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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주일예배]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작성자시간의 숨결|작성시간24.03.03|조회수57 목록 댓글 0

출처

블로그>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원문

http://blog.naver.com/esedae/223371774757

 

 

 

베드로후서 3장 10-18절 방월석 목사

 

지난 시간엔 주의 재림을 부인하고 조롱하는 거짓 선생들의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특징들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이 재림의 사건을 늦추시는 이유에 대해 살펴봅니다. 그 전에 먼저 지난 시간에 배운 말씀들을 복습해봅니다.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4)하며 종말과 재림의 복음을 부정하고 있는 말세지말입니다. 그러나, 죄악이 관영한 노아의 때를 하나님이 물로서 심판하신 것처럼, 죄악이 가득한 이 땅을 불로서 심판하시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날을 두렵고 떨림으로 바라보며 불타버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본문을 통해 주시는 교훈들을 살펴봅니다.

 

I.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8-10절)

 

1.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하십니다.

 

a.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말씀 시편 90편 4절의 말씀은 인용한 것인데, 여기서 이 시를 쓴 모세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영원을 사시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시간과 70, 80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1,000년 2,000년의 시간이 우리에겐 긴 듯 여겨져도 하나님께는 밤의 한 경점과 같고 하루와 같은 짧은 시간으로 여기신다는 겁니다.

b. “하루가 천년 같다”는 말씀은 또 창세기 1, 2장에 등장하는 천지창조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말씀이기도 한데, 창세기 2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은 안식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6일과 안식하신 하루를 더 해서 7일, 즉 본문의 계산대로라면 7 천년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계획하신 시간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6일 즉, 6,000년의 시간은 인류에게 허락하신 기간이고, 나머지 하루 즉, 1,000년의 시간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기간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세우실 천년왕국이라는 겁니다.

 

나팔절을 한 해의 첫날로 계산하는 이스라엘의 달력에서는 올해가 아담의 창조로부터 5,784년이 되는 해입니다. 연도 계산에 어느 정도 오차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인류의 역사가 대략 6,000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지 2,000년의 시간이 지났고, 인류의 역사가 6,000년가량 지난 지금이 바로 7일째 되는 안식일인 천년왕국이 임박한 시대라는 겁니다.

 

2. 9절,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이”는 주의 재림이 없다고 조롱하는 거짓 선생들(3)뿐 아니라 이런 거짓선생들의 미혹에 넘어가 재림에 대한 믿음의 약해진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2,000년의 시간을 이틀처럼 기다려주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9)이라 하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2 천년이라는 시간을 이틀처럼 기다려주셨다는 겁니다.

 

재림의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든 시간은 우리가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 것이고, 또 이미 회개하고 구원받은 자들에겐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기회인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하십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본래 “Redeeming the time(KJV)”이라고 해서 ‘기회를 구속하라(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재림의 때까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값을 주고 사서(Redeeming)’ 회개와 구원의 기회로, 또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겁니다.

 

II. 주의 날(10-13절)

 

1.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하십니다.

 

a.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강해할 때보다 “주의 날”의 개념이 확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라”는 이 말씀만 보면 여기서 말하는 “주의 날”이 휴거의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로 설명하고 있는 1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그 날”로 묘사되는 “주의 날”이 휴거의 사건뿐 아니라 이후로 펼쳐지는 7년 대환난과 예수님의 지상 재림 그리고 천년왕국과 천년왕국의 끝에 펼쳐질 백보좌 심판과 그 이후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불태워 버리시고 새하늘과 새땅을 펼치시는 그 날까지 포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주의 날”, 종말의 날이 휴거의 사건(살전 5:2)으로 시작된다는 겁니다.

 

b.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하십니다. 주의 약속이 더딘 것 같지만, 주의 날이 임할 때는 도적같이 올 것이라 하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도의 휴거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서도 “주의 날이 밤의 도적같이 이를 것”이라하셨는데, 이 말씀과 함께 5장 4절에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한 너희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하리라”(살전 5:4)하셨습니다. 영적 무지와 죄악으로 어두움 가운데 머물고있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만, 늘 깨어서 그 날을 예비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말씀 안에 깨어서 시대의 징조들을 살펴보고 있는 성도들은 비록 휴거의 사건이 일어나는 “그 날과 그 시”(마 24:36; 25:13)는 알지 못해도, 휴거의 사건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에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2. 11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강해할 때도 살펴본 것처럼(살전 5:22,23; 살후 2:12) 종말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바로 경건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다가 신랑되신 예수님이 오실 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춘향이가 이몽룡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정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변사또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정절을 지켰기에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온 이몽룡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만이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다는 겁니다.

 

3. 12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하십니다.

 

a. 11절에서 주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던 사도 베드로가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하십니다. 여기서 먼저 “바라보라(Looking for)”는 말씀은 소망을 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다시 말해 재림의 날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무엇을 바라보고, 또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부자되는 것이 소망입니까? 건강해지는 것이 소망입니까?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얻는 것이 소망입니까? 아니면 아름다운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소망입니까? 이 모든 것들을 누려보았던 솔로몬왕은 그의 인생 회고록이라 할 수 있는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2,14)라고 고백했습니다.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장차 불에 타서 사라질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은 헛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헛된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장차 주님이 오시어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b. 두 번째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볼 뿐 아니라, 그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하십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헬라어가 ‘스퓨돈타스’인데, 영어로는 hasten으로 되어 있습니다. ‘재촉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재촉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속 받은 성도들의 노력에 따라 주의 재림이 빨라질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의 날이 빨리 임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본문(12절) 앞 뒤의 말씀들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9절에서는 재림의 날에 대한 주의 약속이 더딘 것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길 원하시기 때문”(9)이라 하셨고, 15절에서는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재림의 날을 연기하시는 이유는 단한가지인데, 아직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의 날이 빨리 임하도록 재촉하기 위해선 우리가 나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주의 오심이 늦어지냐고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이 이 정도면 되었다 여기시면 그때 재림의 사건이 찾아오게 된다는 겁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실 때 재림에 대한 약속과 함께(행 1:11) 주신 말씀인데, 이는 우리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구는 둥그니까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주는 교회도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막심 선교사님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가 이 사명을 잘 감당하면 주의 재림이 앞당겨지게 될 것입니다.

 

4. 12, 13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하십니다.

 

12절에서 말씀하는 “체질”이 헬라어로는 ‘스토이케이아’라고 해서 ‘원소’ 혹은 ‘원자’를 의미하는데 물리학에서 원소(원자)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를 의미합니다. 종말의 날에 하늘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때(wherein the heavens being on fire shall be dissolved, KJV), 우주에 있는 모든 원소들도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오펜하이머가 미국 뉴멕시코에서 최초로 원자폭탄(트리니티)을 만들어 실험할 때, 이 원자폭탄이 대기 중에서 연쇄작용을 일으켜 세상을 멸망으로 인도하지 않을까 염려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원자폭탄을 실험할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지막 주의 날에 하나님이 명하시면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원자가) 뜨거운 불에 녹아” 사라지고, 이후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하십니다. 죄로 인해 더렵혀진 지금의 하늘과 땅이 불로 태워지고, 거룩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면 비로소 성경에서 셋째 하늘(삼층천)로 묘사되는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머물게 된다는 겁니다. 여하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하늘과 땅은 장차 불에 타 사라질 장망성이라는 겁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불에 타 사라질 장망성과 같은 세상이 아니라, 이후로 펼쳐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III. 마지막 권면(14-18절)

 

1. 14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하십니다.

 

a.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 구체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과 새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자들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15)하신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은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룩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b.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ye may be found of him in peace, KJV)”하심은 평안함 가운데 그 날을 맞이하라는 뜻입니다. 종말의 날을 평안함 가운데 맞이하기 위해선 구원의 확신, 휴거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에겐 종말의 날은 심판과 재앙이 시작되는 두려운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죽어도(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종말의 날은 평강의 날이 아니라 두려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2. 15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하십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된다.”는 말씀이 인상 깊은데, 이는 주님이 오래 참으시고 재림을 연기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블로그 사역이 시작되던 10여 년 전에 휴거의 사건이 일어났다면 구원받지 못하고, 7년 대환난에 던져졌을 분들이 절반 정도는 될 겁니다. 주님이 오래 참아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주의 오심이 더디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인내하는 시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3. 15, 16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하십니다.

 

a. 사도 바울이 쓴 종말에 관한 말씀이 이미 초대교회 안에 널리 회람되었음을 알 수 있는 말씀인데,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본 데살로니가전후서와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이 그것입니다. 일반서신 가운데는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베드로후서가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고, 이후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받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마지막 기록인 것입니다.

 

b. 이처럼 사도 베드로는 초대 교회 안에 사도 바울이 쓴 종말에 관한 말씀들이 이미 널리 회람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16절에서는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하십니다. 모든 성경들이 그렇지만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들은 특별히 성경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나 훈련 없이 억지로 풀면 멸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해석하는데 신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16절에 기록된 “억지로 풀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트레블루신’인데, ‘왜곡하다’, ‘비틀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저자의 의도와 맥락(context) 속에서 풀어야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해석자의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스트레블루신(억지로 풀다)’입니다. 영어로는 앞의 경우를 exegesis라고 하고 뒤의 경우를 eisegesis라고 합니다. exegesis를 직역하면 ‘의미를 이끌어낸다’는 뜻인데, 본문이 전달하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끌어내는 것이 exegesis입니다. 이에 반해 eisegesis를 직역하면 ‘의미를 집어넣는다’는 뜻인데, 이는 해석자가 본문에다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집어넣어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eisegesis처럼 성경을 해석자의 의도에 따라 억지로 풀면서(스트레블루신, eisegesis) 이단이 나오는 것이고, 이렇듯 잘못된 성경 해석이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4. 17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하십니다.

 

마지막 때에는 무법한 자들로 표현되는 거짓 선생들의 미혹이 강하게 역사할 것이니 이 미혹에 이끌려 “굳센데서” 다시 말해 굳건한 믿음에서 넘어지지 않도록(lest ye being - fall from your own stedfastness, KJV) 삼가라는 뜻입니다. “삼가라”는 말씀은 헬라어 ‘퓔랏소’인데, 경계하라(beware)는 뜻입니다. 마지막 때를 전한다고 무조건 따라가지 말고 그 정체가 확실히 드러날 때까지 일단은 ‘퓔랏소’, 경계하라(beware)는 겁니다. 종말의 때가 가깝다고 하면서, 비트코인, 도피처 장사를 하고, 다단계 투자회사를 만들어 돈을 벌려고 하는 자들이 있기에 이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퓔랏소’, 경계하는(beware) 태도를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5. 18절,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하십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후서를 마무리 지으면서 사도 베드로가 남긴 마지막 권면인데,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선지자 호세아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권면하신 말씀이 생각나는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종말과 재림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거짓 선지자의 미혹에 붙들려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 특별히 종말에 관한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겁니다.

 

IV. 결 론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하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2 천년의 시간을 이틀처럼 기다리셨지만, 이제 그 날이 조만간 도적과 같이 올 것입니다. 주의 날을 바라보는 자들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해야 하며, 불에 타 사라질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머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의 날이 가까워서인지 몰라도 이곳저곳에서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억지로 풀며 멸망의 길로 이끌어가는 거짓 선생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특별히 종말과 재림의 지식에서 자라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https://youtu.be/FmnpuLej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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