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극관(演劇觀)에 대한 점검
* '연극'이라고 할 때 눈앞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대개 우리는 창문 없고 천장이 높은 밀폐된 실내 극장, 객석보다 높고 환한 조명이 켜진 무대, 등받이가 있는 의자와 조용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깜깜한 객석, 코를 높게 보이도록 입체적으로 분장한 배우, 조금은 과장되었으나 대체적으로 사실적인 대사와 움직임, 이런 것들로 채워진 이미지가 떠오른다.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무대이다.
연극의 다양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연극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이를 떨어버리기는 좀처럼 쉽지 않으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이나 정부가 간여한 공연장들의 태반은 이런 종류의 연극을 전제로 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서울의 국공립공연장과 대기업에 의해 만들어진 공연장 중 그렇지 않은 극장은 문예회관 소극장,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두 곳뿐이다. 심지어 최근에 지은 LG아트센터조차 그렇다.)
* 그러나 이러한 연극은 인류의 연극사 전체로 보아, 근대 18세기로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불과 이삼백 년 정도, 그것도 유럽과 미국, 혹은 이들의 영향을 받은 20세기의 제3세계 몇몇 지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종류의 연극이 연극의 전부가 아니며 앞으로의 연극 역시 이러할 것이라는 기대 역시 근거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협소한 연극관에 사로잡혀 이러한 연극이 매우 보편적이거나 연극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 근대의 300년 동안의 음악인 7음계의 장단조 체계가 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과 흡사하다.)
* 이러한 연극관에 비추어 본다면 마당극이라는 종류의 연극은 좀 독특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성으로부터 벗어난 연극, 특수한 연극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 인류 역사 속의 연극들은 매우 다종다양하며,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세계의 연극 역시 매우 다양하다. 비서양권의 연극은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연극 중에서도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연극이나 중세의 연극, 심지어 세익스피어 시대의 연극조차 이러한 형태의 연극이 아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컴컴한 실내가 아니라 밝은 대낮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화려한 무대장치나 의상 같은 것을 갖추지 않은 연극, 지붕 꼭대기나 전철 속 같은 희한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조용한 객석이 아니라 떠들썩하게 먹고 떠들면서 어울리는 연극, 둥그렇게 둘러앉아 구경하거나 여기저기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는 연극, 줄거리가 없고 심지어 대사도 없는 연극, 사실적인 대사나 움직임이 아닌 춤이나 노래로 이루어진 연극, 두어 시간 안에 끝나는 연극이 아니라 하루 종일 혹은 며칠 내내 계속되는 연극 등, 연극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은 점점 강화되어 가는 추세이다.
2. 연극의 핵심은 무엇인가?
* 그렇다면 이렇게 다종다양한 것들을 다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도대체 연극이란 무엇인가? 이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연극이 지니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특성 몇 가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연극은 인간의 행동을 흉내내는 놀이이다
연극은 일종의 흉내내기 놀이이다. 모든 예술은 노동이 아닌 놀이이다. 어떤 예술은 언어를 가지고 놀고, 또 어떤 예술은 선이나 색을 가지고, 질서 지워진 소리를 가지고, 혹은 인간의 율동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놀면서, 이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낸다. 그 중 연극은 인간들의 행동을 흉내내는 놀이이다. 이를 모방 혹은 재현이라고 한다. 인간의 행동, 사건을 모방·재현하는 흉내내기 놀이 중에는 연극이라는 형태로 채 구조화되기 전 상태의, 그저 연극적인 놀이의 형태의 것들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 전쟁놀이 같은 것인데, 아이들은 이러한 연극적 놀이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배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진행해야 하는 종교적 제의 속에도 이러한 재현·모방의 요소가 다소간 들어있다. 예를 들어, 무굿 중 강신무(降神巫)의 여러 거리는 신의 역할을 무당이 맡아 재현한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으며 매우 연극적인 대목들도 많다. 유교식 제사는 잔칫상 식사를 모방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성찬식은 최후의 만찬을 모방하고 있다.
* 연극은 가상적인 싸움이다
연극의 핵심은 싸움, 연극적인 용어로 하자면 갈등·대립이다. 김수현 드라마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놓고 독설로 싸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극단적 상황을 설정하여 격렬한 싸움을 만든다는 점의 지적은 옳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비판할 만한 것인가? 싸움을 한다는 것은 나쁜 것이므로? 극단적 상황은 현실성이 떨어지므로? 상식적으로 이런 말들은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자. 만약 텔레비전 드라마에 '싸움'이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싸움이란 대립, 갈등을 의미한다. 대립, 갈등, 싸움이란 텔레비전 드라마뿐 아니라, 모든 '극'의 본질이다. 연극에도 극영화에도 방송극에도 극화(극만화)에서도 그 핵심은 싸움이다. 이런 극예술들은 대개 인간사 중에서 대립과 싸움이 있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으로 인간과 세상 전체를 그려내는 예술이다. 대립·갈등이 격렬한 대목을 흔히 '극적'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까닭이다.
싸움, 즉 갈등·대립이 있다는 것은, 극 중 인물이 살아가면서 무엇엔가 부딪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문제없이 순조롭게 사는 것이라면 연극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여주인공이 서로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순조롭게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 극은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그 연애를 반대하는 사람, 연애가 잘 안 되도록 힘든 환경, 이것들과 신경 곤두세우고 괴로워하면서 대립하며 싸워야만 극이 되는 것이다.
* 연극은 인간들의 모임을 전제로 한다
모든 예술은 수용자를 전제로 한다. 물론 창작자 스스로 수용자가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 중 특히 공연예술인 연극은 혼자가 아닌 여럿, 연희자만이 아닌 관중을 필요로 한다. 연극은, 공연하는 공간, 공연하는 시간, 공연하는 인간과 구경하는 인간, 그리고 전달하거나 공유하고 싶은 내용, 이 네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구경꾼이 없다면 그 연극은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미술이나 문학은 작품이 고형의 물건으로 남으므로 당대에 수용자가 없다 하더라도 후세에라도 수용될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공연예술인 연극은 인간의 행동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므로 공연하는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일회성을 특성으로 한다. 보관도 복제도 가능하지 않다. 비디오로 녹화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연극이 아니다. 따라서 연극은 항상 사람들이 모여야만 가능하며, 집회나 행사 같은 북적거리는 모임에 연극이 수반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반면에 무언가를 끝까지 혼자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연극을 할 수 없다.
3. 다종다양한 연극과 마당극
* 근대 이전의 축제적, 제의적인 연극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매일 연극을 볼 수 있지만, 근대 이전에는 매일 연극이 공연되지 않았다. 마치 지금처럼 시장이 날이면 날마다 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연극 역시 특별한 행사처럼 열리는 것이었다. 연극이 열리는 것은 특별한 날, 특별한 공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푸짐하게 함께 먹고 즐겨야 하는 축제, 혹은 공동의 기원이 필요한 제의 때에 연극은 이루어졌다. 동서를 막론하고 연극사의 첫 시작은 제의이다. 원시종합예술은 원시시대의 축제일에 이루어진 예술이었고, 고대 그리스 연극은 그들의 축제인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이루어졌다. 서양 중세의 연극은 기독교적인 축제일에 한 마을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축제일 동안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형태도 있었다.
동양이나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연극은 마을 단위로 축제일에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조선시대까지 가장 중요한 축제일인 정초를 전후한 시기에는 전국의 광대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나례희가 이루어졌다. 궁중에서도 특별한 잔칫날에나 연극을 노는 것이다. 중세가 해체되고 근대로 이행되는 시기에도 가면극이 공연되는 새로운 공간은 장터였고, 장을 따라 다니는 보부상 조직이나 아전들의 도움으로 공연이 주최되었다. 근대 이후에도, 상설공연이 가동되는 극소수의 대도시 지역이나 대중매체에 의한 대중예술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는 순회공연의 형태는 꽤 오랫동안 주요한 공연형태로 유지되었는데, 이러한 순회공연은 상설공연에 비해 축제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는 영화와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얻기 이전인 1950년대까지 순회공연 형태의 연극이 대중들의 주요한 오락물이었으며, 마을에 순회 공연단이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은 그 공연 때문에 들떴고 평소에는 활동하지 않는 밤중에 공연을 보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북적거리는 축제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축제적이거나 제의적인 연극들은 일반적으로 사실적 형상화보다는 연극의 관
습적 왜곡이 강한 작품들이었다. 이는 관객들의 공동체적 집단성이 강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여기에 대하여는 다음 주에 상세히 이야기하겠다.
* 서구 근대의 사실성에 대한 집착과 사실주의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 근대연극은 사실을 무대 위에서 그럴 듯하게 재현함으로써 생기는 연극적 환영(illusion)을 중시한다. 이후 서구연극의 무대는 관객이 가능한 한 사실처럼 느끼도록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무대장치에서 원근법을 이용한 회화적 처리, 막간 무대장치의 변화를 위한 장치들, 촛불이나 가스조명에서 전기조명으로의 변화, 인위적 암전과 조명 변화를 전제로 한 실내 극장과 방의 한쪽을 뜯어내고 엿보는 것 같은 완벽한 프로시니엄아치로의 발전은 모두 이와 관련 있다. 또한 현실이 일관된 합리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근대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물의 행동과 사건은 인과성과 합리성의 원칙에 따라 정리되었고,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일관되고 완결된 구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각 세부의 부분들은 이러한 일관성에 의해 배치되고 조정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형식적으로는 17세기의 삼일치법칙(시간, 공간, 행동의 일치)나 18세기 이후의 웰메이드 플레이(well-made play)로 귀결되며, 여기에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심과 사회적 전형성을 지닌 인물과 사건의 형상화라는 내용적 측면이 덧붙여지면서 19세기 후반 사실주의에 이르러 이러한 성과가 최고조에 달하며 된다.
*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의 붕괴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이야기되는 현상이 연극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각 예술종류마다 모더니즘의 현상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는데, 연극에서는 독어권에서 강세를 보인 표현주의가 대표적이었고 러시아 구성주의가 싹을 틔우다 러시아 혁명으로 좌절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극도의 경제위기 등을 겪은 20세기 전반이 지나가면서, 이러한 붕괴는 구미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연극인들은 각기 자신들의 연극 어법과 방법론을 내세우며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서사극, 부조리극, 잔혹연극, 가난한 연극, 게릴라연극 등등) 각각의 주장과 방법론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은 모두 서구 근대가 만들어온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의 공통문법 즉 자기 완결적이고 일관되며 합리적인 형상화 방법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서사극은 극적 환영을 통한 현실의 비판적 인식능력의 감퇴를 경계하며, 부조리극은 세계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며, 잔혹연극은 연극 본연이 지닌 강렬한 에너지의 경험과 제의적 성격의 회복을 추구하며, 가난한 연극은 인간의 몸에 의존하는 연극 본연의 특성에 대한 회복을 제기하고 있는 등 다양하지만) 이는 서구 근대의 사유방식·세계관과 인간관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과 붕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일한 시공간,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되는 일관성, 인과성과 합리성, 역사발전에 대한 믿음,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등에 대한 믿음이 20세기에 들어서서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써 고급연극에서의 웰메이드플레이와 사실주의의 위력은 크게 약화되며, 웰메이드 플레이의 문법은 대중극이나 대중적 극영화 분야로 그 중심을 옮겨가게 된다.
* 서구 근대에도 살아남은 야외극
실내의 웰메이드 플레이가 서구 근대의 대표적인 연극 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겪지 않은 서구에서는 여러 종류의 비사실주의적인 야외극이 지속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사실주의의 붕괴가 가시화되고 여러 종류의 비사실주의 연극들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야외극은 더욱 관심을 받게 되고 익숙하고도 새로운 자산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야외극들은 서민적이고 축제적(행사적)인 연극이며, 실내 공간에서 상설화 되고 꽉 짜여진 극장 문법 속의 연극에서 탈피하는 연극이며, 그런 점에서 연극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고 근대극에서 잃어버린 연극의 축제적 본질에 대한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극인 셈이다.
그래서 구미의 야외극들은, 실내의 연극에서는 해볼 수 없고 야외에서만 가능한 표현, 일탈적인 형태들, 축제적이고 떠들썩하고 신기한 연극들이 태반이다. 장대목발을 신고 다닌다든가 하는 아크로바틱 요소들이 강한 작품, 물을 뿌린다든가 불을 사용한다든가 아니면 매우 규모가 큰 세트를 사용한다든가, 거리 전체를 돌아다닌다든가, 몇 박 몇 일 동안 공연이 지속된다든가 하는 집중된 실내 공간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작품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적인 표현이나 발상에서, 이들 서구의 야외극은 극적 환영을 중심으로 한 연극을 만들어온 문화적 경험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 비서구권의 연극들
이에 비해 이른바 제3세계인 중남미, 아시아 등 비서구권 연극은, 서구 근대의 환영주의,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 관행이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는 식민지 본국의 문화로서 자의반타의반 이식·수용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 관행은 서구 근대라는 맥락에서 지니고 있었던 진보성을 크게 상실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 제3세계 지식인들은 서구처럼 근대적 발전을 해야 한다는 당위와, 결코 서구 근대와 꼭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거나 그 방법으로는 그들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는 현실적 절망감,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식민지 본국에 유리한 것이며 따라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비판적 의식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며 다양한 모색을 거듭하고 있다. 따라서 제3세계권의 진보적 연극인들 한편으로는 서구 근현대 연극의 성과를,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에 의해 파괴되고 무시당한 자신들의 전통적 연극의 자산을 받아들여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미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받기 이전의 제3세계권 연극들은 야외에서 이루어진 축제적이고 제의적인 연극이거나 실내 공간이라 할지라도 서구 근대극과 같은 문법을 지니지 않은(그런 점에서 서구 근대극의 실내공간이라고 할 수 없는) 연극들로, 바로 이 점에서 서양의 야외극과 상통한다.
그러나 서구 야외극이, 한편으로는 실내 공간의 극장 질서에서 일탈하는 파격적 표현을 즐기면서도 환영주의가 주도적이었던 문화적 전통의 흔적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제3세계권의 연극들은 서구적인 환영주의의 전통을 강하게 지니지 않으면서도 식민지 침탈로 상실한 또 다른 질서를 회복하려 하는 질서 지향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물론 역시 나라마다 역사적 특성에 따른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오랜 식민지 경험으로 자생적 문화의 파괴가 심하고 서구 문화와의 동화가 심한 남미권과 이보다 더 짧은 식민지 경험을 지닌 아시아권, 20세기의 몇 십 년 동안만 식민지 경험을 지닌 동아시아, 식민지 경험을 전혀 지니지 않은 채 아시아의 맹주로 자처하면서 탈 아시아적 지향을 함께 지닌 일본 등에서 매우 다양한 현상으로 드러난다.
* 마당극의 세계연극사적 보편성
마당극은 이러한 아시아의 현대연극의 한 종류로 한국의 자생적인 현대연극 양식이다. 한국의 전통 민속연극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면서 서구 근현대연극들을 참고하여 성립시킨 양식으로, 야외에서의 공연이 원형(原型)이지만 실내에서의 공연(물론 서구 근현대연극의 극장 질서를 무시하고 마당극 나름의 원리를 관철하는)도 가능한 양식이다. 한편으로는 서구 근현대연극의 전횡을 극복하고자 하는 집단적 의도의 소산으로 진보적 연극운동 속에서 탄생한 것이면서, 서구의 야외극과 달리, 서구 근대극의 전횡에 의해 상실되고 파괴된 전통 민속연희의 원리와 문법을 회복하려는 지향을 지닌, 나름대로 질서 지향적인 연극이다.
이런 점에서 마당극은 현대 한국연극사의 고유한 한 양식이면서, 세계연극사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연극양식이라 할 수 있다.
과천 세계마당극축제가 한국의 마당극을 중심으로 세계의 야외극들이 참가하는 연극일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태까지의 과천 마당극제의 참가작들은, 서양 근현대의 실내 공간의 연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지향을 지닌 작품들, 구미의 야외극 중 무대장치 의존성이 적고 배우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연극들, 비 서구권의 연극 중 구미 연극의 이식형태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전통연극의 성과를 과감히 계승하거나 탈 식민주의적인 진보성을 지닌 연극 등이며, 이것이야말로 마당극이 중심이 된 이 연극제의 특성이다.
4.복제예술의 시대, 연극의 운명과 마당극
솔직히 말해 이 시대에 연극이라는 예술은 그다지 일상적이거나 편안한 예술은 아니다.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을 찾아가야만 하는 불편한 예술이며, 인간의 몸에 의존해야 하는 복제가 불가능한 예술이다. 연극을 보면서는 누울 수도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으며 보기 싫다고 중간에 꺼버릴 수도 없고, 한눈을 팔았다고 앞의 장면을 되돌려볼 수도 없다. 불편한 좌석에서 시종일관 긴장한 자세로 수용해야 한다. 대중매체의 시대를 넘어서서, 다 매체의 시대, 쌍방향통신 매체의 시대에, 모든 대중이 즐겁고 편안한 것만을 원하는 화려한 대중문화의 시대에, 과연 연극이라는 원시적이기 이를 데 없는 예술이 인류문화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어쩌면 연극이 지닌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특성이야말로 연극의 힘일 수 있다. 근대 초기처럼 연극이 가장 흥미롭고 유일한 대중적인 공연물이 되는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이러한 편안하고 일상적인 예술향유의 영역은 이미 손쉽게 구입하고 복제되어 널리 유통되는 영화 등 미디어를 통한 예술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순리이다. 그와 함께 웰메이드 플레이나 사실주의의 관행 역시 사진술을 바탕으로 한 극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넘겨줄 수밖에 없다. 극적 환영이나 이에 근거한 사실주의로는 극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따라갈 수가 없다. 대중매체 예술이 양적 주도성을 지니는 시대에, 연극은 연극으로만 가능한 표현과 기능으로 인간의 삶의 풍부화에 기여해야 한다. 즉 그것은 맨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인간의 흉내내기 놀이라는 점, 인간의 모임을 전제로 하는 축제적이고 행사적인 예술이라는 점, 살아있는 인간과 직접 만나는 생생한 쌍방향 소통과 강렬한 에너지를 경험하며 한다는 점 등을 주 장기로 살려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 관람은 일상의 방송극이나 비디오영화 관람과는 다른, 특별한 행사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며, 평소 기계적 매체와 짜여진 사회적 관계 속에서밖에 만나지 못하는 일상과 달리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몸을 움직이며 부딪치며 노는 강렬한
예술적 경험을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당극과 야외극은 서구 근대극의 전통 속에 있는 다른 연극들에 비해 훨씬 유리하고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연극'이라고 할 때 눈앞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대개 우리는 창문 없고 천장이 높은 밀폐된 실내 극장, 객석보다 높고 환한 조명이 켜진 무대, 등받이가 있는 의자와 조용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깜깜한 객석, 코를 높게 보이도록 입체적으로 분장한 배우, 조금은 과장되었으나 대체적으로 사실적인 대사와 움직임, 이런 것들로 채워진 이미지가 떠오른다.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무대이다.
연극의 다양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연극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이를 떨어버리기는 좀처럼 쉽지 않으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이나 정부가 간여한 공연장들의 태반은 이런 종류의 연극을 전제로 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서울의 국공립공연장과 대기업에 의해 만들어진 공연장 중 그렇지 않은 극장은 문예회관 소극장,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두 곳뿐이다. 심지어 최근에 지은 LG아트센터조차 그렇다.)
* 그러나 이러한 연극은 인류의 연극사 전체로 보아, 근대 18세기로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불과 이삼백 년 정도, 그것도 유럽과 미국, 혹은 이들의 영향을 받은 20세기의 제3세계 몇몇 지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종류의 연극이 연극의 전부가 아니며 앞으로의 연극 역시 이러할 것이라는 기대 역시 근거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협소한 연극관에 사로잡혀 이러한 연극이 매우 보편적이거나 연극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 근대의 300년 동안의 음악인 7음계의 장단조 체계가 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과 흡사하다.)
* 이러한 연극관에 비추어 본다면 마당극이라는 종류의 연극은 좀 독특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성으로부터 벗어난 연극, 특수한 연극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 인류 역사 속의 연극들은 매우 다종다양하며,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세계의 연극 역시 매우 다양하다. 비서양권의 연극은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연극 중에서도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연극이나 중세의 연극, 심지어 세익스피어 시대의 연극조차 이러한 형태의 연극이 아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컴컴한 실내가 아니라 밝은 대낮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화려한 무대장치나 의상 같은 것을 갖추지 않은 연극, 지붕 꼭대기나 전철 속 같은 희한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조용한 객석이 아니라 떠들썩하게 먹고 떠들면서 어울리는 연극, 둥그렇게 둘러앉아 구경하거나 여기저기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는 연극, 줄거리가 없고 심지어 대사도 없는 연극, 사실적인 대사나 움직임이 아닌 춤이나 노래로 이루어진 연극, 두어 시간 안에 끝나는 연극이 아니라 하루 종일 혹은 며칠 내내 계속되는 연극 등, 연극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은 점점 강화되어 가는 추세이다.
2. 연극의 핵심은 무엇인가?
* 그렇다면 이렇게 다종다양한 것들을 다 연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도대체 연극이란 무엇인가? 이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연극이 지니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특성 몇 가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연극은 인간의 행동을 흉내내는 놀이이다
연극은 일종의 흉내내기 놀이이다. 모든 예술은 노동이 아닌 놀이이다. 어떤 예술은 언어를 가지고 놀고, 또 어떤 예술은 선이나 색을 가지고, 질서 지워진 소리를 가지고, 혹은 인간의 율동적인 움직임을 가지고 놀면서, 이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낸다. 그 중 연극은 인간들의 행동을 흉내내는 놀이이다. 이를 모방 혹은 재현이라고 한다. 인간의 행동, 사건을 모방·재현하는 흉내내기 놀이 중에는 연극이라는 형태로 채 구조화되기 전 상태의, 그저 연극적인 놀이의 형태의 것들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어린아이들의 소꿉놀이, 전쟁놀이 같은 것인데, 아이들은 이러한 연극적 놀이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를 배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진행해야 하는 종교적 제의 속에도 이러한 재현·모방의 요소가 다소간 들어있다. 예를 들어, 무굿 중 강신무(降神巫)의 여러 거리는 신의 역할을 무당이 맡아 재현한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으며 매우 연극적인 대목들도 많다. 유교식 제사는 잔칫상 식사를 모방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성찬식은 최후의 만찬을 모방하고 있다.
* 연극은 가상적인 싸움이다
연극의 핵심은 싸움, 연극적인 용어로 하자면 갈등·대립이다. 김수현 드라마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놓고 독설로 싸운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극단적 상황을 설정하여 격렬한 싸움을 만든다는 점의 지적은 옳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비판할 만한 것인가? 싸움을 한다는 것은 나쁜 것이므로? 극단적 상황은 현실성이 떨어지므로? 상식적으로 이런 말들은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자. 만약 텔레비전 드라마에 '싸움'이 빠진다면 어떻게 될까? 싸움이란 대립, 갈등을 의미한다. 대립, 갈등, 싸움이란 텔레비전 드라마뿐 아니라, 모든 '극'의 본질이다. 연극에도 극영화에도 방송극에도 극화(극만화)에서도 그 핵심은 싸움이다. 이런 극예술들은 대개 인간사 중에서 대립과 싸움이 있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으로 인간과 세상 전체를 그려내는 예술이다. 대립·갈등이 격렬한 대목을 흔히 '극적'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까닭이다.
싸움, 즉 갈등·대립이 있다는 것은, 극 중 인물이 살아가면서 무엇엔가 부딪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문제없이 순조롭게 사는 것이라면 연극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여주인공이 서로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순조롭게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이 극은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그 연애를 반대하는 사람, 연애가 잘 안 되도록 힘든 환경, 이것들과 신경 곤두세우고 괴로워하면서 대립하며 싸워야만 극이 되는 것이다.
* 연극은 인간들의 모임을 전제로 한다
모든 예술은 수용자를 전제로 한다. 물론 창작자 스스로 수용자가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 중 특히 공연예술인 연극은 혼자가 아닌 여럿, 연희자만이 아닌 관중을 필요로 한다. 연극은, 공연하는 공간, 공연하는 시간, 공연하는 인간과 구경하는 인간, 그리고 전달하거나 공유하고 싶은 내용, 이 네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구경꾼이 없다면 그 연극은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미술이나 문학은 작품이 고형의 물건으로 남으므로 당대에 수용자가 없다 하더라도 후세에라도 수용될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공연예술인 연극은 인간의 행동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므로 공연하는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일회성을 특성으로 한다. 보관도 복제도 가능하지 않다. 비디오로 녹화해 놓는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연극이 아니다. 따라서 연극은 항상 사람들이 모여야만 가능하며, 집회나 행사 같은 북적거리는 모임에 연극이 수반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반면에 무언가를 끝까지 혼자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연극을 할 수 없다.
3. 다종다양한 연극과 마당극
* 근대 이전의 축제적, 제의적인 연극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매일 연극을 볼 수 있지만, 근대 이전에는 매일 연극이 공연되지 않았다. 마치 지금처럼 시장이 날이면 날마다 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연극 역시 특별한 행사처럼 열리는 것이었다. 연극이 열리는 것은 특별한 날, 특별한 공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푸짐하게 함께 먹고 즐겨야 하는 축제, 혹은 공동의 기원이 필요한 제의 때에 연극은 이루어졌다. 동서를 막론하고 연극사의 첫 시작은 제의이다. 원시종합예술은 원시시대의 축제일에 이루어진 예술이었고, 고대 그리스 연극은 그들의 축제인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이루어졌다. 서양 중세의 연극은 기독교적인 축제일에 한 마을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축제일 동안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형태도 있었다.
동양이나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연극은 마을 단위로 축제일에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조선시대까지 가장 중요한 축제일인 정초를 전후한 시기에는 전국의 광대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나례희가 이루어졌다. 궁중에서도 특별한 잔칫날에나 연극을 노는 것이다. 중세가 해체되고 근대로 이행되는 시기에도 가면극이 공연되는 새로운 공간은 장터였고, 장을 따라 다니는 보부상 조직이나 아전들의 도움으로 공연이 주최되었다. 근대 이후에도, 상설공연이 가동되는 극소수의 대도시 지역이나 대중매체에 의한 대중예술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는 순회공연의 형태는 꽤 오랫동안 주요한 공연형태로 유지되었는데, 이러한 순회공연은 상설공연에 비해 축제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는 영화와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를 얻기 이전인 1950년대까지 순회공연 형태의 연극이 대중들의 주요한 오락물이었으며, 마을에 순회 공연단이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은 그 공연 때문에 들떴고 평소에는 활동하지 않는 밤중에 공연을 보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북적거리는 축제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축제적이거나 제의적인 연극들은 일반적으로 사실적 형상화보다는 연극의 관
습적 왜곡이 강한 작품들이었다. 이는 관객들의 공동체적 집단성이 강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여기에 대하여는 다음 주에 상세히 이야기하겠다.
* 서구 근대의 사실성에 대한 집착과 사실주의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 근대연극은 사실을 무대 위에서 그럴 듯하게 재현함으로써 생기는 연극적 환영(illusion)을 중시한다. 이후 서구연극의 무대는 관객이 가능한 한 사실처럼 느끼도록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무대장치에서 원근법을 이용한 회화적 처리, 막간 무대장치의 변화를 위한 장치들, 촛불이나 가스조명에서 전기조명으로의 변화, 인위적 암전과 조명 변화를 전제로 한 실내 극장과 방의 한쪽을 뜯어내고 엿보는 것 같은 완벽한 프로시니엄아치로의 발전은 모두 이와 관련 있다. 또한 현실이 일관된 합리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근대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물의 행동과 사건은 인과성과 합리성의 원칙에 따라 정리되었고,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일관되고 완결된 구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각 세부의 부분들은 이러한 일관성에 의해 배치되고 조정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형식적으로는 17세기의 삼일치법칙(시간, 공간, 행동의 일치)나 18세기 이후의 웰메이드 플레이(well-made play)로 귀결되며, 여기에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심과 사회적 전형성을 지닌 인물과 사건의 형상화라는 내용적 측면이 덧붙여지면서 19세기 후반 사실주의에 이르러 이러한 성과가 최고조에 달하며 된다.
*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의 붕괴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이야기되는 현상이 연극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각 예술종류마다 모더니즘의 현상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는데, 연극에서는 독어권에서 강세를 보인 표현주의가 대표적이었고 러시아 구성주의가 싹을 틔우다 러시아 혁명으로 좌절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극도의 경제위기 등을 겪은 20세기 전반이 지나가면서, 이러한 붕괴는 구미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연극인들은 각기 자신들의 연극 어법과 방법론을 내세우며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서사극, 부조리극, 잔혹연극, 가난한 연극, 게릴라연극 등등) 각각의 주장과 방법론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은 모두 서구 근대가 만들어온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의 공통문법 즉 자기 완결적이고 일관되며 합리적인 형상화 방법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서사극은 극적 환영을 통한 현실의 비판적 인식능력의 감퇴를 경계하며, 부조리극은 세계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며, 잔혹연극은 연극 본연이 지닌 강렬한 에너지의 경험과 제의적 성격의 회복을 추구하며, 가난한 연극은 인간의 몸에 의존하는 연극 본연의 특성에 대한 회복을 제기하고 있는 등 다양하지만) 이는 서구 근대의 사유방식·세계관과 인간관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과 붕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단일한 시공간,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되는 일관성, 인과성과 합리성, 역사발전에 대한 믿음,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등에 대한 믿음이 20세기에 들어서서 깨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써 고급연극에서의 웰메이드플레이와 사실주의의 위력은 크게 약화되며, 웰메이드 플레이의 문법은 대중극이나 대중적 극영화 분야로 그 중심을 옮겨가게 된다.
* 서구 근대에도 살아남은 야외극
실내의 웰메이드 플레이가 서구 근대의 대표적인 연극 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겪지 않은 서구에서는 여러 종류의 비사실주의적인 야외극이 지속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사실주의의 붕괴가 가시화되고 여러 종류의 비사실주의 연극들이 생겨나면서 이러한 야외극은 더욱 관심을 받게 되고 익숙하고도 새로운 자산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야외극들은 서민적이고 축제적(행사적)인 연극이며, 실내 공간에서 상설화 되고 꽉 짜여진 극장 문법 속의 연극에서 탈피하는 연극이며, 그런 점에서 연극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고 근대극에서 잃어버린 연극의 축제적 본질에 대한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극인 셈이다.
그래서 구미의 야외극들은, 실내의 연극에서는 해볼 수 없고 야외에서만 가능한 표현, 일탈적인 형태들, 축제적이고 떠들썩하고 신기한 연극들이 태반이다. 장대목발을 신고 다닌다든가 하는 아크로바틱 요소들이 강한 작품, 물을 뿌린다든가 불을 사용한다든가 아니면 매우 규모가 큰 세트를 사용한다든가, 거리 전체를 돌아다닌다든가, 몇 박 몇 일 동안 공연이 지속된다든가 하는 집중된 실내 공간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작품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적인 표현이나 발상에서, 이들 서구의 야외극은 극적 환영을 중심으로 한 연극을 만들어온 문화적 경험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 비서구권의 연극들
이에 비해 이른바 제3세계인 중남미, 아시아 등 비서구권 연극은, 서구 근대의 환영주의,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 관행이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웰메이드 플레이와 사실주의는 식민지 본국의 문화로서 자의반타의반 이식·수용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 관행은 서구 근대라는 맥락에서 지니고 있었던 진보성을 크게 상실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맥락을 지니고 있었다. 제3세계 지식인들은 서구처럼 근대적 발전을 해야 한다는 당위와, 결코 서구 근대와 꼭 같은 길을 걸을 수 없거나 그 방법으로는 그들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는 현실적 절망감,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받아들이는 것이 식민지 본국에 유리한 것이며 따라서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비판적 의식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하며 다양한 모색을 거듭하고 있다. 따라서 제3세계권의 진보적 연극인들 한편으로는 서구 근현대 연극의 성과를,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에 의해 파괴되고 무시당한 자신들의 전통적 연극의 자산을 받아들여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미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을 받기 이전의 제3세계권 연극들은 야외에서 이루어진 축제적이고 제의적인 연극이거나 실내 공간이라 할지라도 서구 근대극과 같은 문법을 지니지 않은(그런 점에서 서구 근대극의 실내공간이라고 할 수 없는) 연극들로, 바로 이 점에서 서양의 야외극과 상통한다.
그러나 서구 야외극이, 한편으로는 실내 공간의 극장 질서에서 일탈하는 파격적 표현을 즐기면서도 환영주의가 주도적이었던 문화적 전통의 흔적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제3세계권의 연극들은 서구적인 환영주의의 전통을 강하게 지니지 않으면서도 식민지 침탈로 상실한 또 다른 질서를 회복하려 하는 질서 지향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물론 역시 나라마다 역사적 특성에 따른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오랜 식민지 경험으로 자생적 문화의 파괴가 심하고 서구 문화와의 동화가 심한 남미권과 이보다 더 짧은 식민지 경험을 지닌 아시아권, 20세기의 몇 십 년 동안만 식민지 경험을 지닌 동아시아, 식민지 경험을 전혀 지니지 않은 채 아시아의 맹주로 자처하면서 탈 아시아적 지향을 함께 지닌 일본 등에서 매우 다양한 현상으로 드러난다.
* 마당극의 세계연극사적 보편성
마당극은 이러한 아시아의 현대연극의 한 종류로 한국의 자생적인 현대연극 양식이다. 한국의 전통 민속연극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면서 서구 근현대연극들을 참고하여 성립시킨 양식으로, 야외에서의 공연이 원형(原型)이지만 실내에서의 공연(물론 서구 근현대연극의 극장 질서를 무시하고 마당극 나름의 원리를 관철하는)도 가능한 양식이다. 한편으로는 서구 근현대연극의 전횡을 극복하고자 하는 집단적 의도의 소산으로 진보적 연극운동 속에서 탄생한 것이면서, 서구의 야외극과 달리, 서구 근대극의 전횡에 의해 상실되고 파괴된 전통 민속연희의 원리와 문법을 회복하려는 지향을 지닌, 나름대로 질서 지향적인 연극이다.
이런 점에서 마당극은 현대 한국연극사의 고유한 한 양식이면서, 세계연극사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연극양식이라 할 수 있다.
과천 세계마당극축제가 한국의 마당극을 중심으로 세계의 야외극들이 참가하는 연극일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태까지의 과천 마당극제의 참가작들은, 서양 근현대의 실내 공간의 연극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지향을 지닌 작품들, 구미의 야외극 중 무대장치 의존성이 적고 배우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연극들, 비 서구권의 연극 중 구미 연극의 이식형태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전통연극의 성과를 과감히 계승하거나 탈 식민주의적인 진보성을 지닌 연극 등이며, 이것이야말로 마당극이 중심이 된 이 연극제의 특성이다.
4.복제예술의 시대, 연극의 운명과 마당극
솔직히 말해 이 시대에 연극이라는 예술은 그다지 일상적이거나 편안한 예술은 아니다. 특정 시간에 특정 공간을 찾아가야만 하는 불편한 예술이며, 인간의 몸에 의존해야 하는 복제가 불가능한 예술이다. 연극을 보면서는 누울 수도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으며 보기 싫다고 중간에 꺼버릴 수도 없고, 한눈을 팔았다고 앞의 장면을 되돌려볼 수도 없다. 불편한 좌석에서 시종일관 긴장한 자세로 수용해야 한다. 대중매체의 시대를 넘어서서, 다 매체의 시대, 쌍방향통신 매체의 시대에, 모든 대중이 즐겁고 편안한 것만을 원하는 화려한 대중문화의 시대에, 과연 연극이라는 원시적이기 이를 데 없는 예술이 인류문화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어쩌면 연극이 지닌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특성이야말로 연극의 힘일 수 있다. 근대 초기처럼 연극이 가장 흥미롭고 유일한 대중적인 공연물이 되는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이러한 편안하고 일상적인 예술향유의 영역은 이미 손쉽게 구입하고 복제되어 널리 유통되는 영화 등 미디어를 통한 예술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순리이다. 그와 함께 웰메이드 플레이나 사실주의의 관행 역시 사진술을 바탕으로 한 극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넘겨줄 수밖에 없다. 극적 환영이나 이에 근거한 사실주의로는 극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따라갈 수가 없다. 대중매체 예술이 양적 주도성을 지니는 시대에, 연극은 연극으로만 가능한 표현과 기능으로 인간의 삶의 풍부화에 기여해야 한다. 즉 그것은 맨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인간의 흉내내기 놀이라는 점, 인간의 모임을 전제로 하는 축제적이고 행사적인 예술이라는 점, 살아있는 인간과 직접 만나는 생생한 쌍방향 소통과 강렬한 에너지를 경험하며 한다는 점 등을 주 장기로 살려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 관람은 일상의 방송극이나 비디오영화 관람과는 다른, 특별한 행사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며, 평소 기계적 매체와 짜여진 사회적 관계 속에서밖에 만나지 못하는 일상과 달리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몸을 움직이며 부딪치며 노는 강렬한
예술적 경험을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당극과 야외극은 서구 근대극의 전통 속에 있는 다른 연극들에 비해 훨씬 유리하고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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