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게시판

나는 지방대학교 시간강사다

작성자오영진|작성시간14.10.02|조회수448 목록 댓글 4

오늘의 유머(사이트)에서  309동1201호 라는 아이디를 가진 분께서 

9월 16일 쓰기 시작하여 30일 종료한 글입니다. 

어떤 자료보다도 시간강사라는 직업의 실체를(특히 인문학) 잘 드러낸 글이라 판단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본 글 뿐 아니라 실제 이 사이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의견교환 댓글들의 양상입니다.

그 댓글의 반응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여러 의견이 조율되고, 부딪히는 모습입니다.

시간강사의 문제를 다룰 때 결국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그 처지를 알리는 일도 중요해지는데, 무엇이 설득되고, 설득되지 않는지 미리 가늠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대학은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동시에 대학원생, 강사들의 저임금 고노동으로도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게 개인적 생각입니다. 대학담론 안에서 가장 중요한 축으로서 구성해야 합니다. 

국지적인 시간강사 처우개선 따위가 아니라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를 

사회구성원들이 바로 보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아래 글과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요.

석사과정 때 한 교수가 제가 말하더군요.

"조교들은 월급 받잖아"

"월급이 아니라 등록금에서 감액해서 나오는데, 그나마 전액이 아닙니다. 월급으로 치면 50이 안되는데" ( "감액" 부분에서 교수가 바빠 자리를 떠났음)


BK도 뭣도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던 저로서는 약 5년간의 석박사과정동안 오로지 조교근무만이 학교로부터 그나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고, 공부는 못하고 매일같이 아르바이트만 했던 기억이 있네요. 공식적으론 주 이틀 반이지만 실제로는 4일에서 5일을 출근했죠. 월급은 50만원 꼴.  주 최소 35시간 이상의 근무를 했으니 시급은 3571원이네요. 사무실에 앉아있던 시간만.

이는 조교뿐 아니라 학회 등의 간사일로 연장됩니다. 어떤 학회는 아예 보수없이 간사일을 시키는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4개월마다 돌아오는 주기로 매회 거의 2개월동안 학회지를 완성하는 일에는 수백통의 전화를 하고, 몇 날 몇 일 교정 교열 보는 일이 요구되죠. 또 학회를 열 때마다 수 주전부터 홍보, 당일 행사 진행 등의 잡다구레한 일들이 요구되죠. 이 경우 심한 경우엔, 답례는 오로지 뒷풀이 하나입니다. 같이 하시는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과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대문학전공자들의 경우, 문단에 진출하는 경우, 이는 문학잡지의 생산과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조금 격이 떨어지는 잡지의 이야기겠지만 월급 20만원 받는 바지 편집장은 학회의 간사가 하는 일을 동일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과 연장선에서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현재 우리 조합에서 이사, 위원장이라고 직함 붙인 사람들에게 주는 돈은 한달 10만원이라는 것.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모르더라구요. 겨우 10만원 받고 일한다는 걸 어필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물적 조건 하에서 지금 조합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응당 공유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저임금 고노동 하는 일과 조합에서 저임금 고노동 하는 일은 다릅니다. 

전자는 이미 정해진 규칙 안으로 내가 들어간 것이지만 후자는 내가 규칙을 만들고 들어간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다르지만 언제든지 비슷한 방식으로 변질될 수도 있는 겁니다. 정말 이거 조심해야 해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무국 일 하는 사람들이 강의하는 일에 다른 조합원에 비해 더 열의를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본인 전공에서 조금 무리라도 강사지원을 우선 해보거나, 강사모집에 난항을 겪는 강의를 곧잘 수락한다던가 하는 식)

치졸하게 말하면 본전생각, 너그럽게 생각하면 노동의 댓가를 우회적으로 그러나 합법적으로 얻는 방식입니다.

제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물적조건) 하면 
조합 일같은 사회운동을 하면서 그런 걸 따지면 큰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충고하시는 분도 있는데, 
제 생각에 그것은 대학-학문의 숭고함을 강요하는 윤리와 다를 것없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우리가 조합에서 할 일은 사상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디자인입니다.
쌀로 교환 불가능한 명예는 허망한 것입니다. 그것에 자산가치를 붙인다면 바봅니다.

다시 대학이야기로 돌아와

그러니까 대학은 일종의 편의점 수준보다 못한 처우로 일을 시키고 있는거예요. 학문의 신성함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그래서 "한눈 팔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는 아주 잔인한 말입니다. 

오히려 자료조사를 하면서, 필드워크를 하면서 글을 쓰고 싶은데, 대학원이라는 괴물이 내 시간을 잡아먹습니다. 대학이야말로 학문을 잡아먹는 괴물입니다. 

대학원생->학회지 간사->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에 대해 조합차원의 제대로 된 토론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부터 제대로, 아주 세밀하고 강도높게 짚어보고 갔어야 했어요. (몇 번 시도가 있었지만 리얼하지 못했습니다. 푸념수준에서 끝난 것이지 어떤 담론으로까지 발전시키질 못했어요.)

이러한 착취의 구조 속에서도 그나마도 "한눈 팔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가 통용되던 시대와 그렇지 않은 시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현재 제 바로 밑 후배들은 강의자리를 아예 받을 수가 없어요. 받을 가능성이 10퍼센트도 안되요.

이 글 쓴 이보다 더 비참하게 변할 겁니다. 


저는 요 2-3년에 박사과정보다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특히 수료 후 첫 해에는 학교 일도, 강의 일도 전혀 없어서 완전히 백수로 지내며 철학, 문화 공부를 했어요. 그 때 느낀 게 공부하는 재민데, 정작 공부하러 들어간 곳에서 이 재미를 하나도 내게 주지 않았구나 하는 배신감입니다. 일만 시켰습니다. 일에 대한 정당한 리워드도 없이.


김수영의 시 "Vogue야"는 식민지의 지식인이 서구의 최신식 잡지를 향해 과감히 결별을 통보하는 통괘함이 있는 시입니다.  따라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환상을 깨닫고 이제는 직시하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우스개 소리지만 저는 시간강사입장에서 이 시를 패러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VOGUE야 넌 잡지가 아냐 
섹스도 아냐 唯物論도 아냐 羨望조차도 
아냐---羨望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는 

羨望도 아냐  


교수야 넌 직업이 아냐 
섹스도 아냐 唯物論도 아냐 羨望조차도 
아냐---羨望이란 어지간히 따라갈 가망성이 있는 
상대자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는 
羨望도 아냐 

 

여하튼 이 게시글은 원망(ressentiment))을 키우자고 쓴 글이 절대 아닙니다.  맥락을 오해 마셔요. 

309동1201호 분의 이야기는 우리 조합의 구성원과 상당히 일치하는 내용이 있다고 판단하는 바 필독을 권합니다.


*댓글 보니 공기업의 노조임원인 분이 이 강사를 인문학 강사로 채용해갔네요.


-------------------------------------------------------------------------------------

원글 주소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humorbest&no=953683


나는 서른둘, 지방대학교 시간강사다. 출신 대학교에서 일주일에 4학점의 인문학 강의를 한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의 강사료는 시간당 5만원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20만원, 한 달에 80만원을 번다. 세금을 떼면 한 달에 70만원 정도가 통장에 들어오는데, 그나마 방학엔 강의가 없다. 그러면 70만원 곱하기 8달, 560만원이 내 연봉이다. 박사수료때까지 꼬박 메꾼 학자금대출에서 한 달에 20만원 정도를 떼어 가고, 이런저런 대출과 공과금을 하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0만원이 고작이다. 이걸로 남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신용등급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고, 전화가 오면 앞자리가 02-1588로 시작하는지 확인 후 전화기를 돌려 놓는다. 이런 생활이, 몇 년째고,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허울 좋은 젊은 교수님이다. 그들은 내가 88만원 세대보다 더 힘들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까.

 


1. 이 삶의 시작

 

  서울에서 나고 자랐는데, 꽤 먼 지방 대학교의 인문학부로 진학하게 됐다. 서울 중하위권 대학과 입결은 비슷했으나, 이 대학을 택하게 된 나름의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대학의 정체성이나 이런저런 것과 관련되어 있어 그냥 A대학으로 하겠다. 출신대학이나 강의하고 있는 대학이 밝혀지면, 내가 계속 강의를 할 수 있을지 여부도 알 수가 없다.

  군대에 가기 전, 지금 내 지도교수가 된 분의 강의를 들었는데, 대단히 달콤했다. 자신이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고, 여러 대학에서 자신의 저서를 교재로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원생이 부족해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요약하자면 그랬다.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선생님을 찾아뵙고 대학원 진학에 뜻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대단히 반기며 선배를 한 분 추천해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재밌다. 교수가 전화기를 든 지 10분도 안 되어 대학원생 한 명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나는 저서 한 권을 선물로 받았고, 연구실을 나와 그 대학원생과 마주 앉았다. 그는 시내에서 밥을 먹다가 지도교수의 전화를 받고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밥을 시켜 놓고 한 숟갈 먹을까 하던 찰나에 지도교수의 전화가 온 것이고, 그는 수저를 내려 놓고 택시를 잡아 타고 연구동까지 온 것이었다. 그때는 그 급박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 네, 그러시군요, 하고 말았다. 그는 내게 와서 공부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고 몇 가지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 주고 다시 밥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나는 곧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다시 교수의 연구실에 찾아갔다. 교수는 내게 다시 저서 한 권을 새로 줬고, 내년부터 석사생으로 함께 공부하자고 했다. 나는 그후 대학원생들의 술자리에 한 번 간 일이 있다. 술자리는 시내 치킨집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는 정도였다.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학비가 얼마나 되는지, 생활은 되는지 물었다. 그중 한 대학원생이 조교활동을 하면 등록금이 해결되고 연구비를 받으며 한달에 40만원 정도의 용돈이 생길 거라고 했다. 어라... 그러니까 조교로 학교사무실에서 근무하면 등록금이 나오고 교수에게 연구비를 받으면 용돈까지 생긴다는 거였다. 나는 두 생각하지 않고 대학원 입학원서를 썼다.

  집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두분이 놀라시기 전에 대학원 등록금부터는 직접 해결하겠다고 장담을 했다. 학부 때의 등록금은 300만원 정도였는데 1/3 장학금은 빼먹지 않고 받았다. 그래도 나와 동생의 등록금은 아버지가 외벌이하시는 우리 가계에 큰 부담이었을 것이고, 나는 대학원부터 공부에 필요한 돈을 내가 마련하겠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독립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대신 대학원 선배 둘과 한 방을 쓰게 됐으니 1년치 집세 150만원만 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버지는 두말 않고 150만원을 통장으로 부쳐 주셨다. 이렇게 나의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8년 봄, 26살인 나는 그렇게 이 삶을 시작했다.

 

 

* 그냥 일기처럼 내 삶을 좀 정리하고 써보려고요... 오늘 수업을 들어갔는데 교탁 컴퓨터에 앞 시간 강사님께서 보내다 만 이메일이 있어서 화면 끄다가 잠깐 봤는데, 돈 빌려달라는 동료강사의 메일에 내가 줄 돈이 5만원밖에 없어 미안하다 이거라도 필요하면 연락해라, 하는 내용이었어요. 수업은 어떻게 했는데 참... 힘드네요. 그리고 다들 힘드네요. 3시부터 학교 행사에 자리 채우러 오라고 해서 갈 준비 합니다... 다들 힘내세요.



2. 대학원 입학과 조교생활

  2007년 12월, 대학원 입학이 예정되자 조교실장이 나를 포함한 그 해의 대학원 신입생 셋을 호출했다. 나는 학과사무실에서 함께 신입생이 된 K와 S를 처음 만났다. 둘은 나보다 한두살씩 어린 여학생들이었다. K는 키가 크고 활달했고, S는 통통하고 욕심이 많아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둘은 어느새 꽤나 친해져 있었다. 내가 인사하자 둘은 반갑게 맞아주기는 했으나, 뭔가 잘 어울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닌 것을 서로 알았다. K는 술자리를 주도하는 편이었는데, 어느날은 오빠 내가 오늘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조용히 밥만 먹을게, 이라고 하기에 나는 니가 조용하니까 참 좋다, 라고 말해 버렸다. 동기들과의 사이는 애초부터 별로 좋을 수가 없었다. 조교실장은 박사과정생으로 나보다 5살쯤 많았다. 박사과정생인 조교실장이 있고, 그 밑에 박사 석사 과정생들이 조교가 되어 학과 사무실의 행정을 보는 시스템이었다. (학과장이 행정을 주로 책임지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이 이러한 시스템이다.) 조교실장은 조교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우리에게 반드시 조교 활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미 조교 활동을 해야 등록금을 보전 받을 수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기에, 의례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 셋을 무척 당황케 했다. 요컨대 주5일 근무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급근무를 방학 내내, 2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과하지 않은가 싶어서 신입생이 셋이니 로테이션으로 근무를 하면 안될지 물었다. 그러자 사무실 쇼파에 앉아 이쪽을 귀담아 듣고 있었던지, 2학기쯤 위의 여선배 하나가 "쟤 지금 뭐라는 거야... 그럴거면 나가."라고 했다. 조교실장은 이것이 대학원의 전통이라며 대단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학원 측에서 신입생들에게 공부할 자리를 마련해줬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공부해라, 얼마나 좋으냐, 세상에 이렇게까지 해주는 대학원 선배들이 어디있냐, 이런 공간 내주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냐, 라고 꽤 긴 시간 동안 훈계했다. 동기인 K는 자신은 가족과 매번 3박4일의 휴가를 다녀오니 그때의 근무를 조정해달라고 했는데, 조교실장은 올해는 못가는 거지 뭐, 하고 무심히 답했다. 학과사무실에서 나온 우리 셋은 모두 짜증이 나 있었다. K와 S는 이게 말이 되냐고 입을 삐쭉 거리며 함께 어디론가 갔고, 나는 자취방으로 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렇게 대학원 조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도보로 약 30분 떨어진 곳에 살았다. 대학원 석사과정생 형님 둘, B(30)와 L(28)과 같이 자취했는데, 두 분은 모두 차가 있었고 나는 자전거 한 대뿐이었다. 사실 나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얻으려 했으나 그들의 제안으로 같이 살게된 것이었다. B와 L 모두 학부 때 적당히 안면이 있는 선배들이기도 했고 거절할 명분이 딱히 없었다. 그들은 학교가 다소 멀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매일 아침 7시면 일어나 8시 전까지 학교에 올라갈 것이니 아무 차나 골라타고 같이 가면 되지 않겠느냐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출근 첫날 둘은 8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성격이 조금 부드러운 B를 먼저 조심스레 깨웠는데, 그는 짜증을 내며 돌아 누웠다. 그래서 L을 깨우자 그는 어쨌든 나를 8시 5분까지 데려다 주었다. 8시 5분에 사무실 문을 열자 동기 둘은 청소를 하고 있었고 조교실장을 포함한 선배 둘이 나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왜 늦었는지 내게 물었고, 나는 늦잠을 잤다고 답했다. 걸레를 빨며 잠시 이등병 생활이 떠올랐다. 내가 군대에 온 건지, 공부를 하러 온 건지. 나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룸메이트들을 깨우다가, 나중에는 포기하고 7시에 일어나 씻고 짐을 챙기고 7시 반에 자전거를 탔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노트북을 들고 눈길에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노트북이 박살나기도 했다. 그래도 8시까지 사무실 문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사무실 청소는 메뉴얼이 있었다. 문을 열어 소화기로 고정시키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일단 빗자루로 바닥을 '잘' 쓸고, 대걸레를 빨아 와 바닥을 '잘' 닦고, 걸레로 눈이 닦는 모든 곳을 '잘' 훔쳐내고, 교수들을 응대할 커피포트를 내리고, 컴퓨터를 켜 공문을 확인해 출력해 놓고, 화분에 물을 주고 등등, 지금은 잘 생각도 나지 않지만 적어도 두 배는 더 메뉴얼이 있었다. 8시에 청소를 시작하면 거의 30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한 번은 청소를 하고 있는데 3학기 위의 석사과정생 J가 들어와 예전에는 흰장갑을 끼고 형광등 위를 훑어 보고 까맣게 되면 욕 먹었는데 세상 참 좋아졌다 그지, 하며 나가기도 했다. 여기가 군대 내무실이냐, 대학 사무실이냐. 대학원의 갑을 관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는 원래 좀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선배라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었다. 그는 좋게 말하는 법이 없어서, 그저 이렇게 저렇게 잘하면 된다고 말하면 될 것을, 이렇게 하면 죽는다 라며 내게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이건 군대에 갓 들어온 이등병을 갈굴 때 선임들이 기를 죽이기 위해 주로 하는 수법이었다. 이런 것을 당하며 나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 과에 따라 다르지만 군대 이상의 문화가 남아 있는 대학원도 있다. 혹은 서로 소원해 조교 근무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대학원도 있다. 문화를 만드는 것은 대부분 교수들이다. 그들의 지지와 묵인 하에 대학원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3. 등록금과 장학금

 

  1학기 개강일이 가까워져 오자 조교실장이 장학금 회의를 소집했다. 대학원 과정생 조교들이 모두 모였다. 모두 합해 10명쯤 되었다. 조교실장은 장학금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입학 전 술자리에서 간단히 "조교 생활을 하면 등록금이 모두 면제, 연구비를 받으면 용돈까지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만 간단히 들었을 뿐이었다. 조교실장은 이번 학기에 적어도 300만원씩은 받을 수 있겠다, 고 했다. 나는 내색하지 못했지만 뭔가 몸의 피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부모님께 생활비와 등록금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장담해 놓은 뒤였다. 이번 학기 등록금은 450인데 조교 활동으로 보전되는 비용은 300, 그러면 150의 등록금을 당장 마련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교수님이 8분인데 대학원 조교는 10명이다. 그러니까 8분은 각 1명의 연구조교를 두고 350 정도의 장학금을 각각 줄 수 있는데, 그걸 모두 모아 2800만원을 만들고 10명에게 나누면 280. 그런데 조교실장에게는 등록금만큼의 장학금을 몰아주기 때문에 각 조교의 몫은 그렇게 할당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과에서 개설하는 대형강의가 3개 있었는데, 각 조교비가 80만원씩 240만원이 나오는 것을 다시 10으로 나누면 각자의 몫은 조금씩 늘어난다. 이 대형강의의 조교는 당연히 신입생인 우리의 몫이었다.

  조교 근무는 3월초부터 8월말까지라고 했으니까 6개월을 근무하고 300만원, 한달로 치면 50만원이 조금 안되는 돈을 받게 된다. 이 돈이 내게 할당된 장학금이자 생활비이자 모든 것이었던 셈이다. 수업이 있는 주9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 사무실에서 조교근무를 서야 했다. 당연히 최저시급도 안되는 돈이었다. 차라리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교근무를 하지 않으면 이곳 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조언인지 협박인지, 그런 것에 이끌려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회의를 마친 후 룸메이트인 L에게 교수님의 연구를 보조해 드리고 받을 수 있다던 연구비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기존 연구비는 받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고, 신규로 연구 프로젝트를 따내면 순번에 따라 차례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L에게 그도 연구비를 받고 있는지 물었는데, 그는 아직 순번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3학기 선배였다. 적어도 2년 동안은 나에게도 연구비 차례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1년에 버는 돈 600만원, 1년에 내야 할 등록금 900만원. 숨쉬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300만원이 비었다. 나는 첫학기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등록금 차액에 생활비 100만원을 더하니 그럭저럭 당장 급한 돈은 해결할 수 있었다. 부모님께는 연구비를 받아 생활할 만하다고 거짓말을 했다.

 

- 교수들은 대학원생 1-2명을 연구조교 명목으로 활용해 300만원 가량의 장학금을 줄 수 있다. 등록금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한데, 그나마도 조교활동을 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다닌 대학원의 경우 조교활동을 하지 않으면 받은 장학금을 조교들에게 모두 돌려줘야 했다. (대학원생을 조교로 활용하지 않는 과의 경우 개인 조교로 부리며 장학금을 주기도 한다.)

 

-- 연구비의 경우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연구원으로 등록된 대학원생들이 받는다. 석사과정에서는 대략 월 80, 박사과정에서는 월 120을 받는다. 보통 이 돈을 받아 학비에 보태고 생활비로 충당한다.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하는 교수 밑에는 제자가 많다. 그러나 연구비를 포기하거나 개인 연구비만 받아 가는 교수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자기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데 실패한, 혹은 그것을 포기한 가장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대학원생을 부리는데는 거침이 없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한 2008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구비를 받아보지 못했다. 가끔 BK사업이나 HK사업 등에 선정돼 조교비 이외에도 최소한의 생활비를 받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을 보면 참 많이 부럽다.

 

 

 

*지난 글에 많은 분들이 답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응원도 감사하고 질책도 감사합니다. 왜 투잡 쓰리잡을 하지 않는가, 하는 답글이 많았는데요... 저는 그냥 강의, 논문, 학과행정, 셋 중 하나만 할 수 있거나... 혹은 이 4시간의 월 80만원 강사 자리라도 보장이 되면 좋겠습니다. 시간강사는 4개월마다 재계약인데요, 사무실에서 연락이 없으면 그냥 잘린 거예요. 강사 고용시즌이 오면 전화통만 잡고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학과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한학기 더 해주실 수 있나요, 하고 물으면 기쁜 마음은 접어두고 네 그럼요, 하고 최대한 차분히 대답합니다. 전화를 끊으면 이번 학기도 어쨌든 살아남았구나, 하고 만세 불러요. 강의를 많이 하면 저도 좋겠는데, 이력서를 5군데 넣었지만 아무 데서도 연락이 없습니다. 강사 초빙은 보통 학연과 인맥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특정 대학교에서 자기 출신들을 써요. 이름없는 지방대에서도 특정 명문대 출신 강사들이 많이 보일 겁니다. 그래도 저는 출신대학교에서 강사초빙을 해주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연구소 조교를 맡게 된 일과 대학원 동기 S와 있었던 일에 대해 정리해 보려 합니다...


4. 대학과 패스트푸드점.

 

  대부분의 대학은 시간강사들에게 4대보험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단지 4개월 간의 고용계약서를 작성하고 수업이 끝나면 어떤 통보도 없이 퇴직처리할 뿐이다. 결국 지역 의료보험가입자의 경우 그 보험료를 온전히 혼자 짊어져야 한다. 고용보험을 내고 있으나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 없다. 퇴직일이 개강 하루 전으로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산재보험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사실 강의하다가 어딘가 부러지고 골절되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고, 교수가 학생에게 폭행당할 일도 희박하다. 그래서 우리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산재 아닌 산재가 일어났다.

  내가 서른이 되던 해다. 아마도 2012년, 강의를 처음 시작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어느 교수님께서 연구실을 6층에서 7층으로 옮긴다며 대학원생과 나이 어린 강사들을 소집했다. 대단히 흔하고 평범한 일이었기에, 모두 그러려니 하고 모였다. 보통 연구실에는 5천권 내외의 책이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노끈으로 포장해 밀차에 쌓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나른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쁘게 책을 꽂아 넣는다. 책을 나르는 데만 한나절이 소요된다. (이삿짐 센터에서는 교수 이사라고 하면 무척 싫어한다. 사실 대부분의 교수는 대학원생들을 동원하니 딱히 이삿짐 센터를 부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는 하다.) 우리는 아침 일찍 모여 점심까지 책을 날랐다. 교수는 자신을 잘 따르는 강사 한 명을 대신해 연구실 이전을 책임지게 했고, 자신은 나오지 않았다. 점심이 되자 몇 판의 피자가 배달되었고, 우리는 먹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 옆에 쌓아 뒀던 책 무더기가 내게 쏟아졌다. 두꺼운 양장본들이었다. 그 책들이 꽤나 높은 높이에서 내 다리를 향해 모두 쏟아졌다.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 내 3학기 윗 선배 S가 그 꼴을 보았는데, 그는 책을 급히 치우고 나를 부축했다. 나는 앉은 상태로 바지를 걷었다. 책에 찍힌 다리는 그 부분이 뭉개져 있었는데 빨갛다기보다는 하얀... 선배는 나를 보고 야 너 저거 뼈 아냐, 라고 외쳤다. 나는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교수 대신 책임을 맡은 강사를 찾아가 조금 다쳤으니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슬쩍 상처를 보여 주었다. 그는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나는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걸었다. 집 근처의 정형외과에 가는 길에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이제야 피가 펑펑 나고 있었다.

  정형외과엔 사람이 많았다. 양말로 상처 부위의 피를 막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응급실에 가도 되었겠지만 응급비용을 부담할 자신이 없었다. 의사는 내가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수술준비해, 라고 하고 나를 수술대에 눕혔다. 아마 10바늘 정도 꿰맸을 것이다. 대략 5만원 내외의 비용이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오른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자취방에 들어갔다.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몰라 침대까지 기어가 간신히 누웠다. 다친 시간은 대략 오후 2시, 집에 들어와 누우니 5시쯤 되었다. 그때까지 나에겐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내가 다친 사실을 그 강사와, 선배, 그리고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그 자리의 모두가 대략은 알았을 것이다. 나는 둘에게 문자를 남겼다. 몇바늘을 꿰맸고 당분간 연구실에 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마침 방학이어서 강의는 없었다. 둘에게 모두 답장이 왔다. 푹 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S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과자와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적당히 사왔다. 나는 누구 같이 온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빨래를 좀 널어줘요, 하고 부탁했고, 그는 빨래를 널어주고 돌아갔다.

  교수의 이삿짐을 날라주다가 걷지 못할 만큼 다쳤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수는 내게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가 나에게 전화해 많이 다쳤는지, 몸은 좀 어떤지, 내 일을 도와주다 그랬으니 정말 유감이라든지, 그러한 말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모든 치료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했고, 여름 내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곳이 내 직장이라면, 내 청춘을 바치고 있는 곳이라면, 나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해주길 바랐다. 군대에서 작업하던 이등병이 다쳐도, 일용직 노동자가 현장에서 다쳐도, 사람을, 노동자를,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는다.

  내가 갑자기 이 일화를 꺼낸 이유는, 며칠전 다쳤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강의를 하며 주3일은 학교에서 떨어진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한다. 거기에서 '딜리'라는 업무를 한다. 아침 일찍 배달되는 냉동, 냉장 음식을 받아 창고에 올리는 일이다. 강의와 병행하며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다. (투잡 쓰리잡을 왜 하지 않냐는 댓글들이 많았는데, 사실 하고 있었다...) 강의가 없는 날 주4일, 아침 7시에 출근해 점심까지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곳이다. 나는 며칠전 냉동감자를 옮기다가 빗길에 넘어져 팔이 골절됐다. 팔꿈치가 갑자기 야구공 크기만큼 부풀어 올랐다. 그 자리에는 크루 동생들이 있었고 매니저가 있었다. 매니저는 나를 근처 병원으로 데려갔고 모든 병원비를 부담해 주었다. 그리고 2주간 스케줄을 빼줄 테니 언제든 낫는대로 나오라고 웃으며 말해 주었다. 원한다면 산재 신청해 70%의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동생들에게는 걱정의 문자가 몇 통 와 있었다. 일주일에 15시간 내외를 일하고 있을 뿐이지만, 패스트푸드점에서는 내게 건강보험을 포함한 4대보험을 모두 등록해 주었다. 내 명목상의 직장은 그래서 대학교가 아닌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다. 화요일에는 강의를 하고, 수요일에는 냉동감자를 옮기러 간다. 지식을 파는 대학에서보다 햄버거를 파는 패스트푸드점이 오히려 나를 노동자로 대접해 준다.

 

- 많은 강사들이 건강보험 등을 목적으로 주 60시간 내외의 단순 노동을 한다. 대학은 비정규직 강사들을 노동자로 대접하지 않는다.

 

 

* 손을 다쳐서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제 반깁스를 하고 어느 정도 글을 쓸만 합니다. 하필 어머니가 잠깐 올라와 계시다가 깁스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보셨습니다. 강의한다고 나가더니 갑자기 깁스를 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을 갔던 거냐고 물으십니다. 다음에는 내 어머니에 대한 글을 좀 써보려고 합니다...

 

 

5. 연구소 조교 생활

  

   다시 2008년 3월, 석사 1학기 때로 시계를 돌려 본다. 보통 연구소라고 하면 실험실과 백색 가운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건 공대의 경우이고, 인문대의 경우는 “동양학민족연구소”, “한민족사회과학연구소”와 같은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그저 책으로 가득차 있는 공간이기 쉽다. 우리 학과에서도 작은 인문학 연구소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석사과정에 입학하며 마침 연구소 조교를 맡고 있던 선배가 논문학기에 들어갔고, 내 지도교수가 연구소장을 맡게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내가 물망에 올랐다. 연구소 조교가 선임되는 과정에서 대학원생들의 의지가 반영될 여지는 당연히 없었다. 조교실장이 나를 불러 너는 오늘부터 학과조교와 연구소조교를 함께 맡을 것이니 7층에 있는 “인문학 연구소”(가칭)에 올라가 인수인계를 받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야 너는 참 좋겠다 석사 1학기부터 벌써 공부할 공간도 생기고, 연구소엔 책이 많으니 또 논문 쓰기는 얼마나 좋아, 게다가 연구소 장학금도 나오잖아, 하고 부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말했다. 객관화 해서 보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부당한 일에 대해서도 자신이 그에 한 발 떨어져 있으면 부당함이 지닌 아주 작은 장점을 부각시켜 피해자를 초라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에서야 속으로라도, 그러면 당신이 하든가... 생각했겠지만, 나는 뭔가 좋은 기회가 온 게 아닌가 싶어 살짝 들떠 있었다.

  인문학 연구소의 조교는 국어학 전공인 J였다. 그는 학기 초 과사무실을 청소할 때 들어와 하얀 장갑 끼고 한 번 훑어볼까, 라고 대학 사무실을 군대 내무반으로 치환시켰던 사람이다. 그는 ‘에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군기가 빠졌네’, ‘장난하냐’와 같은 표현을 달고 살았다. 그는 내가 연구소에 들어오자 목장갑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연구소의 모든 책을 빼서 다시 정리할 것인데, 엑셀 파일에 책의 서지와 개수를 모두 파악해 3일내로 올리라고 했다. 연구소는 10평 남짓의 아담한 크기였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폐급 책장이 가득했고, 간신히 앉아 공부할 만한 크기의 책상이 두 개, 누군가를 응대할 작은 쇼파가 두 개 있었다. 책은 모든 책장에 빽빽하게 꼽혀 있었고 자리가 없어 채 담지 못한 책들이 책장 위 박스에 가득 담겨 있었다. 3일이면... 어떻게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3일간 모든 책을 책장에서 꺼내 각 책을 분류하고 다시 꼽았다. 중복되는 책을 골라 박스에 담아가며, 여러 학회지들을 호별로 정리했다. 책의 목록번호는 대략 3천번까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억지로 우겨 넣다가 한 번은 책과 책 사이에 책이 끼었는데, 손으로 잡아빼다가 도저히 안돼서 공구함에 있던 망치로 책을 꺼내기도 했다. 책의 잔해를 어찌할까 하다가 몰래 8층의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고 목록번호를 하나 지웠다. 그렇게 일이 끝나자 J는 연구소의 쇼파에 나를 앉히고 연구소에서 해야 할 매뉴얼을 알려주었다.

  근무 시간은 평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공부하고 싶다면 퇴근 시간은 너의 자유이다. 주말에 나와 공부해도 좋다. 그런데 24시간 언제라도 지도교수에게 전화가 와서 뭘 찾거나 너를 호출할 수 있다. 그때 만약 없어서 전화를 못 받았다, 뭐 네가 알아서 상상해라.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학회지가 있는데, 그때마다 수백 권의 책을 정리하고 발송해야 한다. 학회지는 1년에 4번 발행되고 간간이 발행하는 단행본이 있는데, 그건 랜덤이다. 단행본을 전국으로 발송하는 일 역시 너의 몫이다. 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회의가 있으면, 그것 역시 네가 처음부터 끝을 책임져야 한다. 연구소 회의가 있으면 네가 참석해 서기의 역할을 해야 하고, 정리된 회의록을 교수님들의 식대 영수증에 첨부해 산학협력단에 제출해야 한다. 연구소 평가는 1년에 1번 있는데 한 달쯤은 이걸로 밤을 새야 할 거다.

  그가 말한 정말 굵직한 일들만 대략 정리해 봤다. 나는 학과 조교와 연구소 조교를 병행하게 되는데, 명목상 학과 사무실은 주 3.5일 정도, 연구소는 1.5일 정도 근무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무실과 연구소를 쉴 새 없이 왕복했다. 여기에 9학점의 대학원 수업까지 생각하면, 석사 1학기는 내가 어딘가 뒤돌아볼 여유를 전혀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받게 되는 연구소 조교 장학금은 한 학기 동안 60만원이 전부였다. 수업이 없는 방학에도 의무적으로 출근해야 했으니 6개월 간 60만원, 즉 한 달에 10만원이었다. 추가 수당이나 보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국가장학금을 받는 학부생들은 100만원 가량을 받고 정확히 4달을 일했으니, 나보다 배 이상의 보수를 받았다. (사실 학부생들도 착취 당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언젠가 에피소드로 다룰 것이다.)

  나는 인문학 연구소에 3년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구소장이 바뀌며 그만두게 되었다. 정말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생각나는 두 가지만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연구소 단위의 국가 프로젝트가 나오면 연구소 운영위원들이 모여 어떤 주제로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회의를 하게 된다. 내가 석사 1학기 때 나왔던 대형 프로젝트 때는 무려 10여 번의 회의가 있었다. 10명의 교수들이 한 마디씩만 해도 회의 시간은 대략 3시간 가까이 되었다. 회의록을 정리하며 참 답답했던 것은, 다들 말하는 바는 참 이상적이고 훌륭했지만 이것을 대체 어떻게 보고서로 제출할지 내 눈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회의가 5번쯤 거듭되었을 때는 회의록도 대충 작성했고 너희들 뭐하냐, 하는 심정이었다. 결국 떨어지고 남은 것은 100만원에 이르는 식대 영수증과 의미없는 회의록 더미가 전부였다.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어떤 장면이 있다. 첫 회의 때 모두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고 내가 남았는데, 저건 누구지 하는 표정을 몇몇 운영위원들이 지었다. 회의를 진행하려던 연구소장은 아, 저기는 그냥 연구소 잡일 돕는 아이입니다 회의 시작합시다, 라고 했다. 잠시 호감의 눈빛을 보이던 운영위원들은 곧 아, 그런거였나 하는 표정으로 회의 자료를 들추었다. 그것으로 내 포지션은 확실히 정해진 셈이었다. “잡일 돕는 아이”, 그것만큼 내 석사 시절을 잘 나타내는 표현도 없었다.

  연구소 조교 3년차가 되었을 때, 어느 학회와 연합한 대단히 큰 규모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나는 발표자와 토론자에게 원고를 받아 그것을 자료집으로 만들고, 플랜카드를 제작해 게시하고, 테이블과 다과를 세팅하고, 명패를 만들어 각 교수들 앞에 놓고, 진행 중 사진을 찍고, 마이크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꽤나 정신이 없었다. 이런 학술회의는 적어도 두 달에 한 번씩 개최되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학술회의는 오후 5시에 끝났다. 학교 근처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 호프집, 3차로 노래방, 다시 4차... 선후배들은 대개 2차를 끝내고 돌아갔지만 나는 연구소의 조교였기에 언제나 끝까지 남았다. 술자리에서는 내가 이 대학원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공부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노래방에서는 탬버린을 쳤다. 그날은 4차를 하던 새벽 2시쯤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였다. 나는 조용히 빠져나와 학교에 들어가 우산 4개를 마련했다. 다시 시내에 갔을 무렵에는 자리가 거의 끝나 있었다. 나는 지도교수께 우산 하나를 드리고 서열과 성별에 따라 3개의 우산을 나누어 드렸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기에 우산을 받은 교수들은 내게 무척 고마워했다. 나는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려 했는데 어떤 젊은 교수가 나를 슬쩍 부르더니 말했다. 아니, 아직 과정생일 텐데 시작부터 끝까지 참 고생이 많네요, 이거 참 우리 대학원생들은 이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데 여기 참 대단해요 허허. 그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연구자였다. 대단히 좋은 논문을 기계처럼 써냈고, 피인용 지수가 대단히 높았다. 나 역시 그의 논문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가 ‘대단하다’라고 표현한 것이 그때는 그저 도와줘서 고마워, 하는 식으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대단함’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주말도 잘 거르지 않고 주5일 이상 꾸준히 출근했던 연구소에서 내가 3년간 받은 보수의 총액은 360만원이 전부다. 그런 나를 무척 슬프게 했던 것은 언젠가 내 지도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는 어떤 술자리에서 내게 연구소의 보수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한 학기에 60만원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한 달에 60만원이면 생활할 만했겠구나,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니 선생님 그게 아니고... 하는데 그는 다른 교수의 말에 응대하느라 곧 화제를 돌렸다. 그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 대부분의 연구소는 교내에서 지원 받은 운영비와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받은 연구비로 예산을 짠다. 그러나 거기에 연구소의 실무(잡무)를 담당하는 대학원 과정생의 조교비는 들어있지 않다. 대부분의 연구소 조교는 교내 장학금으로 책정된 60∼80만원의 보수를 한학기에 한 번 받을 뿐이다. 오히려 대학원생을 보조하는 학부생들이 더 많은 보수를 받아간다.

 

 

* 다친 팔은 많이 나았습니다. 댓글을 모두 하나하나 곱씹어 읽었습니다. 걱정해주신 분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강의하는 데는 지장이 없고 다음주면 맥잡 노동자로서의 삶도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 추석에는 집 근처 택배 상하차장에서 2주 정도 일했는데 이런저런 피로들이 누적되었던 것 같네요.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는 사람(학생)을 만날까 두려운 것보다 야간에 택배 상하차를 하니 마음은 정말 편했습니다. (열심히 일한다고 장기 근무 제의까지 받았습니다. ^^; 심각하게 고민해봤는데 강의에 집중하거나 논문 쓸 체력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오늘은 어머니에 대한 에피를 좀 쓰다가... 눈물이 좀 나서 그만두었습니다. 언제고 다시 다루겠습니다.



6. 어머니...

 

  나는 살면서 무언가 강요 받아 본 기억이 드물다. 내 부모님은 좋게 말하면 ‘신뢰’로, 남들이 보기엔 ‘방임’으로 남매를 키우셨다. 학교에서 받아 온 가정통신문 장래희망란에 무언가 적을 때도 너 하고 싶은 거 해, 라고 하셨고 부모님 의견란에는 자녀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라고 쓰셨다. 심지어는 대학에 갈 때도 내가 어느 대학에 가면 좋을까요, 하고 여쭙자 네가 가고 싶은 학교와 과를 정하고 우리에게 말해주렴,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무 고민없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난 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셨다. 아버지는 많지 않은 외벌이로, 하지만 어머니께 꼬박꼬박 네 식구를 건사할 월급을 가져다 주셨다. 내 어머니는 그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월급을 받아 온 날이면 집안에 삼겹살 굽는 냄새나 돈까스 튀기는 냄새가 퍼졌다. 덕분에 구김살없이 행복한 가정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계신다. 얼마 전 어머니는 내게 직장 의료보험이 되는지 물으셨다. 퇴임 후 두 분을 내게 피부양자로 등록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사는 의료보험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한 평생 한 가정을 훌륭하게 먹여 살린 아버지가 이제 퇴임을 앞두고 계신데, 다음 세대인 나는 부모님을 ‘부양’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 나는 여전히 ‘피부양’ 상태이며, 내 부모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점차 측은하게 여기셨다. 그러한 분위기가 감지될 때마다 나는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당신에게 태어나서 정말 미안해요, 하는 마음이었다. 서로 실망과 죄송스러움을 티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러한 배려가 계속되었다. 자연스레 나는 공부를 핑계로 집에 잘 올라가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박사 2기 크리스마스 때였다. 나는 오래된 친구 몇과 함께 어머니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고등학교 시절 천리안의 취미 동호회에서 만나 10년 넘게 모임을 가져 오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가끔 밤늦게 이 친구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기꺼이 따뜻한 밥을 지어주시곤 했다. S는 은행 정규직이 되었고, Y는 디자인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고, T는 벤처회사에서 계속 살아남았고, D는 사법연수원에 있었다. 내 어머니는 친구들의 권유로 맥주를 몇 잔 드셨다. 그리고 일어나며 내게 휴, 이 할 일 없는 놈... 여기서 혼자 할 일 없는 놈, 하셨다. 내 어머니께 나는 “할 일 없는 놈”으로 규정되었다. 

  박사 3기에 접어든 나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아니면 본가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올라왔다가 터미널에서 차가 끊겼다. 지하철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충분히 서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강변역 화장실에 들어가서 앉았다. 7시간 정도만 버티면 터미널에서 첫차를 탈 수 있을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문 닫습니다, 이제 나오셔야 해요. 막차가 끊기면 지하철 화장실도 폐쇄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24시간 영업하는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눈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그저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었다. 

  며칠 전 어머니께서 내 자취방에 오셨다. 반찬을 조금 가져오셨고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아시안게임을 함께 보았다. 맥주를 한 캔씩 나누며 나는 왜 그랬는지, 요즘 다들 많이 힘들다네요 주변 친구들도 아직 자리 잡은 친구들이 별로 없고... 그래요, 했다. 어머니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아닌데... 엄마 친구 자식들은 다 좋은 기업들 가던데, 라고 하셨다. 정말이지 괜한 말을 했다.

 


7. 어머니, 그리고...

 

  내 할머니는 96세까지 사셨다. 나를 예뻐해서 나만 보면 사촌 누나들 몰래 용돈을 몇 만원씩 주머니에 우겨넣곤 하셨다. 내가 석사학위를 받아 왔을 때는 이제 우리 XX가 선상님이 된 거냐, 그런거냐, 하고 물으셨다. 나는 아직 학생이에요, 하고 답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했을 때 할머니는 언제 선상님이 되는 거냐 힘겹게 물으셨다. 나는 곧 될 거예요, 하고 어렵게 답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너 그러다 늙겠구나... 하셨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와의 거의 마지막 대화였다. 할머니는 유일하게 예뻐했던 손자에게 용돈 한 번 못 받아 보고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나는 병원에서 차게 식은 할머니를 붙들고 미안해 할머니 하고 엉엉 울었다. 무엇보다도, 선상님이 되어 만 원짜리 한 장 드린 바가 없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의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학자금 대출을 값는 것조차 버거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저도 손자 노릇할게요, 했던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할머니의 첫 성묘를 가는 길 국화는 내 돈으로 사서 꽃잎을 뿌려 드렸다.

  

- 아프다, 그런데 아파하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내 가족들을 마주보는 것이 너무나 아프다.

 


* 오후 5시 반쯤, 알고 지내는 후배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잘 지내냐기에 그럭저럭 지낸다고 했습니다. 그 카톡을 시작으로 몇 통이 더 왔습니다. 뉴스 잘 봤다, 이거 너잖아 그치, 너 이렇게 살았냐. 쿠키뉴스에서 <[친절한 쿡기자] "내 나이 서른 둘, 지방대 시간강사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제 글을 인용해 짧은 기사를 올렸더군요. (http://news.nate.com/view/20140930n26895) 급상승 관심뉴스 1위에 랭크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쿠키뉴스 김민석 기자님, 당신은 오늘 오전 9시 20분에 제게 “친절한 쿡기자 형식으로 사연을 다루고 싶은데 어떠신지 여쭤봅니다. 메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댓글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답과는 상관없이 오후 3시에 관련기사를 올리셨습니다. 저의 답을 기다리기에는 긴 시간이었나 봅니다. 저는 오늘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강의-면담-회의가 이어져 밥 한 끼 못 먹고 많이 바쁜 날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숨을 좀 돌리고 다음과 같이 답신드리려 했습니다. “아직 정리 못한 이야기가 많아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조금 더 지켜봐주세요. 죄송합니다.” 대학원의 몇몇에게 연락을 받고 나니 기분이 멍하네요... 한 달쯤 더 시간을 주시면 저도, 이곳의 구성원들도, 그리고 읽어주신 분들도 납득할 수 있는 어떤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습니다. 나를 구원해주었던 에피소드들도, 내 세대 사회인들을 위한 메세지도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곳에서 왜 버텨내고 있는지 차근차근 정리해 내고 싶었습니다. 내일부터 저는 많이 바빠질 것 같습니다. 시간이 해명해줄 수 있었던 것을, 몇몇 연구실을 돌며 직접 사과하고 구설수에 오르고...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뉴스의 파급력은 큽니다 많은 고민 끝에 아직 글을 지우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계속 글을 쓸 수 있을지, 어떠한 자기 검열을 거치게 될지, 두렵습니다.

 

* 저는 제가 대학원에서 겪은 일들 전달해 위로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나좀 살려주세요, 하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특히 나는 잘난 사람이니 처우를 당장 개선해달라는, 치기어린 말을 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나 스스로의 삶을 담담하게 정리한 후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고, 힘들게 살아가는 내 또래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제가 대학원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버텨오고 있는, 원동력은 당신들에게 있습니다. ‘사회인’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그 자체로 당신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 저는 계속 연구할 겁니다. 저는 저에게 부끄럽지 않은 학위논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1급 학회지에 매년 논문을 투고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작 주 4시간 강의하는 것이 표면적인 노동의 전부이지만, 논문 한 편을 위해 연구소에서 36시간을 버텨내고 집에 와 밥한끼 먹고 옷 갈아입고 다시 출근합니다. 허리디스크, 안구건조, 탈모, 소화불량,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지병을 안고 삽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적어도 내 분야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저는 저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88만원 세대를 가르치는 대학이 최저시급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대학원생들의 노동에 기대어 지탱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슬플 뿐입니다.

 

* 다음 글은... 기약이 없습니다. 그래도 강의하며 행복했던 일 몇 가지를 꼭 정리해 보고 싶기에 언제고 다시 남기겠습니다. 나를 정리하고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최병구 | 작성시간 14.10.04 네 11월에 바로 이 문제에 대해 그간 공부하고 조사했던 연정위 작업을 조합원들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일단 오늘 회의에서 11월 29(토) 확정. 다음 주에 좀 자세히 공지하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오영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0.07 기대하겠습니다. ^^
  • 작성자인문학협동조합 | 작성시간 14.10.07 다음 글이 올라왔네요(홍덕구)

    http://todayhumor.com/?bestofbest_181101
  • 작성자홍덕구 | 작성시간 14.10.12 http://todayhumor.com/?bestofbest_181743

    7편입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