의 대동단결을 위한 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대독립당 북경촉성회, 유일 독립당 상해 촉성회에 뒤이어 1927년 대한독립당 광동촉성회, 한국유일당 무한촉성회, 한국유일당 남경촉성회가 차례로 발족합니다. 이들 광동, 무한, 남경 촉성회는 의열단의 주도로 결성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연구, 291쪽).
의열단은 김원봉이 약관 21세인 1919년부터 조직한 열혈 행동주의 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 김원봉은 3.1운동의 비폭력주의의 무력함에 실망하고 신흥무관학교 재학 시절 동지들과 ‘폭력투쟁’을 위한 의열단을 창단합니다. 이후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듯이,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등 수 많은 일제 타격 작전을 수행합니다. 또한 1922년에는 무장투쟁 원로 민족주의자이자 당대의 문호라고 할 수 있는 신채호를 방문하여 의열단의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혁명선언> 작성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공합작 이후 보다 체계화된 독립운동을 위하여 장개석을 찾아가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허락받습니다. 여기서 김원봉은 김산(장지락), 오성륜(전광) 등 쟁쟁한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만나 감화를 받습니다(한상도, 김원봉, 역사공간, 55쪽). 그리고 중국인 장교들과도 교분을 맺습니다. 황포 군관학교가 국공합작의 산물이었듯이, 김원봉의 의열단은 좌우 합작의 민족 유일당 운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외에서 유일당 운동이 전개될 때, 국내에서도 좌우합작의 통일 독립운동 조직이 구성됩니다. 바로 ‘신간회’입니다. 1926년 순종의 인산(因山)일을 계기로 6.10 만세 운동이 벌어지면서 국내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도 ‘민족 유일당’ 운동을 진행시킵니다. 당시 일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였고, 한반도에 대하여도 문화정치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조응하여 민족운동 일부 세력은 민족 해방이 아니라 민족 개량 그리고 ‘완전 독립’ 대신 ‘자치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탈퇴하고 귀국한 이광수의 1925년 ‘민족개조론’이 그 대표적인 주장이었습니다.
그에 맞서 민족주의, 천도교, 기독교 단체들이 연합하여 ‘민족 단일당 협동전선’을 호소하면서 비타협적인 독립운동을 천명하였습니다. 아울러 당시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던 공산계열 진영도 그에 호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7년 좌우 합작의 민족 독립운동 조직인 ‘신간회’가 출범하게 됩니다. 초대 집행부는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이었고, 간사에 안재홍, 문일평 등 민족주의, 종교계 인사들이 구성하였습니다. 제2대 지도부는 좌익 민족주의 변호사 허헌이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광주 학생 운동으로 허헌이 구속된 후 제3대 지도부는 우익 민족주의 변호사 김병로가 집행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 국내 최대의 독립운동 조직으로 발전하였으며, 회원수가 수만명에 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