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이유
정우숙 作
나오는 사람들 : 남자, 여자, 소녀(여인1겸함), 어머니(여자의 친정 어머니, 여인2겸함), 노장군(남자의 늙은 아버지), 적장(인격관리국 책임자의 목소리를 겸함), 직원(인격관리국의 직원, 과거의 사자를 겸함), 고문보조자(미래의 사형집행보조자를 겸함), 마을여인들, 여자의 아이들(실제 등장 않고 종이인형 등으로 처리), 그 외 전쟁의 소리들
무대는 전체적으로 검정 색조로 죽음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 작품에서 미래와 과거로의 사간 이동은 마치 극중 극의 형태와 같은 겹구조를 연상시킬 수 있다. 배우들의 무대에 자리하는 태도나 배열 형태 등에 따라 사이코 드라마와 같은 분위기가 강조될 수도 있다.
무대 중앙에 남자, 그 뒤에 배우들, 남자의 눈이 가려져 있다.
1장 희미한 사랑의 기억
(이 첫 장면은 이후 4장에서 반복될 것이므로 다음 내용 중 일부를 생략하면서 불투명한 예시와 같은 분위기를 강조할 수 있다.)
소녀: (혼잣말)오셨군요. 오실 줄 알았어요...그래도 안 오실 수 있나요? 싸움터가 여기인걸. 곧 또 싸움이 나려나 봐요. 사방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바람까지 험해요. 밤새 소란스럽던 바람이 새벽녘에 멎는 걸보고, 당신이 오신 걸 알았죠. 언제나 그랬는걸요(사이)
(어둠 속의 남자)
남자: 여기 올 맘이 ...아니었어.
소녀: 그래도 안 오실 수 있나요? 싸움터가 여기 인걸. 곧 싸움이 나려나 봐요. 사방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바람까지 험해요.
남자: .....바람?(사방을 둘러보며)고요한걸.
소녀: 밤새 소란스럽던 바람이 새벽녘에 멎는 걸보고, 당신이 오신 걸 알았죠. 언제나 그랬는걸요. 소문과 바람이 정신 없이 몰아치는 동안, 난 잠을 잃고 당신을 기다리죠. 그러다 어느 날 새벽인가 바람이 멎으면 거짓말처럼당신이 오시는 거예요.
남자: 하지만 내가오면...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질 않나.
소녀: (달려들어 안기며)괜찮아요. 전쟁 따위...무섭지 않아요. 평화로운 세상에 당신이 떠나있는 것보다, 전쟁 속에서당신 곁에 있는 게....훨씬 행복하니까요.
남자: (소녀를 뿌리치며)이번 소문은 어떤 것이었소.
소녀: 늘 똑같지요. 노장군의 군대가, 이번만은 만사를 젖혀놓고, 이 땅을 완전히 차지할 만한 무서운 전략으로 저경계선을 넘어오리라는....날 노예로 삼은 이 땅의 젊은 장군. 바로 당신의 적장이 그 소문 앞에 가만있을 리없죠.
남자: 무슨 전조라도 있었소?
소녀: (수줍게 자기 손을 내민다.)
남자: (무심코 그 손을 보다가 놀라 달려들며 그 손을 부여잡는다.)
소녀: 당신은 내 상처를 보셔야만 절 안아 주시는군요. (남자, 소녀의 손을 놓고 외면한다) 아니, 그나마도 가까이 다가오다 말뿐이지만.
남자: 대체 누구요? 누가 당신의 손가락들을....
소녀: 누구라니요 아무도 아니라니까요. 그저 제 몸이 한군데씩 사라져 간다니 까요. 이쪽 손가락이 모두 없어지고말았으니, 요사이 큰 전쟁만 벌써 다섯 번을 넘겼다는....
남자: 믿을 수 없어. 넌, 네 몸을 스스로 상처 내고 있어, 왜 그런 짓을 하지? 네 그 이상한 짓 때문에, 멀리서도 내 꿈속에 역마살이 동하는 거야.
소녀: 그렇게 라도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면, 당신은 날 돌아보지 않으시잖아요.
남자: 전쟁의 예감 땜에 네가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 네 철없는 자해행위 땜에 전쟁이 일어나는 거잖아, 네가 그 이상한 자해행위로 꿈속에서 날 불러내지 않는다면 난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을 거고, 내가 여기 오지만 않으면... 전쟁은 멈출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녀: 그런 말 마요. 당신이 아니어도 전쟁은 나요. 사람들은 서로를 찢어놓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족속들이죠.
남자: 마치 지기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소녀: 모르는 일이죠. 내가 사람 몸을 뒤집어쓴 다른 족속인지.....
남자: (냉정하게)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네 말이 맞다면, 전열을 가다듬어야 하니까. 결국은 다시 똑같이....
소녀: 언제나 그렇듯이, 혼자 오지 않으셨나요?
남자: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담 넌 진짜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상한 족속인 거야? 난 언제나처럼, 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왔어. 그들이 보이지 않나? 넌 도대체 뭐야?
소녀: 그럼 당신은요? 떠나 있어도 늘 눈에 사무치는 당신은, 사람인가요 귀신인가요?
남자: 그걸 누가 알겠나. 내가 진정 사람인지, 스스로 사람이라 믿고있는 귀신인지...
소녀: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전쟁은 왜 해요? 노장군이 당신 아버지라서? 단지 그 때문에?
(한바탕의 전쟁, 무대를 가로지른다. 표현방식은 자유로이 모색될 수 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의 소리 산발적으로 엇갈린다.)
소리1: 죽음이 끝나지 않는 날들-어둡고 긴-피의 강이 흐르는-꿈같은 전쟁의 날들....
소리2: 제발....목숨만....살려주세요.
소리3: 이만하면 이 난세에 오래 살았지. 죽이려면 얼른 죽이시오.
소리4: 웬일예요. 이게 ...왜 하필 우리 가족을....
소리5: 네놈이라고 늘 무사할 줄 아느냐...!
소리6: 죽여라. 죽여. 나 죽이고 니가 얼마나 잘 사는지. 내 저승에서 두고두고...
(그 아우성의 말미에서, 괴로워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2장 미래에 서서
(복잡하게 가시화될 필요는 없으나 미래를 나타내는 무대공간이 펼쳐진다. 남자를 지켜보던 직원의 신호에 의해 불켜지고, 남자는 불안한 듯 떨고 있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듯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낮게 중얼거리고 있다.그에게 죄수복과 같은 자루 옷이 입혀진다. 여자 역시 불안하게 남자 곁에 서 있다. 인격관리국 직원은, 나중에 과거
의 사자역할을 겸하게 된다.)
직원: 자,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무슨 문제로 여기까지 오셨죠?
남자: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 이리로 오게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최근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있긴 하지만,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여자: 저이는 내가 자신을 이곳에 고발했다고 짐작하고 있죠.
남자: 그야말로 저 여자의 짐작입니다. 난 누가 날 감시하고 고발하고 심문하는가, 그런 데 대해선 큰 관심이 없어요. 지금이 언제인가, 난 어디 있는가,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한데....
여자: 저이는 역사와 철학이라는, 지금은 사멸한, 학문이 아닌 학문의 뒤꽁무니를 쫓느라 병에 걸린 겁니다.
직원: 지금은 21세기도 저물어가기 시작한 때요. 연대와 날짜에 대한 개념이 뭉개어진 채 저마다 주관적인 시간대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요? 원하는 대로 더 먼 미래로 나아갈 수도, 묻혀진 과거 속의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 살수도 있소. 물론 그 주관적 시간대의 자유로운 조합과 변형 또한 가능하지.
남자: 가상체험의 무한 자유를 보장하는 그 같은 시간 개념은, 그러나 예상했던 만큼의 행복 대신 혼란스런 고통의 양을 늘려놓지 않았나요?
여자: 아무 이유 없이도 고통을 느끼는 게 저 사람의 이상한 증세죠.
남자: 엉켜버린 시간만큼이나 불분명해진 공간 개념 속에서 가상의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어요. 역사 속의 민족이나 영토 개념은 상실된 지 오래죠. 대신 유사한 심리적 체험과 기억, 혹은 소망의 인자들끼리 뭉쳐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형태가 성행하고 있잖아요.
여자: 그런 일이라면, 당신보다 저분이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만 얘기하세요.
남자: 덕분에, 실제의 한 인간은 여러 국적의 소유자가 되는 경우가 대분 분이죠. 한 인간의 내면 속에 복잡한 심리적 인자들이 뒤엉켜 있는 것은....그것만은 예전과 별다르지 않기 때문예요. 아니, 오히려 한 인간의 성격을 특징 지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의 개별성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진 상태 아닙니까?
직원: 인간도 인간 나름이오. 당신처럼 혼란에 관해 생각하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신종 유행변이 돌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있소. 주로 마음이 허한 인간들에게 찾아드는 다중인격의 분열증세랄까. 이는 오래 전에 미치광이를 양산해냈던 정신분열증이 발전, 변형된 증세로 추측되는데, 육체적 요소의 혼합이나 부분 복제를 통해 그 치유가 기대되고 있소.
남자: 하지만 그런 식의 치유책은 더 심한 분열과 혼돈에 대한 위험 부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 아닌가요?
직원: 다시 말해 보겠소?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온 증세에 대해.
남자: (아까보다 힘없이)아무 것도 분명하지 않아요. 왜 내 몸이 이런지, 피가 거꾸로 흐르고 얼굴은 등 쪽으로 돌아가 붙어있는 것 같고....언젠가부터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요.
직원: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그렇게 느껴지는 게 정상상태요. 자, 보시오. 당신의 자각증세와는 상관없이 당신은 이렇게 건장한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잖소.
(무대 벽면이 커다란 거울이 남자의 몸체를 반사한다.)
남자: 그럴 리 없소. 아무리 뒤엎어진 세상이라지만 나는 나고 너는 너요. 내가 내 몸조차 내 것으로 못 느낀다면,그걸 어디 사는 거라 하겠소.
직원: 좀더 구체적인 검사가 필요하겠군. 당신 몸을 이루는 혈액과 뼈대, 손톱 끝 발톱 끈의 출처까지 분명히 확인 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아, 물론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오. 상세한 조사를 거친 후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는 결론만을 얻을 수도 있소. 하지만 운이 좋으면, 당신의 정신적 혼란을 치유할 수 있는 신체적 기능의 비밀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요.(직원, 나간다.)
여자: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어요. 난 당신을 고발하지 않았어요. 당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허락만 한다면, 당신이 검사를 받는 동안 저도 함께 있겠어요. 검사는 이미 시작된 것 같아요. 느끼시겠어요?
남자: 검사라니 대체 무슨 검사를....
여자: 별로 힘들진 않을 거래요. 과거를 투시하면서 그 시간대로 여행을 치르게 된다나요. 언젠가 저도 같은 검사를 받은 것 같지 않아요? 기억 안 나요?
남자: 내가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게 된 게 언제부턴데, 아직도 그런 걸 묻지?
(시무룩한 남자를 여자가 가만히 안아주는 동안 무대 한편에서, 내리닫이 긴 옷으로 몸을 감싼 두 여인이 물 위를 둥둥 떠가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젊은 여인1과 늙은 여인2는 소녀와 어머니 역의 배우가 겸한다.)
여자: 당신들이 아이의 여행을 돕게 되나요?
여인1: 당신도 함께 가야 돼요. 당신의 역할이 필요해요.
남자: 제 몸을 찾고 싶다는 바램으로 여기까지 몰려온 건가. 그 소망이 바람 되어 날 여기까지 날려보냈다.
여자: 제발 그렇게 이상한 말투로 말하지 말아요. 당신.
여인2: 나 또한 그 바람에 실려 여기까지 불려온 넋이지만, 몸 찾을 기미는 보이지 않아.
여인1: 저 건너 먼 땅에서 이곳 소문을 들었지요. 저 건너 땅에선 영혼을 조각조각 자르고 이어 붙여 괴상한 사람을 새로 낳고 길러요. 이리고 오면, 넋이 그대로 남은 채 몸만 가닥가닥 흩어진 이의 여한을 풀어준다기에....
여인2: 처음엔 저 건너 땅이 우리 소원 풀어줄 곳인 줄 알고...그나마 넋의 끄트머리가 붙어 있는 팔뚝 하나만으로 기어기어 들어갔는데...
여인1: 누가 자꾸 그러나 몰라? 저곳에선 또 다른 그곳이, 또 다른 그곳에선 이곳이 낙원일고....
남자: 그저 못 다한 목숨 꼴을 갖춰주는 땅이면, 어디라도 좋아요, 난...(점점 몽롱해지며) 누군가 꿈속에서 나를 이 세상 가까이 떠밀었던 것 같아요. 꿈속엔 더 먼 옛날이 펼쳐져 있는 듯했는데...
여인2: (여자 앞으로 나서며 속삭이듯) 당신 남편은 여행을 시작했어요. 당신도 잘 따라올 수 있겠어요? (여자가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후, 다시 남자에게 )당신을 이 세상 가까이 떠민 그 누군가의 모습을 알아 보겠어요?
남자: 난 꿈속의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해요.
여인1: 그럼 우리들의 모습을 빌어서 꿈속으로 깊이 들어가 봐요(주문처럼 반복한다.)바로 보지 못하는 사랑 사이에 전쟁의 예감이 있다.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랑 사이에 전쟁의 예감이 있다......
(남자와 여자, 여인1과 2에 의해 최면술에 걸린 듯 먼 옛날의 시간 속으로....) (여인1. 먼 옛날의 소녀가 된다. 과거의 소녀, 울기 시작한다. 울고 있는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신기한 듯 바라본다.)
3장 눈물에 대한 의문
남자: (순간적으로 과거에서 벗어난 듯, 감독 중인 인격관리국 직원에게)제게 무어지? 저 여자의 눈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저 물방울....
직원: 말 그대로 '눈물'이라 하오. 모르겠소? 기억 안 나요? 당신도 엄청나게 많은 눈물을 흘리고 삼키며 이 세상까지 살아남았을지 모르오.
남자: 하지만 난 저렇게 희한한 신체 현상을 구경조차 해본 기억이 없어요. 왜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저런 물을 눈 안에 감추고 있지 않은 거죠?
직원: 우리 사회는. 꼭 필요한 신체기능조차 최대한 경제적으로 간소화시켰다는 걸 아직 모르오?
남자: 하지만 저 눈에서 나는 '눈물'은 참 기능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걸요. 다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액체 같아요.
직원: 적어도 저 옛날의 눈물은 아무런 기능도 목적도 갖고 있지 못했소. 그저 얼굴 위에 무력하게 흘러내리다, 약간 짭짤한 맛을 남기며 말라붙었을 뿐. 게다가 그 감상주의는 어쩌구. 인류가 점점 눈물을 잃어버린 덕에 오늘의 왕국이 이나마 가능했던 거지.
남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물을 내 눈에서 흘러나오는 거요?
직원: 혹시 슬픔이란 감정을 아시오?
남자: 슬.....픔?
직원: 나 역시 그걸 실감할 순 없소. 다만 과거의 유물이 돈 감정 의한 종류로서 그 정보만을 갖추고 있을 뿐이지. 슬픔이란.....울고 싶어지도록 마음이 아픈 것. 지난 시대의 사전은 그렇게 밝혀놓고 있지.
남자: 울고 싶어지다니...운다는 게 무어요?
직원; 그게 곧 눈물을 흘린다는 거지. 눈물을 모르곤 슬픔도 알 수 없겠군. 좋소. 당신의 이전 생애 중 특히 당신의 눈물샘을 재생시킬 만한 것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이미 완전히 말라버린 그 샘이 다시 젖어들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래도 당신의 죄를 들추어내는 게 빠르겠지. 우연인지 몰라도. 그 순간의 안내자 역할로 나오는 이가 아마도 내 모습을 많이 닮았을 거요.
4장 철없는 순정
이 장면은 1장이 반복, 강화되는 부분이다.
소녀:(1장에서 혼잣말하던 첫머리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누군가를 기다리며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고 그러면서 스스로 모습에 빠져드는, 길고 조용한 몸짓이 이어지다가)오셨군요. 오실 줄 알았어요.
(사이. 어둠 속에 남자)
남자: 여기 올 맘이 ...아니었어.
소녀: 그래도 안 오실 수 있나요? 싸움터가 여기 인걸. 곧 싸움이 나려나 봐요. 사방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바람까지 험해요.
남자: (손길을 멈추며)바람?(사방을 둘러보며)고요한걸.
소녀: 밤새 소란스럽던 바람이 새벽녘에 멎는 걸보고, 당신이 오신 걸 알았죠. 언제나 그랬는걸요. 소문과 바람이 정신 없이 몰아치는 동안, 난 잠을 잃고 당신을 기다리죠. 그러다 어느 날 새벽인가 바람이 멎으면 거짓말처럼 당신이 오시는 거예요.
남자: 하지만 내가오면...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질 않나.
소녀: 괜찮아요. 전쟁 따위...무섭지 않아요. 평화로운 세상에 당신이 떠나있는 것보다, 전쟁 속에서 당신 곁에 있는게....훨씬 행복하니까요.
남자: 이번 소문은 어떤 것이었소.
소녀: 늘 똑같지요. 노장군의 군대가, 이번만은 만사를 젖혀놓고, 이 땅을 완전히 차지할 만한 무서운 전략으로 저 경계선을 넘어오리라는....날 노예로 삼은 이 땅의 젊은 장군. 바로 당신의 적장이 그 소문 앞에 가만있을 리없죠.
남자: 무슨 전조라도 있었소?
소녀: (수줍게 자기 손을 내민다.)
남자: (무심코 그 손을 보다가 놀라 달려들며 그 손을 부여잡는다.)
소녀: 당신은 내 상처를 보셔야만 절 안아 주시는군요. (남자, 소녀의 손을 놓고 외면한다)아니, 그나마도 가까이 다가오다 말뿐이지만.
남자: 대체 누구요? 누가 당신의 손가락들을....
소녀: 누구라니요 아무도 아니라니까요. 그저 제 몸이 한군데씩 사라져 간다니 까요. 이쪽 손가락이 모두 없어지고 말았으니, 요사이 큰 전쟁만 벌써 다섯 번을 넘겼다는....
남자: 믿을 수 없어. 넌, 네 몸을 스스로 상처 내고 있어, 왜 그런 짓을 하지? 네 그 이상한 짓 때문에, 멀리서도 내 꿈속에 역마살이 동하는 거야.
소녀: 그렇게 라도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면, 당신은 날 돌아보지 않으시잖아요.
남자: 전쟁의 예감 땜에 네가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 네 철없는 자해행위 땜에 전쟁이 일어나는 거잖아, 네가 그 이상한 자해행위로 꿈속에서 날 불러내지 않는다면 난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을 거고, 내가 여기 오지만 않으면... 전쟁은 멈출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녀: 그런 말 마요. 당신이 아니어도 전쟁은 나요. 사람들은 서로를 찢어놓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족속들이죠.
남자: 마치 지기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소녀: 모르는 일이죠. 내가 사람 몸을 뒤집어쓴 다른 족속인지.....
남자: (냉정하게)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네 말이 맞다면, 전열을 가다듬어야 하니까. 결국은 다시 똑같이....
소녀: 언제나 그렇듯이, 혼자 오지 않으셨나요?
남자: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담 넌 진짜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상한 족속인 거야? 난 언제나처럼, 네눈에 보이지 않는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왔어. 그들이 보이지 않나? 넌 도대체 뭐야?
소녀: 그럼 당신은요? 떠나 있어도 늘 눈에 사무치는 당신은, 사람인가요 귀신인가요?
남자: 그걸 누가 알겠나. 내가 진정 사람인지, 스스로 사람이라 믿고있는 귀신인지...
소녀: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전쟁은 왜 해요? 노장군이 당신 아버지라서? 단지 그 때문에?
(한바탕의 전쟁, 무대를 가로지른다. 표현방식은 자유로이 모색될 수 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의 소리 산발적으로 엇갈린다.)
소리1: 죽음이 끝나지 않는 날들-어둡고 긴-피의 강이 흐르는-꿈같은 전쟁의 날들....(말발굽소리)
소리2: 제발....목숨만....살려주세요.
소리3: 이만하면 이 난세에 오래 살았지. 죽이려면 얼른 죽이시오.
소리4: 웬일예요. 이게 ...왜 하필 우리 가족을....
소리5: 네놈이라고 늘 무사할 줄 아느냐...!
소리6: 죽여라. 죽여. 나 죽이고 니가 얼마나 잘 사는지. 내 저승에서 두고두고....
('살려주세요'하는 아우성이 반복되고 겹쳐지며 고조되는 가운데, 남자는 그 전쟁의 소리를 뱉어내는 사람들을 죽여나간다. 그러나 그 몸짓은 그들에게 괴롭게 대항하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말발굽 소리를 비롯한 전쟁의 소음이 차차 가라앉으며, 괴롭게 싸우던 남자의 몸짓도 진정되고, 바람 소리 일어다가 다시 사라져 간다.)
(그 아우성 말미에서, 직원 역의 배우는 과거의 사자가 되어 다시 등장.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에게 다가가)
사자: 누굴 찾는 거요. 달콤한 꿈이라도 꾼 거요? (남자를 끌고 걷기 시작하며)자, 당신 탓에 목숨 잃은 자들을 만나게 해주겠소. 그 원혼에 둘러싸여 요절하고 싶지 않으면, 고문의 명수이신 우리 장군님의 명령에 따르는 게 좋을걸.
(사자의 손짓에 따라, 조금전 전쟁의 소리와 몸짓을 보이던 배우들. 원혼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적장과 노장군의 모습도 여기 겹쳐 나타난다. 남자가 그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강력한 전쟁의 시청각적 이미지가 한번 더 무대를 휩쓸고 지난 후)
5장 고문, 피할수 없는 악역
(남자가 적장의 지휘 아래 고문 보조자로부터 고문을 받고 있다.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트는데, 적장은 조용히 폭시하고 있다. 그 곁에서 소녀가 표정 없이 적장의 수발들고 서 있다.)
적장 :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남자 : 내가...묻고 싶은...말...이군.
적장 : (다시 자극을 가하게 하며) 다시 이곳에 오면, 네가 살아 견딜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맛보게 해주겠다고, 내 분명 경고했을 텐데. 무적의 용사처럼 설치는 꼴이라니...
남자 : (소리없이 몸부림치다가, 자극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아직...견딜...만...해. 이게...살아서...겪는...최고의...고통은...아직...아닐...것...같군.
적장 : 물론 아니지. (사이) 근사한 걸 보여주지. 네 생애 최고의 고통을, 꼭 네 몸으로 겪으란 법은 없지. (사자, 노장군을 데리고 들어온다. 그는 오랜 고문에 시달린 듯 몸과 정신을 가누지 못한다. 남자, 뭐라 외마디 소리를 지를 듯하다가 삼킨다.) 오해하지 말게. 자네 약한 데를 건드리려는 의도도 있긴 있지만, 그게 전분 아니야. (노인에게 고문의 자극을 가하도록 사자에게 지시하며)난 이치가 정말 싫어. 정말 질긴 목숨이야. 내가 모시는 전쟁의 신으로부터, 이 늙은이 목숨만 일단 뺏으면 젊은 목숨 여럿 구할 거라는 신탁을 들었건만, 도통 목숨이 끊기질 않아. (사이) 이번엔 고문 방법을 좀 새로 개발했네. 이번에도 이 노인 목숨이 붙어 있으면, 또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네 생애 최고의 심적 고통을 선사할, 이 다음의 구경거리를....
남자 : 저분을 내세워 전쟁을 먼저 일으키는 건 너야. 저 노장군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은일 희생시킬 건지, 두고 보겠다 했지....
적장 : 아, 관둬. 난 회고담은 딱 질색야. 그냥 고통을 즐기기만 하면 돼. (노인의 뼈마디가 꺾이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남자, 눈을 감고 외면한다.) 끝내 (과장된 흉내로) '아버지이-!' 하고 울며 외치진 않는군. 독한 놈! 네 신파 연기를 구경할 때까진 난 이 짓을 그만두지 못하겠는데....
남자 : 내가 그렇게 비굴하게 구는 순간, 아버진 그 굴욕감 때문에 혀를 깨물고 마실걸.
소녀 : 제발.... 다들 그만 들... 그만 들.... (머리를 감싸쥔다)
적장 : 아하, 너 거기 계속 있었니...? (불같이 화난 듯) 넌 네 감정 보이지 말랬지?
소녀 : (갑자기 남자에게 매달리며) 당신이 빌면 되잖아요. 언제까지 이 짓을 밥복할 거예요? 언제 이 상황을 끝내죠? (다시 노인의 비명을 들으며) 저러다 돌아가시겠어요.
적장 : 그럼 이 상황이 끝나겠지. 주제넘은 년. (가벼이 주먹 한 대로 소녀를 쓰러뜨린다. 사이) 아버지를 살리겠다면, 곧 전방으로 길을 떠나게. 아직 여기는 싸움의 핵심이 아닐세.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일수록 당신 늙은 부친의 목숨은 더 길어지네. (남자의 눈길이 소녀에 머문 것을 보고) 아, 날 탓하진 말게. 나같은 악역 덕분에 누군가는 거룩한 희생제의를 치르게 될 테지. (소녀의 몸을 손끝으로 훑어 내린다) 이왕이면 나도 그런 약한 역을 맡아보고 싶다네. (드러눕힌 소녀를 아래위로 훑어 내리는 눈짓)네년이 내 아래서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틈만 나면 이쪽 땅을 휘돌면서 불쌍한 거지처럼 돌아다닌다는거 잘 알아. 네년이 그러고 돌아다닐 때마다(남자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저놈이 제 발로 적진에 기어드니, 그 짓도 내게 쓸모 있어 내버려두기는 한다만, 이년에게 무한정 자비로운 아비처럼 굴 순만은 없지. (적장, 음흉한 웃음과 함께 소녀를 겁탈한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일어나려 하나, 고문 보조자가 남자를 강하게 내리누른다)
6장 비밀의 열쇠는 눈물
(피범벅이 된 남자, 소녀의 마을 우울터에서 물을 길어 올려 자신의 몸에 들어부으나, 어떠한 물로도 피를 씻을 수없다. 소녀가 발을 절며 다가와, 남자의 몸을 쓰다듬으며 울기 시작 한다. 소녀의 눈물이 그 피를 씻는다.)
(물을 직접 무대에 동원하기 어려우면 은빛 긴 천이나 실타래 등을 물 대신 활용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피에 대해서도 동일한 재질의 물질을 사용할 수 있다.)
소녀 : 이대로는 안돼요. 이렇게 계속 전쟁을 허락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전쟁으로 죽고 말 거예요.
남자 : 넌 아직 모르는구나. 누군가 죽으면 또 누군가 태어나 그 빈자릴 메운다는걸.
소녀 : 그럼, 그걸 가르쳐주세요. 당신이 직접....(남자의 품으로 파고든다)
(남자, 잠시 멈칫하다 그 의미를 알아듣는다. 남자의 몸은, 아직 완전히 씻기지 않은 피와 소녀의 눈물로 젖어 있다.그 몸으로, 갑자기 격정에 휘말려 소녀를 껴안는다. 하지만 긴 포옹 후, 서로 떨어져 앉거나 서버리는 두 사람)
남자 : 넌 왜 아직도 울고 있니?
소녀 : 당신 몸에 묻은 피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까요. (다시 소녀의 눈물이 남자의 피를 씻는다.)
남자 : (소녀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다시 물으마....너는 ...누구니?
소녀 : 그 말씀을 또 꺼내시는 거 보니, 이번 만남을 거둘 때가 다 된 것 같군요.
남자 : 왜 네가 나의 편과 적을 오가며 싸움을 부추기고 혹은 스스로 제 몸을 상해도, 난 너를 첩자 따위로 의심하지 않는 걸까?
소녀 : 전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누구의 편도 아니고 누구만의 심부름꾼도 아니지요. 예감과 운명이 날 이끄는 대로 거기 끌려 다닐뿐. 내가 놓치지 않는 단 하나의 가늘고 긴 끈은, 당신을 향한 사랑의 끈뿐이에요
7장 피할 수 없는 운명
(다음 사자와 남자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소녀는 내내 무대 뒤쪽에 머문 채 남자의 피가 묻은 수건을 가만가만 헹구어내고 있다. 다음 대화를 엿 듣는 셈이다.)
남자 : 난 정말...모르겠소.... 당신네 장군은...대체 내게...뭘...원하는 거요.......
사자 : 역시 우리 장군님다운 생각이셔. 당신을 그냥 죽이고 마느니, 당신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잖소. 물론 당신은 당신편의 사람들까지 죽여나가도록 되어 있어.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끔 우리 장군님이 다 손을 써놓으셨을걸. 장군님이나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당신은 아마 지레 죽게 될 거요. 죽어가는 자들의 원한에다 그 죄책감은 또 오죽할까.... 물론 전쟁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장군님이 판단하실 때까지 그 계획은 천천히 실행될 거요. 그러니, 그리 미리 인상쓸 거 없소. 어찌 보면 그리 나쁜 일만도 아니잖소? 당신이 먼저 죽인 원혼들은 좋-아들 할거야. (사이) 피의 원수는 피로 갚는 다는 말 알지? 그 원혼들을 달래는 길은, 또 다른 목숨도 그 지경으로 만드는 길밖에 없지. 억울함을 골고루 나누는 거야.
남자 : (숨을 고르며) 그럼, 다시 그 새로운 원혼들의 한은 무엇으로 푼단 말이오? 또 더 많은 사람들의 피로...?
사자 : 단신 때문에, 죽은 몸조차 제대로 못 추스른 사람들이 많지. 누군가는 얼굴을, 누구는 팔 하나를, 혹은 아래위 몸뚱이가 뚝 잘린 채 몸통 한복판을 잃고 말았어.
남자 : 그게 왜 나 때문이오? 내 뜻이 아니었어. 난 한 번도, 기꺼운 마음으로 전쟁에 나선 적이 없소.
사자 : 당신 뜻이었든 아니든, 당신 손에 의해 저들 몸이 결단나고 저들 목숨이 끊겼어.
남자 :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늙은 아버지가 목숨을 잃게 되니.... 나의 전쟁은 늘 아버지 목숨을 걸고 벌인 도박이었어. 당신의 그 위대하신 장군, 고문의 명수께서 늘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날 끌어들였지.
사자 : 당신 아버지가 굳이 그 오래된 목숨 줄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뭔데?
남자 :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이라면 당신 아버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자 : 나같이 무사의 꼴을 갖추고 있으면, 꼭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적장을 찾아 나선 효자로 보이나보지? 난, 내 스스로 아비를 죽이고 새 아비를 찾아 나선 아들인걸. 지금 내게 아비는 저 위대하신 고문의 명수, 바로 당신을 괴롭히는 우리 장군님이야.
남자 : (기가 막힌 듯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후레자식 같으니라구....
사자 : (긴한 비밀을 알려주듯) 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당신이 여러 목숨 절단내기 전에, 대신 자기 목숨을 내주는 자가 있다면....어차피 우리 장군님의 세상은 피를 먹고 자라는 땅이니, 누구의 피든 많이만 빨아들인다면.... 더구나 제 뜻으로 죽은 한 사람의 피는, 죽임 당한 수백 명의 피 값을 대신하고도 남는다니 말야.(다시 긴한 비밀을 말해주듯)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도 살리고 당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있지. ( 사자, 남자에게 귓속말을 한다. 바람 소리와 말발굽 소리.)
남자 : 안 돼! 그럴 순 없어. (고개를 처박고 괴로워한다.)
사자 : 어떤 일에든 희생은 필요한 거지.
남자 : 그건, 그건.......
사자 : 일종의 모험이지.
남자 :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자기 몸을 스스로... 어떻게 토막낸단 말이오?
사자 : 그럴 용기만 있다면,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것만 기적이던가? 혼자 힘으론 완성해내기 어려운 죽음의 방식을 모두 함께 완성해낸다면 그 또한 기적이지. (사이) 하지만 지적을 꿈꾸던 자가 그 고통에 지쳐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머문다면, 결국 그 희생제의는 타살로 완성되겠지.
8장 집에 남은 여자
(집에 남은 여자의 봄꿈,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가 꽃잎이 되어 꿈에 나섰다.)
여자 : (자장가를 부른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자장자장 잘도 잔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노랫가락을 멈추고) 우리 아가 벌써 잠들었구나. (무대 가득 종이꽃이 떨어진다. 여자, 큰 꽃잎 하나를 손으로 들어 유심히 바라본다.)
여자 : (그 꽃을 향해) 어머니!
어머니 : (무대 뒤편에 꽃을 든 그림자로 나타나) 그래, 날 알아보는구나.
(대화는 여자가 꽃잎과 나누는 형태로 계속된다.)
여자 : 그냥 바람으로 날려 가시면 어쩌려구 이런 모습으로 오세요.
어머니 : 먼지로도 바람으로도 여러 번 왔었다. 이렇게 와도 날 알아보지 못하면 너랑 나랑 '엄마, 딸' 관두자 하려 했지. (여인, 꽃잎에 가만히 입맞춘다)
어머니 : 낭군이 곁에 없으니, 나한테 정분난 몸짓이로구나.
여자 : 어머니두. (입맞춤을 거둔다)
어머니 : 이렇게 네 손에 얹혀 한가로이 네 입술 끝이나 느끼다 가면 오죽 좋겠니.
여자 : 지천에 널린 게 꽃잎인데, 꽃구경에 노랫가락 흥얼거리기 전에, 짓밟혀 으깨진 꽃잎부터 눈에 어른대니.... 말씀 하세요. 좋은 소식일랑 꿈도 안 꿔요.
어머니 : 네 뱃속에 또 애 선다.
여자 : (대단치 않게) 그럼 지금 이게 태몽인가부네. 그게 뭐 대수여요. 하냥 이러고 늙는걸.
어머니 : 이번엔 달러. 그 목숨이 지 어미 목숨 잡아먹을 팔자야. 저도 제대로 태어나기나 할는지....
여자 : (심드렁하게) 어머니, 나 겁주는 솜씨가 전만 영 못해요. 불길한 말 듣고 내 가슴 벌렁거린게 어디 한두 번이예요. 허구헌 날 싸움터로 도는 지아비, 그래도 올 때마다 신통하게 씨는 떨구고 가지만, 그 태몽이 어디 온전하게 꿔지겠어요.
(전쟁의 소음, 말발굽 소리, 아기들의 울음소리, 마을 여인들, 우물가에서 두레박질하는 몸짓)
(여자, 손끝의 꽃잎을 떨구고... 종이 오린 형상의 아기들을 잠재우기 시작한다. 마을 여인들, 불안과 공포로 어쩔 줄몰라하기 시작한다. 평화롭게 아이들을 잠재우는 여자를 마을 여인들이 주시한다.)
여자 : (종이인형들과 같은 아이들을 다독아며) 왜들, 왜들 이러나... 얘들아... (자장가) 잠 속에 죽음이 쳐들어와도/얘들아 놀라지마 엄마 곁이니/ 꿈속에 몹쓸 꿈이 똬리 틀어도/ 얘들아 안심해라 꿈 밖에 엄마 있다/ 자장 자장 잠속의 잠, 잠 속의 잠,자장 자장 꿈 속의 꿈, 꿈속의 꿈...(여자를 보며 마을여인들 웅성거린다)
마을여인1 : 저 여자야. 우리 마을의 행운을 잡아 먹는 자.
마을여인3 : 증거가 있나?
마을여인2 : 하긴 저 여자가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이곳엔 한번도 환한 햇살이 들지 않아. 사내들은 자주 전쟁터로 불려나가고, 전염병도 돌지 않는데 아기들은 자주 죽어나가지.
마을여인3 : 그거야 오래 전부터 그랬지. 저 여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래온 지 오랜걸. 우리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듣던 옛이야기가, 내가 나중에 자라면서 만날 세상이야기 였다니까.
마을여인1 : (악의에 차서) 저걸 봐. 울어대던 아이들을 감쪽같이 잠재우는 저 솜씨를.
마을여인3 : 그게 왜? 아주 솜씨 좋은 엄마의 노릇이 아닌가?
마을여인1 : 저건 죽음의 사자나 발휘할 수 있는 놀라운 솜씨야. 정말 쥐죽은듯이 아가들을 잠재우잖나.
마을여인2 : 저렇게 깊은 잠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날 정말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지게 될지도 몰라.
마을여인3 : 아가들이야 많이 잘수록 좋지. 잠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구...
마을여인1 : (냉소적으로)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었나? 저 여자의 아가들은 자라질 않아.
(다른 여인들 그제야 섬짓하다)
여자 : (자장가의 끝 구절) 자라다 마는 몸 두려워 마라/ 어느 날 눈뜨면 쑥 자라 있으리/ 꿈속에 천리 벼랑 앞을 막거든/ 울지 말고 웃으며 뛰어내려라/ 꿈속에 깊이깊이 떨어져 내리면/ 꿈 밖에서 무럭무럭 자라 있으리.
(이번에는 나뭇잎 하나, 여자의 꿈으로 찾아든다.)
여자 : (손끝의 나뭇잎 향해) 왜 또 오셨소, 어머니?
어머니 : (무대에 모습을 보이며) 곧 젊은 처녀 하나가 찾아와 네게 기이한 부탁을 할 것이다. 절대 그 부탁을 들어 주지 말아라.
여자 : 무슨 부탁인데요?
어머니 : 내 입에 올리기도 무섭구나. 네 뱃속의 새 목숨을 생각해서라도, 행여 그 부탁에 마음 약해지지 않게 조심 해야 한다.
여자 : 어머니답지 않네요.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깨우쳐주는 일은 늘 시원시원 막힘이 없었는데....
어머니 : 네 낭군 생각에 마음 무르게 먹지 말거라. 이건 내 부탁이다. 그 처녀의 부탁과 이 어미의 부탁 중 어느 쪽에 귀기울여야 할지는 네 몸의 핏줄이 알 것이다.
여자 : (바람에 불려 가는 나뭇잎을 향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를 외쳐 부른다. 여자는 꿈에서 깨어나는 몸짓)
제9장 흩어지는몸, 부딪치는 말(言) -未命鬼의 제의
(여자 앞에는, 어느새 소녀가 다가와 서 있다. 먼 길 서둘러 왔는지, 소녀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소녀의 품안에먼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여자와 소녀. 잠시 조용히 서로를 응시한다.)
소녀: 아주머니,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여자: 그 사이 많이 여윈 듯하긴 해도, 누군지 알겠어요. 전에도 꼭 이렇게 헐레벌떡 찾아든 일이 있었죠..... 그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소녀: (무릎을 꿇으며) 용서하세요. 그분께 대한 제 사랑을 허락하시면서. 아주머니께선 오직 그 분의 안전만을 지켜 달라 하셨는데....
여자: 그분이 위험에 빠졌군요.
소녀: 다 제 탓이에요. 제가 너무 빨리 그분을 전쟁터로 불러냈어요.
여자: 이미 글러버린 일은 듣고 싶지 않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소녀: 피가 필요해요.
여자: 피?
소녀: 다른 사람 칼에 어쩔 수 없이 흘리게 된 피말고. 자기 스스로 제 마음이 넘쳐 피로 흘려내는. 그런 피가 필요해요. 적장은 이번에도 그런 피를 기꺼이 흘릴 사람이 없으리라 믿고. 그분과 그분의 늙은 아버지를 조롱하 듯 이 조건을 내세운 거죠. 이 피의 제의가 성사되면, 적장과 그분, 그분의 부친인 노장군이 얽혀 있는 이 전쟁의 악순환만은 끊길 수 있을 꺼 예요.
여자: 난, 그분의 아내이기도 하지만. 그분과 함께 이 세상에 내놓은 아이들의 어미이기도 해요. 지금 내 뱃속에도....(사이) 난 애들의 어미여서. 내 목숨을 내 마음대로 어쩔 수 없는 처지랍니다
소녀: 저 혼자 피를 흘려 될 일이라면 저도 아주머니께까지 이런 부탁을 드리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 분을 위해 스스로 피 흘릴 자로서 전 떳떳한 자격이 없어요. 제가 바다를 메울 만큼 피를 흘려도 아주머니의 피 한방 울만 못하지요. 제 마음과 상관없이 전 어차피 잃을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것 이어서 온정신을 다해 피를 흘려도 소용없지요.
여자: (긴 침묵) 어떻게 하면 되나요? 어떻게 기꺼이 피를 흘리죠?
소녀: 단 하나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 예감에 도박을 걸어 보실 수는 있을거예요. 전 얼마 전부터 몸뚱이 이곳저곳의 살들을 잃어 가고 있어요. 바람소리만으로 미래를 점치는 힘은 내 스스로도 누를 수 없을 만큼 커져가고 있구요. 며칠 전 그분의 적장에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강간을 당했으나... 내 처녀막은 아직 망가지지 않았지요. 왠일인지 그때마다 번번히 한바가지 씩 피를 쏫아내는데도 한바탕의 악몽이 지나간 후면 난 내 처녀성이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거든요. 누군가가 나를 그보다 더 강하게 겁탈하면 난 또 그 누군가 앞에 칼에 찔린듯 피를 쏟아낼지 모르죠.
여자: 그래서요...?
소녀: 우리 서로의 몸을 찢어 내리면서 서로의 피를 섞도록 해요.(여자의 놀람을 담은 침묵) 전쟁을 멎게 하려는 마음만 진실하다면 서로의 몸을 상처내면서 온갖 증오의 불길을 되살려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적장이 저를 겁탈하듯... 그렇게 제 몸을 찢으셔도 좋아요.
여자: 당신은 아직 절 모르는군요. 내 마음속엔 어떤 미움의 불씨도 없어요.(여자는 소녀를 애무하듯 쓰다듬기 시작한다. 소녀 역시 여자를 매만진다.)
소녀: 이건 황당한 예감이지만 내 몸 안에 기적의 씨가 자라고 있는 것만 같아요.어쩜 그 작은 씨 때문에... 우린 그 분을 살려낼 만큼의 피를 흘려내고도 되살아날 수 있을지 몰라요.
여자: 부활...?
(여자와 소녀 애무하듯 부드럽게 서로의 뺨으로부터 서로의 어깨, 몸뚱이를 쓰다듬어 내리다가 점점 거칠어지는 격정 속에서 서로의 육체를 토막내기 시작한다. 이 장면의 시각적 표현방식은 다양하게 모색 될 수 있다. 일종의 제의가 이어지면서 다음의 노래가 불린다. 여자와 소녀 여자가 재우던 아이들의 형상을 이리저리 옮기며)
여자: 시집 장가 못 가고 이승을 뜨니/ 저승으로 가는 길이 천리길이라/시집 장가가고도 젊어 눈감으니/ 저승으로 가는 길이 만리길이라
소녀: 죄 없이 억울하게 세상 등지니/ 이승에 놓인 발이 떼지지 않네 물에 잠기고 불에 휩싸여 명을 놓치니/ 산목숨도 아니나 죽은목숨도 아니어라.
여자: 꿈속에 들어앉아 또 꿈을 꾸네/ 한세월 죽은 꿈이 아니면/ 내 어찌 내 죽음을 들여다보리
소녀: 꿈밖에 나서서 또 꿈을 꾸네/ 한낮의 단잠 속 꿈이 아니면/ 내 어찌 죽음을 서둘렀을까
여자와 소녀: (겹쳐 부른다)꿈속의 꿈(꿈 밖의 꿈)/ 겹겹산중(산 넘어 산)/ 꿈이 눈을 가려(눈물로 꿈을 지워)/ 님과 이별하고도(님의 사랑 품고도)/ 님의 모습 본다네(님의 모습 못 보네)
(아가의 형상들을 옮기던 소녀 여자를 무대 뒤편으로 이끌고 간다)
어머니: (꽃도 잎도 아닌 제 몸으로 꿈밖에 뛰쳐나와)아가야, 얘야... 그만, 그만 두지 못하겠니... 저 소녀를 믿지 말아라. 저 앤 제 자신이 악마인지도 모르는 악마이니라. 저 애의 천성은 선하나 그 마음이 악마의 아가리 속에 먹힌지 오래야.
(어머니의 절규 속에 또 한 노인이 다가온다. 남자의 아비인 노장군이다. 세속으로 보면 사돈 관계인 이 두 노인은 은 여자와 늙은 여자의 대표적 존재인양 잠시 노려보며 마주 서 있다.)
어머니: 저 여리고 어여쁜 악마가 당신의 흘러 나왔단 걸 난 알아.
노장군: (이후 노장군의 말소리는 모두 지쳐있으면서도 포기 할 수 없는 권위에 힘입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그 소녀는 내 아들의 두 번째 여인이... 아닌가.
어머니: 그런 실제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오. 저 어린 악마가 신통력을 부려 내 사위의 넋을 빼놓는게 꼭 당신이 부질 없는 고집 부려 내 사위 넋을 빼놓는 것과 닮았다는 것이지.
노장군: 난 저 소녀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어. 말 그대로 저 아이가 내 혈통에서 흘러나온 딸이나 손녀쯤은 된데도 난 모르는 바요.
어머니: 당신이 제대로 아는 게 무엇있소?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또 뭐가 있고? 왜 당신은 적 앞에 항복할 줄 모르는 거요? 이길수 없는 싸움인데도 잔혹한 고문만 미련하게 견디어 내면 다 위대한 영웅이랍디까?
노장군: 늙은 여인이여... 당신은 내게 그따위로 말할 자격이 없어. 그래 나는 승리할 힘을 잃어버린지는 오래요. 그래 난 여전히 장군이고 내 아들의 무고한 용기를 걸고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목숨이요. 하지만 당신은 무어지? 내 며느리를 비롯해 여러 목숨 이 세상에 떨궈논 공이야 모르지않지만... 오직 그것뿐이잖소. 그나 마 늦게까지 그들을 거두지 못한체 젊어 제대로 자기 몸을 간수하지 못한채 일찌거니 세상 떠 오직 자식들 의 꿈속이나 떠돌뿐 아니오 딸의 태몽속에 들어가 아무리 많은 새 목숨을 점지한들 이미 태어나 싸우며 부대끼는 젊은이들만큼 그 새목숨이 중할까?
어머니: 기껏 새 목숨 점지해놓으면 부질없이 그 목숨 끈어놓은게 누군데?그게 바로 당신같은 이들이 허구헌날 저질러온 죄업이오. 그래놓고 또 새목숨을 허겁지겁 바라는 이들도 바로 당신들같은...
노장군: 그건 당신같은 어미들의 오해요. 아비들이 자식을 바라는거야 순리지만...정작 그 자식을 낳기를 원하는건 어미들이지. 내게 잔혹한 고문을 견뎌내는 미련한 의지라 했소? 말이야말로 세상의 수많은 어미들한테 고스란히 돌려줄수 있을듯한데... 나같으면 믿음직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자식이 아닌바에야 그렇게 무조건 힘들여 낳지는 않을걸세... 미래의 장군감이 아닌바에야 낳아 무엇하나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일찍 저버릴 시들하고 약한 목숨까지 기를 쓰고 세상에 내어놓는 고집이라니... 세상에 어떤 미련한 사내도 그만큼 미련한 노릇은 흉내조차 못낼걸세...
어머니: 내가 어린것들을 일찍 잃은 것은 모두 전쟁통에 내 젖이 마르고 집안에 곡기가 끊겨서였어. 당신의 손자 중 먼저 간 목숨도 모두다 비슷한 이유로...
노장군: 구질구질한 소리는 질색이오. 이런 얘기나 지껄이자고 예까지 도망쳐온 게 아닌걸. 며느리와 저 아이가 지금 내 아들의 목숨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소? 저 애들이 피를 충분히 흘리지 않으면. 이 도박을 내건 적장은 다시 나와 내 아들의 피를 마저 요구할 거요. (긴 말이 힘겨웠는지 힘없이 주저앉는다.)
(두 노인의 긴 말싸움에 이어, 여자와 소녀의 모습이 다시 보인다. 소녀, 품안에 숨겨왔던 칼로 여자를 찌른다., 여자가 쓰러진 후, 소녀는 여자의 아가들을 나타내는 형상들도 찢어 나간다. 그 조각들을 흩뿌린 후, 소녀는 자신 역시 칼로 찌른다.)
10장 미래에서 벌어진 누물의 씻김굿
(남자와 담당지원, 미래의 공간으로 다시 들어서며)
남자: 지금 그게 나한테 벌어졌던 일일까요?
직원: 저 남자가 당신이라 해도. 당신에겐 특별히 벌어진 일도 없잖소. 제 몸을 산산히 부순 건 당신이 아닌데?
남자: (털썩 주저앉으며) 하지만 저 모든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내가, 지금도 계속 울고 있지 않나요?
직원: 당신이 지금 울고 있다고 그렇게 느껴지나?
남자: 그럼,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와서까지, 내 스스로를 분간할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진건. 저 세월 속에서 내가 흘려야할 눈물을 제대로 다 흘리지 못한 탓이 아닐까요?
작원: (사이) 감정적이군.
(직원은, 무대 한쪽에 숨어있듯 서있던 한 보조자에게 간단한 신호를 보낸다. 그 침묵의 보조자에게 간단한 신호를 보낸다. 그 침묵의 보조자는 앞서 과거의 고문 장면에서 적장의 지휘에 따라 고문을 실행하던 그 배우가 겸한다. 직원의 신호는 남자에 대한 일종의 치명적 판결과 같은 행위이나.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다)...눈물의 씻김굿이라도 필요할까?
남자: 눈물의 씻김굿...? 그게 무슨...?
직원: 당신처럼 우매한 회한을 처리하지 못하는 동지들을 위해. 우리 인격관리국의 총책임자께서 직접 아이디어를 제공하신 일이지. 아까 당신이 묻지 않았소? 왜 현재 우리에겐 눈에서 물이 흘러 나오는 기능이 멈추었냐고. 그 멈춰진 기능을 인공적으로 대체시키는 기계가 있소. 당신과 같이 그 기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특별히 해당 시간만큼 그 기계를 작동시키지. 당신이 겪는 지금의 혼란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기계의 효력이 가장 필요한 것 같소, 이젠 당신에게 내리는 내 처방이오.
남자: 처음 들어보는 소리요. 그런 기계가 있다는 건.
직원: 이곳에선 아무 정보나 불필요하게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나?
남자: 그 기계는 어떻게 작동되는 거지요...?
(눈물 기계가 어떻게 작용되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가상의 수조를 나타내는 조명이 무대 위로 쏟아진다. 직원과 보조자가 양편에 버티고 선 가운데. 남자는 반쯤은 눈물 기계에 대한 이끌림으로, 가상의 수조 안에 들어선다. 남자는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는다. 굉임과 물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직원: (그 외의 배우들과 더불어) 씻김의 시간은 무제한. 씻김의 시간은 무제한../ 눈물과 똑같은 형태로 특수 제조된 인 액체에 의해/ 곧 온몸에 바늘이 돋아나기 시작해 그 바늘이 몸 속으로 파고들 터.../ 이는 비밀리에 집행 되는 사형 임/ 사형집행 사유. 당국의 이성적 질서 유지에 위배되는 감정의 교란상태에 대한 처벌/ 당국의 이성적 질서 유지에 위배 되는 감정의 교란상태에 대한...
(직원의 소리. 잡음에 의해 흐려져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책임자와 직원간의 짧은 대화가 소리로만 전해진다. 직원이 과거 사자 역할을 겸하듯. 여기서 들리는 인격관리국 책임자의 목소리는 과거 적장의 목소리와 같다.)
책임자(소리): 수고했다. 요즘 부쩍 감정과다징후를 보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직원(소리):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징후가 전염병의 위력을 본격적으로 떨치기 전에, 저희 담당국이 해당자와 일대 일로 만나 그 병의 뿌리를 뽑아놓을 테니까요.
책임자(소리): 조심해라. 네 게도 감정과다 증세를 앓고 있는 환자의 역한 냄새가 옮겨붙은 것 같다.
11장 미래를 들여다보는 과거
(소녀와 여자. 찢겨진 몸을 나타내는 누더기 같은 의상을 걸치고, 이번에는 과거의 자리에서 미래의 세계를 건너다본다.)
여자: 우린 지금. 긴 한 세상을 건너뛰어 너무 먼 곳을 보고 있어요. 우리의 더 가까운 다음 생애를 보고싶어요.
소녀: 그이가 완전히 물에 잠기면. 곧 우리 곁으로 건너올 거예요. 그와 함께 더 가까운 다음 생애를 들여다보기로 해요.
여자: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만 둘래요. 더 먼 세상이 저렇다면. 가까운 다음 생애애도 별 다른 희망은 없을 것 같아. 아이들을 놔둔 채. 내 몸 내가 찢어 죽은 마당에, 무슨 낙이 있어 내일을 꿈꾸겠어요. ... 고단해요. 난 그만... (여자. 그 자리에 눕는다. 소녀 혼자. 겹겹의 미래 중 가까운 곳을 바라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소녀: (혼잣말)...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저 세상이 바로 다음 세상일가요? 모르겠어요. 낯선 옷을 입은 저와 그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해요... 아주머니의 모습도요...
12장 그 사이의 생애
(남자는 가상의 수조 안에 여전히 갇혀 있으나. 다음 대사를 읊조리는 동안 그는 그 어느 생애에도 속해 있지 않는넋과 같은 상태이다.)
남자: 한해 두해 늙어갈수록, 내가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하나하나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이 내 늙은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나는 노후에, 전쟁터도 아닌 곳에서 내 가까운 사람 하나를 죽인 듯한 악몽에 매일 밤 시달렸다. 그렇게 혼미한 채로도 나가 싸우다. 늙은 나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내가 누굴 죽였는지 몰랐듯, 내가 죽은 이유도 모른 채 구천을 떠돌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다시 그 전쟁터였다. 그렇케 몇 겹의 생애가 하루처럼 흘렀다.
13장 뒷모습
(여자와 남자 무대 좌우에 각각 자리잡고 있다.)
여자: (남자의 여장을 챙기며)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난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만나 아홉 아이를 낳았고, 그 중 두 아이를 잃었지요, 그와 지낸 세월동안 제 배는 쉴새없이 불렀다 꺼졌다 불렀다 꺼졌다 ... 그러니 한 십여년 세월 되나요. 짧지 않은 세월 몸 섞고 살았는데. 얼굴을 못 보다니요.
남자: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녀의 몸을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녀와의 사이에 일곱 아이를 두었지만. 그 아이들이 정말 내 몸을 받고 그녀 몸을 빌어 태어났는지. 거짓말 같습니다.
여자: 하긴 따로따로 지낸 날이 더 많지요. 부풀렀던 배의 바람을 빼고 하나 더 늘어난 아이를 추스를 때쯤이면, 그가 돌아오곤 했어요. 어느 땐 꽤 길게 머물다 가곤 했지만. 어떤 땐 그렇게 또 잠깐 와서 내 배에 다시 바람을 불어넣어 놓고 그 바람이 꺼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으니...(그녀는 챙긴 짐을 남자에게 내놓는다. 남자를 향해) 여기 걱정은 마세요. 언제 오셔도 그대로일 테니....(고개 숙여 눈물 훔치는 것만 같다.)
남자: (여자의 뒷모습 바라보며. 떠나려는 몸짓으로) 내가 떠날 때마다 그녀는 늘 뒤돌아 서있었지요. 난, 나를 떠나 보내는 그녀의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어쩌다 돌아올 때도 그녀는 꼭 그렇게 뒤돌아 선 채 나를 맞았지요. 처음에 난. 그녀가 화가 나서 내 모습조차 보려 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그저 눈물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는데.... (여자를 향해) 이번엔 쫌 길어질 것 같소. 너무 기다리지 말아요. (여자가 건네준 짐을 멘다)
여자: (종이 모형들에게) 얘들아, 아빠 또 떠나신다. 그만들 일어나.(그들을 한 줄에 꿰어 목에 두르고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며) 벌써... (남자를 찾아 무대를 휘돌다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힘없이 선다.)
(여자와 남자. 다음을 노래하듯 읊조린다.)
여자: 꿈속에 들어앉아/ 떠 꿈을 꾸네/
남자: 꿈 밖에 나서서/ 또 꿈을 꾼다./
여자: 한세월 사랑이/ 꿈이 아니면/ 내 어찌 그님의/ 얼굴 모르리/
남자: 한세월 인연이/ 꿈이 아니면/ 내 어찌 그 녀의 / 몸을 모를까/
여자: 꿈속의 꿈/ 겹겹산중/
남자: 꿈 밖의 꿈/ 겹겹산중/
여자: 꿈이 님의 모습 가려/
남자: 꿈이 님의 몸을 감싸/
여자: 님의 몸을 알고도/ 님의 모습 모르네.
남자: 님의 표정 못 본 채/ 님의 몸에 손닿지 않네.
(바람 소리 들려오고, 여자와 남자 각각 상대방을 향해 뒤돌아보나. 서로의 시선 만나지 못한다.)
-끝-
정우숙 作
나오는 사람들 : 남자, 여자, 소녀(여인1겸함), 어머니(여자의 친정 어머니, 여인2겸함), 노장군(남자의 늙은 아버지), 적장(인격관리국 책임자의 목소리를 겸함), 직원(인격관리국의 직원, 과거의 사자를 겸함), 고문보조자(미래의 사형집행보조자를 겸함), 마을여인들, 여자의 아이들(실제 등장 않고 종이인형 등으로 처리), 그 외 전쟁의 소리들
무대는 전체적으로 검정 색조로 죽음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 작품에서 미래와 과거로의 사간 이동은 마치 극중 극의 형태와 같은 겹구조를 연상시킬 수 있다. 배우들의 무대에 자리하는 태도나 배열 형태 등에 따라 사이코 드라마와 같은 분위기가 강조될 수도 있다.
무대 중앙에 남자, 그 뒤에 배우들, 남자의 눈이 가려져 있다.
1장 희미한 사랑의 기억
(이 첫 장면은 이후 4장에서 반복될 것이므로 다음 내용 중 일부를 생략하면서 불투명한 예시와 같은 분위기를 강조할 수 있다.)
소녀: (혼잣말)오셨군요. 오실 줄 알았어요...그래도 안 오실 수 있나요? 싸움터가 여기인걸. 곧 또 싸움이 나려나 봐요. 사방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바람까지 험해요. 밤새 소란스럽던 바람이 새벽녘에 멎는 걸보고, 당신이 오신 걸 알았죠. 언제나 그랬는걸요(사이)
(어둠 속의 남자)
남자: 여기 올 맘이 ...아니었어.
소녀: 그래도 안 오실 수 있나요? 싸움터가 여기 인걸. 곧 싸움이 나려나 봐요. 사방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바람까지 험해요.
남자: .....바람?(사방을 둘러보며)고요한걸.
소녀: 밤새 소란스럽던 바람이 새벽녘에 멎는 걸보고, 당신이 오신 걸 알았죠. 언제나 그랬는걸요. 소문과 바람이 정신 없이 몰아치는 동안, 난 잠을 잃고 당신을 기다리죠. 그러다 어느 날 새벽인가 바람이 멎으면 거짓말처럼당신이 오시는 거예요.
남자: 하지만 내가오면...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질 않나.
소녀: (달려들어 안기며)괜찮아요. 전쟁 따위...무섭지 않아요. 평화로운 세상에 당신이 떠나있는 것보다, 전쟁 속에서당신 곁에 있는 게....훨씬 행복하니까요.
남자: (소녀를 뿌리치며)이번 소문은 어떤 것이었소.
소녀: 늘 똑같지요. 노장군의 군대가, 이번만은 만사를 젖혀놓고, 이 땅을 완전히 차지할 만한 무서운 전략으로 저경계선을 넘어오리라는....날 노예로 삼은 이 땅의 젊은 장군. 바로 당신의 적장이 그 소문 앞에 가만있을 리없죠.
남자: 무슨 전조라도 있었소?
소녀: (수줍게 자기 손을 내민다.)
남자: (무심코 그 손을 보다가 놀라 달려들며 그 손을 부여잡는다.)
소녀: 당신은 내 상처를 보셔야만 절 안아 주시는군요. (남자, 소녀의 손을 놓고 외면한다) 아니, 그나마도 가까이 다가오다 말뿐이지만.
남자: 대체 누구요? 누가 당신의 손가락들을....
소녀: 누구라니요 아무도 아니라니까요. 그저 제 몸이 한군데씩 사라져 간다니 까요. 이쪽 손가락이 모두 없어지고말았으니, 요사이 큰 전쟁만 벌써 다섯 번을 넘겼다는....
남자: 믿을 수 없어. 넌, 네 몸을 스스로 상처 내고 있어, 왜 그런 짓을 하지? 네 그 이상한 짓 때문에, 멀리서도 내 꿈속에 역마살이 동하는 거야.
소녀: 그렇게 라도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면, 당신은 날 돌아보지 않으시잖아요.
남자: 전쟁의 예감 땜에 네가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 네 철없는 자해행위 땜에 전쟁이 일어나는 거잖아, 네가 그 이상한 자해행위로 꿈속에서 날 불러내지 않는다면 난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을 거고, 내가 여기 오지만 않으면... 전쟁은 멈출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녀: 그런 말 마요. 당신이 아니어도 전쟁은 나요. 사람들은 서로를 찢어놓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족속들이죠.
남자: 마치 지기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소녀: 모르는 일이죠. 내가 사람 몸을 뒤집어쓴 다른 족속인지.....
남자: (냉정하게)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네 말이 맞다면, 전열을 가다듬어야 하니까. 결국은 다시 똑같이....
소녀: 언제나 그렇듯이, 혼자 오지 않으셨나요?
남자: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담 넌 진짜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상한 족속인 거야? 난 언제나처럼, 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왔어. 그들이 보이지 않나? 넌 도대체 뭐야?
소녀: 그럼 당신은요? 떠나 있어도 늘 눈에 사무치는 당신은, 사람인가요 귀신인가요?
남자: 그걸 누가 알겠나. 내가 진정 사람인지, 스스로 사람이라 믿고있는 귀신인지...
소녀: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전쟁은 왜 해요? 노장군이 당신 아버지라서? 단지 그 때문에?
(한바탕의 전쟁, 무대를 가로지른다. 표현방식은 자유로이 모색될 수 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의 소리 산발적으로 엇갈린다.)
소리1: 죽음이 끝나지 않는 날들-어둡고 긴-피의 강이 흐르는-꿈같은 전쟁의 날들....
소리2: 제발....목숨만....살려주세요.
소리3: 이만하면 이 난세에 오래 살았지. 죽이려면 얼른 죽이시오.
소리4: 웬일예요. 이게 ...왜 하필 우리 가족을....
소리5: 네놈이라고 늘 무사할 줄 아느냐...!
소리6: 죽여라. 죽여. 나 죽이고 니가 얼마나 잘 사는지. 내 저승에서 두고두고...
(그 아우성의 말미에서, 괴로워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2장 미래에 서서
(복잡하게 가시화될 필요는 없으나 미래를 나타내는 무대공간이 펼쳐진다. 남자를 지켜보던 직원의 신호에 의해 불켜지고, 남자는 불안한 듯 떨고 있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듯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낮게 중얼거리고 있다.그에게 죄수복과 같은 자루 옷이 입혀진다. 여자 역시 불안하게 남자 곁에 서 있다. 인격관리국 직원은, 나중에 과거
의 사자역할을 겸하게 된다.)
직원: 자,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무슨 문제로 여기까지 오셨죠?
남자: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 이리로 오게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최근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있긴 하지만,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여자: 저이는 내가 자신을 이곳에 고발했다고 짐작하고 있죠.
남자: 그야말로 저 여자의 짐작입니다. 난 누가 날 감시하고 고발하고 심문하는가, 그런 데 대해선 큰 관심이 없어요. 지금이 언제인가, 난 어디 있는가, 이런 것들을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한데....
여자: 저이는 역사와 철학이라는, 지금은 사멸한, 학문이 아닌 학문의 뒤꽁무니를 쫓느라 병에 걸린 겁니다.
직원: 지금은 21세기도 저물어가기 시작한 때요. 연대와 날짜에 대한 개념이 뭉개어진 채 저마다 주관적인 시간대 속에서 살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요? 원하는 대로 더 먼 미래로 나아갈 수도, 묻혀진 과거 속의 어느 한순간에 머물러 살수도 있소. 물론 그 주관적 시간대의 자유로운 조합과 변형 또한 가능하지.
남자: 가상체험의 무한 자유를 보장하는 그 같은 시간 개념은, 그러나 예상했던 만큼의 행복 대신 혼란스런 고통의 양을 늘려놓지 않았나요?
여자: 아무 이유 없이도 고통을 느끼는 게 저 사람의 이상한 증세죠.
남자: 엉켜버린 시간만큼이나 불분명해진 공간 개념 속에서 가상의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어요. 역사 속의 민족이나 영토 개념은 상실된 지 오래죠. 대신 유사한 심리적 체험과 기억, 혹은 소망의 인자들끼리 뭉쳐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형태가 성행하고 있잖아요.
여자: 그런 일이라면, 당신보다 저분이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만 얘기하세요.
남자: 덕분에, 실제의 한 인간은 여러 국적의 소유자가 되는 경우가 대분 분이죠. 한 인간의 내면 속에 복잡한 심리적 인자들이 뒤엉켜 있는 것은....그것만은 예전과 별다르지 않기 때문예요. 아니, 오히려 한 인간의 성격을 특징 지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의 개별성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진 상태 아닙니까?
직원: 인간도 인간 나름이오. 당신처럼 혼란에 관해 생각하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신종 유행변이 돌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있소. 주로 마음이 허한 인간들에게 찾아드는 다중인격의 분열증세랄까. 이는 오래 전에 미치광이를 양산해냈던 정신분열증이 발전, 변형된 증세로 추측되는데, 육체적 요소의 혼합이나 부분 복제를 통해 그 치유가 기대되고 있소.
남자: 하지만 그런 식의 치유책은 더 심한 분열과 혼돈에 대한 위험 부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 아닌가요?
직원: 다시 말해 보겠소?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온 증세에 대해.
남자: (아까보다 힘없이)아무 것도 분명하지 않아요. 왜 내 몸이 이런지, 피가 거꾸로 흐르고 얼굴은 등 쪽으로 돌아가 붙어있는 것 같고....언젠가부터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요.
직원: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그렇게 느껴지는 게 정상상태요. 자, 보시오. 당신의 자각증세와는 상관없이 당신은 이렇게 건장한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잖소.
(무대 벽면이 커다란 거울이 남자의 몸체를 반사한다.)
남자: 그럴 리 없소. 아무리 뒤엎어진 세상이라지만 나는 나고 너는 너요. 내가 내 몸조차 내 것으로 못 느낀다면,그걸 어디 사는 거라 하겠소.
직원: 좀더 구체적인 검사가 필요하겠군. 당신 몸을 이루는 혈액과 뼈대, 손톱 끝 발톱 끈의 출처까지 분명히 확인 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아, 물론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오. 상세한 조사를 거친 후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는 결론만을 얻을 수도 있소. 하지만 운이 좋으면, 당신의 정신적 혼란을 치유할 수 있는 신체적 기능의 비밀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요.(직원, 나간다.)
여자: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어요. 난 당신을 고발하지 않았어요. 당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허락만 한다면, 당신이 검사를 받는 동안 저도 함께 있겠어요. 검사는 이미 시작된 것 같아요. 느끼시겠어요?
남자: 검사라니 대체 무슨 검사를....
여자: 별로 힘들진 않을 거래요. 과거를 투시하면서 그 시간대로 여행을 치르게 된다나요. 언젠가 저도 같은 검사를 받은 것 같지 않아요? 기억 안 나요?
남자: 내가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게 된 게 언제부턴데, 아직도 그런 걸 묻지?
(시무룩한 남자를 여자가 가만히 안아주는 동안 무대 한편에서, 내리닫이 긴 옷으로 몸을 감싼 두 여인이 물 위를 둥둥 떠가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젊은 여인1과 늙은 여인2는 소녀와 어머니 역의 배우가 겸한다.)
여자: 당신들이 아이의 여행을 돕게 되나요?
여인1: 당신도 함께 가야 돼요. 당신의 역할이 필요해요.
남자: 제 몸을 찾고 싶다는 바램으로 여기까지 몰려온 건가. 그 소망이 바람 되어 날 여기까지 날려보냈다.
여자: 제발 그렇게 이상한 말투로 말하지 말아요. 당신.
여인2: 나 또한 그 바람에 실려 여기까지 불려온 넋이지만, 몸 찾을 기미는 보이지 않아.
여인1: 저 건너 먼 땅에서 이곳 소문을 들었지요. 저 건너 땅에선 영혼을 조각조각 자르고 이어 붙여 괴상한 사람을 새로 낳고 길러요. 이리고 오면, 넋이 그대로 남은 채 몸만 가닥가닥 흩어진 이의 여한을 풀어준다기에....
여인2: 처음엔 저 건너 땅이 우리 소원 풀어줄 곳인 줄 알고...그나마 넋의 끄트머리가 붙어 있는 팔뚝 하나만으로 기어기어 들어갔는데...
여인1: 누가 자꾸 그러나 몰라? 저곳에선 또 다른 그곳이, 또 다른 그곳에선 이곳이 낙원일고....
남자: 그저 못 다한 목숨 꼴을 갖춰주는 땅이면, 어디라도 좋아요, 난...(점점 몽롱해지며) 누군가 꿈속에서 나를 이 세상 가까이 떠밀었던 것 같아요. 꿈속엔 더 먼 옛날이 펼쳐져 있는 듯했는데...
여인2: (여자 앞으로 나서며 속삭이듯) 당신 남편은 여행을 시작했어요. 당신도 잘 따라올 수 있겠어요? (여자가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후, 다시 남자에게 )당신을 이 세상 가까이 떠민 그 누군가의 모습을 알아 보겠어요?
남자: 난 꿈속의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해요.
여인1: 그럼 우리들의 모습을 빌어서 꿈속으로 깊이 들어가 봐요(주문처럼 반복한다.)바로 보지 못하는 사랑 사이에 전쟁의 예감이 있다.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랑 사이에 전쟁의 예감이 있다......
(남자와 여자, 여인1과 2에 의해 최면술에 걸린 듯 먼 옛날의 시간 속으로....) (여인1. 먼 옛날의 소녀가 된다. 과거의 소녀, 울기 시작한다. 울고 있는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신기한 듯 바라본다.)
3장 눈물에 대한 의문
남자: (순간적으로 과거에서 벗어난 듯, 감독 중인 인격관리국 직원에게)제게 무어지? 저 여자의 눈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저 물방울....
직원: 말 그대로 '눈물'이라 하오. 모르겠소? 기억 안 나요? 당신도 엄청나게 많은 눈물을 흘리고 삼키며 이 세상까지 살아남았을지 모르오.
남자: 하지만 난 저렇게 희한한 신체 현상을 구경조차 해본 기억이 없어요. 왜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저런 물을 눈 안에 감추고 있지 않은 거죠?
직원: 우리 사회는. 꼭 필요한 신체기능조차 최대한 경제적으로 간소화시켰다는 걸 아직 모르오?
남자: 하지만 저 눈에서 나는 '눈물'은 참 기능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걸요. 다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액체 같아요.
직원: 적어도 저 옛날의 눈물은 아무런 기능도 목적도 갖고 있지 못했소. 그저 얼굴 위에 무력하게 흘러내리다, 약간 짭짤한 맛을 남기며 말라붙었을 뿐. 게다가 그 감상주의는 어쩌구. 인류가 점점 눈물을 잃어버린 덕에 오늘의 왕국이 이나마 가능했던 거지.
남자: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물을 내 눈에서 흘러나오는 거요?
직원: 혹시 슬픔이란 감정을 아시오?
남자: 슬.....픔?
직원: 나 역시 그걸 실감할 순 없소. 다만 과거의 유물이 돈 감정 의한 종류로서 그 정보만을 갖추고 있을 뿐이지. 슬픔이란.....울고 싶어지도록 마음이 아픈 것. 지난 시대의 사전은 그렇게 밝혀놓고 있지.
남자: 울고 싶어지다니...운다는 게 무어요?
직원; 그게 곧 눈물을 흘린다는 거지. 눈물을 모르곤 슬픔도 알 수 없겠군. 좋소. 당신의 이전 생애 중 특히 당신의 눈물샘을 재생시킬 만한 것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이미 완전히 말라버린 그 샘이 다시 젖어들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래도 당신의 죄를 들추어내는 게 빠르겠지. 우연인지 몰라도. 그 순간의 안내자 역할로 나오는 이가 아마도 내 모습을 많이 닮았을 거요.
4장 철없는 순정
이 장면은 1장이 반복, 강화되는 부분이다.
소녀:(1장에서 혼잣말하던 첫머리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누군가를 기다리며 자신의 모습을 가다듬고 그러면서 스스로 모습에 빠져드는, 길고 조용한 몸짓이 이어지다가)오셨군요. 오실 줄 알았어요.
(사이. 어둠 속에 남자)
남자: 여기 올 맘이 ...아니었어.
소녀: 그래도 안 오실 수 있나요? 싸움터가 여기 인걸. 곧 싸움이 나려나 봐요. 사방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바람까지 험해요.
남자: (손길을 멈추며)바람?(사방을 둘러보며)고요한걸.
소녀: 밤새 소란스럽던 바람이 새벽녘에 멎는 걸보고, 당신이 오신 걸 알았죠. 언제나 그랬는걸요. 소문과 바람이 정신 없이 몰아치는 동안, 난 잠을 잃고 당신을 기다리죠. 그러다 어느 날 새벽인가 바람이 멎으면 거짓말처럼 당신이 오시는 거예요.
남자: 하지만 내가오면...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질 않나.
소녀: 괜찮아요. 전쟁 따위...무섭지 않아요. 평화로운 세상에 당신이 떠나있는 것보다, 전쟁 속에서 당신 곁에 있는게....훨씬 행복하니까요.
남자: 이번 소문은 어떤 것이었소.
소녀: 늘 똑같지요. 노장군의 군대가, 이번만은 만사를 젖혀놓고, 이 땅을 완전히 차지할 만한 무서운 전략으로 저 경계선을 넘어오리라는....날 노예로 삼은 이 땅의 젊은 장군. 바로 당신의 적장이 그 소문 앞에 가만있을 리없죠.
남자: 무슨 전조라도 있었소?
소녀: (수줍게 자기 손을 내민다.)
남자: (무심코 그 손을 보다가 놀라 달려들며 그 손을 부여잡는다.)
소녀: 당신은 내 상처를 보셔야만 절 안아 주시는군요. (남자, 소녀의 손을 놓고 외면한다)아니, 그나마도 가까이 다가오다 말뿐이지만.
남자: 대체 누구요? 누가 당신의 손가락들을....
소녀: 누구라니요 아무도 아니라니까요. 그저 제 몸이 한군데씩 사라져 간다니 까요. 이쪽 손가락이 모두 없어지고 말았으니, 요사이 큰 전쟁만 벌써 다섯 번을 넘겼다는....
남자: 믿을 수 없어. 넌, 네 몸을 스스로 상처 내고 있어, 왜 그런 짓을 하지? 네 그 이상한 짓 때문에, 멀리서도 내 꿈속에 역마살이 동하는 거야.
소녀: 그렇게 라도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으면, 당신은 날 돌아보지 않으시잖아요.
남자: 전쟁의 예감 땜에 네가 상처를 입는 게 아니라. 네 철없는 자해행위 땜에 전쟁이 일어나는 거잖아, 네가 그 이상한 자해행위로 꿈속에서 날 불러내지 않는다면 난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을 거고, 내가 여기 오지만 않으면... 전쟁은 멈출 수도 있지 않을까.
소녀: 그런 말 마요. 당신이 아니어도 전쟁은 나요. 사람들은 서로를 찢어놓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족속들이죠.
남자: 마치 지기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소녀: 모르는 일이죠. 내가 사람 몸을 뒤집어쓴 다른 족속인지.....
남자: (냉정하게)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네 말이 맞다면, 전열을 가다듬어야 하니까. 결국은 다시 똑같이....
소녀: 언제나 그렇듯이, 혼자 오지 않으셨나요?
남자: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담 넌 진짜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상한 족속인 거야? 난 언제나처럼, 네눈에 보이지 않는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왔어. 그들이 보이지 않나? 넌 도대체 뭐야?
소녀: 그럼 당신은요? 떠나 있어도 늘 눈에 사무치는 당신은, 사람인가요 귀신인가요?
남자: 그걸 누가 알겠나. 내가 진정 사람인지, 스스로 사람이라 믿고있는 귀신인지...
소녀: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전쟁은 왜 해요? 노장군이 당신 아버지라서? 단지 그 때문에?
(한바탕의 전쟁, 무대를 가로지른다. 표현방식은 자유로이 모색될 수 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의 소리 산발적으로 엇갈린다.)
소리1: 죽음이 끝나지 않는 날들-어둡고 긴-피의 강이 흐르는-꿈같은 전쟁의 날들....(말발굽소리)
소리2: 제발....목숨만....살려주세요.
소리3: 이만하면 이 난세에 오래 살았지. 죽이려면 얼른 죽이시오.
소리4: 웬일예요. 이게 ...왜 하필 우리 가족을....
소리5: 네놈이라고 늘 무사할 줄 아느냐...!
소리6: 죽여라. 죽여. 나 죽이고 니가 얼마나 잘 사는지. 내 저승에서 두고두고....
('살려주세요'하는 아우성이 반복되고 겹쳐지며 고조되는 가운데, 남자는 그 전쟁의 소리를 뱉어내는 사람들을 죽여나간다. 그러나 그 몸짓은 그들에게 괴롭게 대항하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말발굽 소리를 비롯한 전쟁의 소음이 차차 가라앉으며, 괴롭게 싸우던 남자의 몸짓도 진정되고, 바람 소리 일어다가 다시 사라져 간다.)
(그 아우성 말미에서, 직원 역의 배우는 과거의 사자가 되어 다시 등장.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에게 다가가)
사자: 누굴 찾는 거요. 달콤한 꿈이라도 꾼 거요? (남자를 끌고 걷기 시작하며)자, 당신 탓에 목숨 잃은 자들을 만나게 해주겠소. 그 원혼에 둘러싸여 요절하고 싶지 않으면, 고문의 명수이신 우리 장군님의 명령에 따르는 게 좋을걸.
(사자의 손짓에 따라, 조금전 전쟁의 소리와 몸짓을 보이던 배우들. 원혼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적장과 노장군의 모습도 여기 겹쳐 나타난다. 남자가 그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강력한 전쟁의 시청각적 이미지가 한번 더 무대를 휩쓸고 지난 후)
5장 고문, 피할수 없는 악역
(남자가 적장의 지휘 아래 고문 보조자로부터 고문을 받고 있다.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트는데, 적장은 조용히 폭시하고 있다. 그 곁에서 소녀가 표정 없이 적장의 수발들고 서 있다.)
적장 :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남자 : 내가...묻고 싶은...말...이군.
적장 : (다시 자극을 가하게 하며) 다시 이곳에 오면, 네가 살아 견딜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맛보게 해주겠다고, 내 분명 경고했을 텐데. 무적의 용사처럼 설치는 꼴이라니...
남자 : (소리없이 몸부림치다가, 자극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아직...견딜...만...해. 이게...살아서...겪는...최고의...고통은...아직...아닐...것...같군.
적장 : 물론 아니지. (사이) 근사한 걸 보여주지. 네 생애 최고의 고통을, 꼭 네 몸으로 겪으란 법은 없지. (사자, 노장군을 데리고 들어온다. 그는 오랜 고문에 시달린 듯 몸과 정신을 가누지 못한다. 남자, 뭐라 외마디 소리를 지를 듯하다가 삼킨다.) 오해하지 말게. 자네 약한 데를 건드리려는 의도도 있긴 있지만, 그게 전분 아니야. (노인에게 고문의 자극을 가하도록 사자에게 지시하며)난 이치가 정말 싫어. 정말 질긴 목숨이야. 내가 모시는 전쟁의 신으로부터, 이 늙은이 목숨만 일단 뺏으면 젊은 목숨 여럿 구할 거라는 신탁을 들었건만, 도통 목숨이 끊기질 않아. (사이) 이번엔 고문 방법을 좀 새로 개발했네. 이번에도 이 노인 목숨이 붙어 있으면, 또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네 생애 최고의 심적 고통을 선사할, 이 다음의 구경거리를....
남자 : 저분을 내세워 전쟁을 먼저 일으키는 건 너야. 저 노장군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은일 희생시킬 건지, 두고 보겠다 했지....
적장 : 아, 관둬. 난 회고담은 딱 질색야. 그냥 고통을 즐기기만 하면 돼. (노인의 뼈마디가 꺾이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남자, 눈을 감고 외면한다.) 끝내 (과장된 흉내로) '아버지이-!' 하고 울며 외치진 않는군. 독한 놈! 네 신파 연기를 구경할 때까진 난 이 짓을 그만두지 못하겠는데....
남자 : 내가 그렇게 비굴하게 구는 순간, 아버진 그 굴욕감 때문에 혀를 깨물고 마실걸.
소녀 : 제발.... 다들 그만 들... 그만 들.... (머리를 감싸쥔다)
적장 : 아하, 너 거기 계속 있었니...? (불같이 화난 듯) 넌 네 감정 보이지 말랬지?
소녀 : (갑자기 남자에게 매달리며) 당신이 빌면 되잖아요. 언제까지 이 짓을 밥복할 거예요? 언제 이 상황을 끝내죠? (다시 노인의 비명을 들으며) 저러다 돌아가시겠어요.
적장 : 그럼 이 상황이 끝나겠지. 주제넘은 년. (가벼이 주먹 한 대로 소녀를 쓰러뜨린다. 사이) 아버지를 살리겠다면, 곧 전방으로 길을 떠나게. 아직 여기는 싸움의 핵심이 아닐세.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일수록 당신 늙은 부친의 목숨은 더 길어지네. (남자의 눈길이 소녀에 머문 것을 보고) 아, 날 탓하진 말게. 나같은 악역 덕분에 누군가는 거룩한 희생제의를 치르게 될 테지. (소녀의 몸을 손끝으로 훑어 내린다) 이왕이면 나도 그런 약한 역을 맡아보고 싶다네. (드러눕힌 소녀를 아래위로 훑어 내리는 눈짓)네년이 내 아래서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틈만 나면 이쪽 땅을 휘돌면서 불쌍한 거지처럼 돌아다닌다는거 잘 알아. 네년이 그러고 돌아다닐 때마다(남자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저놈이 제 발로 적진에 기어드니, 그 짓도 내게 쓸모 있어 내버려두기는 한다만, 이년에게 무한정 자비로운 아비처럼 굴 순만은 없지. (적장, 음흉한 웃음과 함께 소녀를 겁탈한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일어나려 하나, 고문 보조자가 남자를 강하게 내리누른다)
6장 비밀의 열쇠는 눈물
(피범벅이 된 남자, 소녀의 마을 우울터에서 물을 길어 올려 자신의 몸에 들어부으나, 어떠한 물로도 피를 씻을 수없다. 소녀가 발을 절며 다가와, 남자의 몸을 쓰다듬으며 울기 시작 한다. 소녀의 눈물이 그 피를 씻는다.)
(물을 직접 무대에 동원하기 어려우면 은빛 긴 천이나 실타래 등을 물 대신 활용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피에 대해서도 동일한 재질의 물질을 사용할 수 있다.)
소녀 : 이대로는 안돼요. 이렇게 계속 전쟁을 허락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전쟁으로 죽고 말 거예요.
남자 : 넌 아직 모르는구나. 누군가 죽으면 또 누군가 태어나 그 빈자릴 메운다는걸.
소녀 : 그럼, 그걸 가르쳐주세요. 당신이 직접....(남자의 품으로 파고든다)
(남자, 잠시 멈칫하다 그 의미를 알아듣는다. 남자의 몸은, 아직 완전히 씻기지 않은 피와 소녀의 눈물로 젖어 있다.그 몸으로, 갑자기 격정에 휘말려 소녀를 껴안는다. 하지만 긴 포옹 후, 서로 떨어져 앉거나 서버리는 두 사람)
남자 : 넌 왜 아직도 울고 있니?
소녀 : 당신 몸에 묻은 피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까요. (다시 소녀의 눈물이 남자의 피를 씻는다.)
남자 : (소녀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다시 물으마....너는 ...누구니?
소녀 : 그 말씀을 또 꺼내시는 거 보니, 이번 만남을 거둘 때가 다 된 것 같군요.
남자 : 왜 네가 나의 편과 적을 오가며 싸움을 부추기고 혹은 스스로 제 몸을 상해도, 난 너를 첩자 따위로 의심하지 않는 걸까?
소녀 : 전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누구의 편도 아니고 누구만의 심부름꾼도 아니지요. 예감과 운명이 날 이끄는 대로 거기 끌려 다닐뿐. 내가 놓치지 않는 단 하나의 가늘고 긴 끈은, 당신을 향한 사랑의 끈뿐이에요
7장 피할 수 없는 운명
(다음 사자와 남자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소녀는 내내 무대 뒤쪽에 머문 채 남자의 피가 묻은 수건을 가만가만 헹구어내고 있다. 다음 대화를 엿 듣는 셈이다.)
남자 : 난 정말...모르겠소.... 당신네 장군은...대체 내게...뭘...원하는 거요.......
사자 : 역시 우리 장군님다운 생각이셔. 당신을 그냥 죽이고 마느니, 당신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다잖소. 물론 당신은 당신편의 사람들까지 죽여나가도록 되어 있어.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끔 우리 장군님이 다 손을 써놓으셨을걸. 장군님이나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당신은 아마 지레 죽게 될 거요. 죽어가는 자들의 원한에다 그 죄책감은 또 오죽할까.... 물론 전쟁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장군님이 판단하실 때까지 그 계획은 천천히 실행될 거요. 그러니, 그리 미리 인상쓸 거 없소. 어찌 보면 그리 나쁜 일만도 아니잖소? 당신이 먼저 죽인 원혼들은 좋-아들 할거야. (사이) 피의 원수는 피로 갚는 다는 말 알지? 그 원혼들을 달래는 길은, 또 다른 목숨도 그 지경으로 만드는 길밖에 없지. 억울함을 골고루 나누는 거야.
남자 : (숨을 고르며) 그럼, 다시 그 새로운 원혼들의 한은 무엇으로 푼단 말이오? 또 더 많은 사람들의 피로...?
사자 : 단신 때문에, 죽은 몸조차 제대로 못 추스른 사람들이 많지. 누군가는 얼굴을, 누구는 팔 하나를, 혹은 아래위 몸뚱이가 뚝 잘린 채 몸통 한복판을 잃고 말았어.
남자 : 그게 왜 나 때문이오? 내 뜻이 아니었어. 난 한 번도, 기꺼운 마음으로 전쟁에 나선 적이 없소.
사자 : 당신 뜻이었든 아니든, 당신 손에 의해 저들 몸이 결단나고 저들 목숨이 끊겼어.
남자 :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늙은 아버지가 목숨을 잃게 되니.... 나의 전쟁은 늘 아버지 목숨을 걸고 벌인 도박이었어. 당신의 그 위대하신 장군, 고문의 명수께서 늘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날 끌어들였지.
사자 : 당신 아버지가 굳이 그 오래된 목숨 줄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뭔데?
남자 :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이라면 당신 아버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자 : 나같이 무사의 꼴을 갖추고 있으면, 꼭 아버지 원수를 갚으러 적장을 찾아 나선 효자로 보이나보지? 난, 내 스스로 아비를 죽이고 새 아비를 찾아 나선 아들인걸. 지금 내게 아비는 저 위대하신 고문의 명수, 바로 당신을 괴롭히는 우리 장군님이야.
남자 : (기가 막힌 듯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후레자식 같으니라구....
사자 : (긴한 비밀을 알려주듯) 길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당신이 여러 목숨 절단내기 전에, 대신 자기 목숨을 내주는 자가 있다면....어차피 우리 장군님의 세상은 피를 먹고 자라는 땅이니, 누구의 피든 많이만 빨아들인다면.... 더구나 제 뜻으로 죽은 한 사람의 피는, 죽임 당한 수백 명의 피 값을 대신하고도 남는다니 말야.(다시 긴한 비밀을 말해주듯)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도 살리고 당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긴 있지. ( 사자, 남자에게 귓속말을 한다. 바람 소리와 말발굽 소리.)
남자 : 안 돼! 그럴 순 없어. (고개를 처박고 괴로워한다.)
사자 : 어떤 일에든 희생은 필요한 거지.
남자 : 그건, 그건.......
사자 : 일종의 모험이지.
남자 :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자기 몸을 스스로... 어떻게 토막낸단 말이오?
사자 : 그럴 용기만 있다면,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죽을 목숨이 살아나는 것만 기적이던가? 혼자 힘으론 완성해내기 어려운 죽음의 방식을 모두 함께 완성해낸다면 그 또한 기적이지. (사이) 하지만 지적을 꿈꾸던 자가 그 고통에 지쳐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머문다면, 결국 그 희생제의는 타살로 완성되겠지.
8장 집에 남은 여자
(집에 남은 여자의 봄꿈,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가 꽃잎이 되어 꿈에 나섰다.)
여자 : (자장가를 부른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자장자장 잘도 잔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노랫가락을 멈추고) 우리 아가 벌써 잠들었구나. (무대 가득 종이꽃이 떨어진다. 여자, 큰 꽃잎 하나를 손으로 들어 유심히 바라본다.)
여자 : (그 꽃을 향해) 어머니!
어머니 : (무대 뒤편에 꽃을 든 그림자로 나타나) 그래, 날 알아보는구나.
(대화는 여자가 꽃잎과 나누는 형태로 계속된다.)
여자 : 그냥 바람으로 날려 가시면 어쩌려구 이런 모습으로 오세요.
어머니 : 먼지로도 바람으로도 여러 번 왔었다. 이렇게 와도 날 알아보지 못하면 너랑 나랑 '엄마, 딸' 관두자 하려 했지. (여인, 꽃잎에 가만히 입맞춘다)
어머니 : 낭군이 곁에 없으니, 나한테 정분난 몸짓이로구나.
여자 : 어머니두. (입맞춤을 거둔다)
어머니 : 이렇게 네 손에 얹혀 한가로이 네 입술 끝이나 느끼다 가면 오죽 좋겠니.
여자 : 지천에 널린 게 꽃잎인데, 꽃구경에 노랫가락 흥얼거리기 전에, 짓밟혀 으깨진 꽃잎부터 눈에 어른대니.... 말씀 하세요. 좋은 소식일랑 꿈도 안 꿔요.
어머니 : 네 뱃속에 또 애 선다.
여자 : (대단치 않게) 그럼 지금 이게 태몽인가부네. 그게 뭐 대수여요. 하냥 이러고 늙는걸.
어머니 : 이번엔 달러. 그 목숨이 지 어미 목숨 잡아먹을 팔자야. 저도 제대로 태어나기나 할는지....
여자 : (심드렁하게) 어머니, 나 겁주는 솜씨가 전만 영 못해요. 불길한 말 듣고 내 가슴 벌렁거린게 어디 한두 번이예요. 허구헌 날 싸움터로 도는 지아비, 그래도 올 때마다 신통하게 씨는 떨구고 가지만, 그 태몽이 어디 온전하게 꿔지겠어요.
(전쟁의 소음, 말발굽 소리, 아기들의 울음소리, 마을 여인들, 우물가에서 두레박질하는 몸짓)
(여자, 손끝의 꽃잎을 떨구고... 종이 오린 형상의 아기들을 잠재우기 시작한다. 마을 여인들, 불안과 공포로 어쩔 줄몰라하기 시작한다. 평화롭게 아이들을 잠재우는 여자를 마을 여인들이 주시한다.)
여자 : (종이인형들과 같은 아이들을 다독아며) 왜들, 왜들 이러나... 얘들아... (자장가) 잠 속에 죽음이 쳐들어와도/얘들아 놀라지마 엄마 곁이니/ 꿈속에 몹쓸 꿈이 똬리 틀어도/ 얘들아 안심해라 꿈 밖에 엄마 있다/ 자장 자장 잠속의 잠, 잠 속의 잠,자장 자장 꿈 속의 꿈, 꿈속의 꿈...(여자를 보며 마을여인들 웅성거린다)
마을여인1 : 저 여자야. 우리 마을의 행운을 잡아 먹는 자.
마을여인3 : 증거가 있나?
마을여인2 : 하긴 저 여자가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이곳엔 한번도 환한 햇살이 들지 않아. 사내들은 자주 전쟁터로 불려나가고, 전염병도 돌지 않는데 아기들은 자주 죽어나가지.
마을여인3 : 그거야 오래 전부터 그랬지. 저 여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래온 지 오랜걸. 우리 할머니 무릎에 누워 듣던 옛이야기가, 내가 나중에 자라면서 만날 세상이야기 였다니까.
마을여인1 : (악의에 차서) 저걸 봐. 울어대던 아이들을 감쪽같이 잠재우는 저 솜씨를.
마을여인3 : 그게 왜? 아주 솜씨 좋은 엄마의 노릇이 아닌가?
마을여인1 : 저건 죽음의 사자나 발휘할 수 있는 놀라운 솜씨야. 정말 쥐죽은듯이 아가들을 잠재우잖나.
마을여인2 : 저렇게 깊은 잠이 쌓이고 쌓이면, 어느 날 정말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지게 될지도 몰라.
마을여인3 : 아가들이야 많이 잘수록 좋지. 잠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구...
마을여인1 : (냉소적으로)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었나? 저 여자의 아가들은 자라질 않아.
(다른 여인들 그제야 섬짓하다)
여자 : (자장가의 끝 구절) 자라다 마는 몸 두려워 마라/ 어느 날 눈뜨면 쑥 자라 있으리/ 꿈속에 천리 벼랑 앞을 막거든/ 울지 말고 웃으며 뛰어내려라/ 꿈속에 깊이깊이 떨어져 내리면/ 꿈 밖에서 무럭무럭 자라 있으리.
(이번에는 나뭇잎 하나, 여자의 꿈으로 찾아든다.)
여자 : (손끝의 나뭇잎 향해) 왜 또 오셨소, 어머니?
어머니 : (무대에 모습을 보이며) 곧 젊은 처녀 하나가 찾아와 네게 기이한 부탁을 할 것이다. 절대 그 부탁을 들어 주지 말아라.
여자 : 무슨 부탁인데요?
어머니 : 내 입에 올리기도 무섭구나. 네 뱃속의 새 목숨을 생각해서라도, 행여 그 부탁에 마음 약해지지 않게 조심 해야 한다.
여자 : 어머니답지 않네요.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깨우쳐주는 일은 늘 시원시원 막힘이 없었는데....
어머니 : 네 낭군 생각에 마음 무르게 먹지 말거라. 이건 내 부탁이다. 그 처녀의 부탁과 이 어미의 부탁 중 어느 쪽에 귀기울여야 할지는 네 몸의 핏줄이 알 것이다.
여자 : (바람에 불려 가는 나뭇잎을 향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를 외쳐 부른다. 여자는 꿈에서 깨어나는 몸짓)
제9장 흩어지는몸, 부딪치는 말(言) -未命鬼의 제의
(여자 앞에는, 어느새 소녀가 다가와 서 있다. 먼 길 서둘러 왔는지, 소녀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소녀의 품안에먼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여자와 소녀. 잠시 조용히 서로를 응시한다.)
소녀: 아주머니, 저를 기억하시겠어요.
여자: 그 사이 많이 여윈 듯하긴 해도, 누군지 알겠어요. 전에도 꼭 이렇게 헐레벌떡 찾아든 일이 있었죠..... 그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소녀: (무릎을 꿇으며) 용서하세요. 그분께 대한 제 사랑을 허락하시면서. 아주머니께선 오직 그 분의 안전만을 지켜 달라 하셨는데....
여자: 그분이 위험에 빠졌군요.
소녀: 다 제 탓이에요. 제가 너무 빨리 그분을 전쟁터로 불러냈어요.
여자: 이미 글러버린 일은 듣고 싶지 않아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소녀: 피가 필요해요.
여자: 피?
소녀: 다른 사람 칼에 어쩔 수 없이 흘리게 된 피말고. 자기 스스로 제 마음이 넘쳐 피로 흘려내는. 그런 피가 필요해요. 적장은 이번에도 그런 피를 기꺼이 흘릴 사람이 없으리라 믿고. 그분과 그분의 늙은 아버지를 조롱하 듯 이 조건을 내세운 거죠. 이 피의 제의가 성사되면, 적장과 그분, 그분의 부친인 노장군이 얽혀 있는 이 전쟁의 악순환만은 끊길 수 있을 꺼 예요.
여자: 난, 그분의 아내이기도 하지만. 그분과 함께 이 세상에 내놓은 아이들의 어미이기도 해요. 지금 내 뱃속에도....(사이) 난 애들의 어미여서. 내 목숨을 내 마음대로 어쩔 수 없는 처지랍니다
소녀: 저 혼자 피를 흘려 될 일이라면 저도 아주머니께까지 이런 부탁을 드리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 분을 위해 스스로 피 흘릴 자로서 전 떳떳한 자격이 없어요. 제가 바다를 메울 만큼 피를 흘려도 아주머니의 피 한방 울만 못하지요. 제 마음과 상관없이 전 어차피 잃을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것 이어서 온정신을 다해 피를 흘려도 소용없지요.
여자: (긴 침묵) 어떻게 하면 되나요? 어떻게 기꺼이 피를 흘리죠?
소녀: 단 하나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 예감에 도박을 걸어 보실 수는 있을거예요. 전 얼마 전부터 몸뚱이 이곳저곳의 살들을 잃어 가고 있어요. 바람소리만으로 미래를 점치는 힘은 내 스스로도 누를 수 없을 만큼 커져가고 있구요. 며칠 전 그분의 적장에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강간을 당했으나... 내 처녀막은 아직 망가지지 않았지요. 왠일인지 그때마다 번번히 한바가지 씩 피를 쏫아내는데도 한바탕의 악몽이 지나간 후면 난 내 처녀성이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거든요. 누군가가 나를 그보다 더 강하게 겁탈하면 난 또 그 누군가 앞에 칼에 찔린듯 피를 쏟아낼지 모르죠.
여자: 그래서요...?
소녀: 우리 서로의 몸을 찢어 내리면서 서로의 피를 섞도록 해요.(여자의 놀람을 담은 침묵) 전쟁을 멎게 하려는 마음만 진실하다면 서로의 몸을 상처내면서 온갖 증오의 불길을 되살려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적장이 저를 겁탈하듯... 그렇게 제 몸을 찢으셔도 좋아요.
여자: 당신은 아직 절 모르는군요. 내 마음속엔 어떤 미움의 불씨도 없어요.(여자는 소녀를 애무하듯 쓰다듬기 시작한다. 소녀 역시 여자를 매만진다.)
소녀: 이건 황당한 예감이지만 내 몸 안에 기적의 씨가 자라고 있는 것만 같아요.어쩜 그 작은 씨 때문에... 우린 그 분을 살려낼 만큼의 피를 흘려내고도 되살아날 수 있을지 몰라요.
여자: 부활...?
(여자와 소녀 애무하듯 부드럽게 서로의 뺨으로부터 서로의 어깨, 몸뚱이를 쓰다듬어 내리다가 점점 거칠어지는 격정 속에서 서로의 육체를 토막내기 시작한다. 이 장면의 시각적 표현방식은 다양하게 모색 될 수 있다. 일종의 제의가 이어지면서 다음의 노래가 불린다. 여자와 소녀 여자가 재우던 아이들의 형상을 이리저리 옮기며)
여자: 시집 장가 못 가고 이승을 뜨니/ 저승으로 가는 길이 천리길이라/시집 장가가고도 젊어 눈감으니/ 저승으로 가는 길이 만리길이라
소녀: 죄 없이 억울하게 세상 등지니/ 이승에 놓인 발이 떼지지 않네 물에 잠기고 불에 휩싸여 명을 놓치니/ 산목숨도 아니나 죽은목숨도 아니어라.
여자: 꿈속에 들어앉아 또 꿈을 꾸네/ 한세월 죽은 꿈이 아니면/ 내 어찌 내 죽음을 들여다보리
소녀: 꿈밖에 나서서 또 꿈을 꾸네/ 한낮의 단잠 속 꿈이 아니면/ 내 어찌 죽음을 서둘렀을까
여자와 소녀: (겹쳐 부른다)꿈속의 꿈(꿈 밖의 꿈)/ 겹겹산중(산 넘어 산)/ 꿈이 눈을 가려(눈물로 꿈을 지워)/ 님과 이별하고도(님의 사랑 품고도)/ 님의 모습 본다네(님의 모습 못 보네)
(아가의 형상들을 옮기던 소녀 여자를 무대 뒤편으로 이끌고 간다)
어머니: (꽃도 잎도 아닌 제 몸으로 꿈밖에 뛰쳐나와)아가야, 얘야... 그만, 그만 두지 못하겠니... 저 소녀를 믿지 말아라. 저 앤 제 자신이 악마인지도 모르는 악마이니라. 저 애의 천성은 선하나 그 마음이 악마의 아가리 속에 먹힌지 오래야.
(어머니의 절규 속에 또 한 노인이 다가온다. 남자의 아비인 노장군이다. 세속으로 보면 사돈 관계인 이 두 노인은 은 여자와 늙은 여자의 대표적 존재인양 잠시 노려보며 마주 서 있다.)
어머니: 저 여리고 어여쁜 악마가 당신의 흘러 나왔단 걸 난 알아.
노장군: (이후 노장군의 말소리는 모두 지쳐있으면서도 포기 할 수 없는 권위에 힘입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그 소녀는 내 아들의 두 번째 여인이... 아닌가.
어머니: 그런 실제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오. 저 어린 악마가 신통력을 부려 내 사위의 넋을 빼놓는게 꼭 당신이 부질 없는 고집 부려 내 사위 넋을 빼놓는 것과 닮았다는 것이지.
노장군: 난 저 소녀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어. 말 그대로 저 아이가 내 혈통에서 흘러나온 딸이나 손녀쯤은 된데도 난 모르는 바요.
어머니: 당신이 제대로 아는 게 무엇있소?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또 뭐가 있고? 왜 당신은 적 앞에 항복할 줄 모르는 거요? 이길수 없는 싸움인데도 잔혹한 고문만 미련하게 견디어 내면 다 위대한 영웅이랍디까?
노장군: 늙은 여인이여... 당신은 내게 그따위로 말할 자격이 없어. 그래 나는 승리할 힘을 잃어버린지는 오래요. 그래 난 여전히 장군이고 내 아들의 무고한 용기를 걸고 구원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목숨이요. 하지만 당신은 무어지? 내 며느리를 비롯해 여러 목숨 이 세상에 떨궈논 공이야 모르지않지만... 오직 그것뿐이잖소. 그나 마 늦게까지 그들을 거두지 못한체 젊어 제대로 자기 몸을 간수하지 못한채 일찌거니 세상 떠 오직 자식들 의 꿈속이나 떠돌뿐 아니오 딸의 태몽속에 들어가 아무리 많은 새 목숨을 점지한들 이미 태어나 싸우며 부대끼는 젊은이들만큼 그 새목숨이 중할까?
어머니: 기껏 새 목숨 점지해놓으면 부질없이 그 목숨 끈어놓은게 누군데?그게 바로 당신같은 이들이 허구헌날 저질러온 죄업이오. 그래놓고 또 새목숨을 허겁지겁 바라는 이들도 바로 당신들같은...
노장군: 그건 당신같은 어미들의 오해요. 아비들이 자식을 바라는거야 순리지만...정작 그 자식을 낳기를 원하는건 어미들이지. 내게 잔혹한 고문을 견뎌내는 미련한 의지라 했소? 말이야말로 세상의 수많은 어미들한테 고스란히 돌려줄수 있을듯한데... 나같으면 믿음직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자식이 아닌바에야 그렇게 무조건 힘들여 낳지는 않을걸세... 미래의 장군감이 아닌바에야 낳아 무엇하나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일찍 저버릴 시들하고 약한 목숨까지 기를 쓰고 세상에 내어놓는 고집이라니... 세상에 어떤 미련한 사내도 그만큼 미련한 노릇은 흉내조차 못낼걸세...
어머니: 내가 어린것들을 일찍 잃은 것은 모두 전쟁통에 내 젖이 마르고 집안에 곡기가 끊겨서였어. 당신의 손자 중 먼저 간 목숨도 모두다 비슷한 이유로...
노장군: 구질구질한 소리는 질색이오. 이런 얘기나 지껄이자고 예까지 도망쳐온 게 아닌걸. 며느리와 저 아이가 지금 내 아들의 목숨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소? 저 애들이 피를 충분히 흘리지 않으면. 이 도박을 내건 적장은 다시 나와 내 아들의 피를 마저 요구할 거요. (긴 말이 힘겨웠는지 힘없이 주저앉는다.)
(두 노인의 긴 말싸움에 이어, 여자와 소녀의 모습이 다시 보인다. 소녀, 품안에 숨겨왔던 칼로 여자를 찌른다., 여자가 쓰러진 후, 소녀는 여자의 아가들을 나타내는 형상들도 찢어 나간다. 그 조각들을 흩뿌린 후, 소녀는 자신 역시 칼로 찌른다.)
10장 미래에서 벌어진 누물의 씻김굿
(남자와 담당지원, 미래의 공간으로 다시 들어서며)
남자: 지금 그게 나한테 벌어졌던 일일까요?
직원: 저 남자가 당신이라 해도. 당신에겐 특별히 벌어진 일도 없잖소. 제 몸을 산산히 부순 건 당신이 아닌데?
남자: (털썩 주저앉으며) 하지만 저 모든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내가, 지금도 계속 울고 있지 않나요?
직원: 당신이 지금 울고 있다고 그렇게 느껴지나?
남자: 그럼,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지금 이 세상에 와서까지, 내 스스로를 분간할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진건. 저 세월 속에서 내가 흘려야할 눈물을 제대로 다 흘리지 못한 탓이 아닐까요?
작원: (사이) 감정적이군.
(직원은, 무대 한쪽에 숨어있듯 서있던 한 보조자에게 간단한 신호를 보낸다. 그 침묵의 보조자에게 간단한 신호를 보낸다. 그 침묵의 보조자는 앞서 과거의 고문 장면에서 적장의 지휘에 따라 고문을 실행하던 그 배우가 겸한다. 직원의 신호는 남자에 대한 일종의 치명적 판결과 같은 행위이나. 남자는 눈치채지 못한다)...눈물의 씻김굿이라도 필요할까?
남자: 눈물의 씻김굿...? 그게 무슨...?
직원: 당신처럼 우매한 회한을 처리하지 못하는 동지들을 위해. 우리 인격관리국의 총책임자께서 직접 아이디어를 제공하신 일이지. 아까 당신이 묻지 않았소? 왜 현재 우리에겐 눈에서 물이 흘러 나오는 기능이 멈추었냐고. 그 멈춰진 기능을 인공적으로 대체시키는 기계가 있소. 당신과 같이 그 기능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특별히 해당 시간만큼 그 기계를 작동시키지. 당신이 겪는 지금의 혼란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기계의 효력이 가장 필요한 것 같소, 이젠 당신에게 내리는 내 처방이오.
남자: 처음 들어보는 소리요. 그런 기계가 있다는 건.
직원: 이곳에선 아무 정보나 불필요하게 흘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나?
남자: 그 기계는 어떻게 작동되는 거지요...?
(눈물 기계가 어떻게 작용되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가상의 수조를 나타내는 조명이 무대 위로 쏟아진다. 직원과 보조자가 양편에 버티고 선 가운데. 남자는 반쯤은 눈물 기계에 대한 이끌림으로, 가상의 수조 안에 들어선다. 남자는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는다. 굉임과 물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직원: (그 외의 배우들과 더불어) 씻김의 시간은 무제한. 씻김의 시간은 무제한../ 눈물과 똑같은 형태로 특수 제조된 인 액체에 의해/ 곧 온몸에 바늘이 돋아나기 시작해 그 바늘이 몸 속으로 파고들 터.../ 이는 비밀리에 집행 되는 사형 임/ 사형집행 사유. 당국의 이성적 질서 유지에 위배되는 감정의 교란상태에 대한 처벌/ 당국의 이성적 질서 유지에 위배 되는 감정의 교란상태에 대한...
(직원의 소리. 잡음에 의해 흐려져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책임자와 직원간의 짧은 대화가 소리로만 전해진다. 직원이 과거 사자 역할을 겸하듯. 여기서 들리는 인격관리국 책임자의 목소리는 과거 적장의 목소리와 같다.)
책임자(소리): 수고했다. 요즘 부쩍 감정과다징후를 보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직원(소리):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징후가 전염병의 위력을 본격적으로 떨치기 전에, 저희 담당국이 해당자와 일대 일로 만나 그 병의 뿌리를 뽑아놓을 테니까요.
책임자(소리): 조심해라. 네 게도 감정과다 증세를 앓고 있는 환자의 역한 냄새가 옮겨붙은 것 같다.
11장 미래를 들여다보는 과거
(소녀와 여자. 찢겨진 몸을 나타내는 누더기 같은 의상을 걸치고, 이번에는 과거의 자리에서 미래의 세계를 건너다본다.)
여자: 우린 지금. 긴 한 세상을 건너뛰어 너무 먼 곳을 보고 있어요. 우리의 더 가까운 다음 생애를 보고싶어요.
소녀: 그이가 완전히 물에 잠기면. 곧 우리 곁으로 건너올 거예요. 그와 함께 더 가까운 다음 생애를 들여다보기로 해요.
여자: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만 둘래요. 더 먼 세상이 저렇다면. 가까운 다음 생애애도 별 다른 희망은 없을 것 같아. 아이들을 놔둔 채. 내 몸 내가 찢어 죽은 마당에, 무슨 낙이 있어 내일을 꿈꾸겠어요. ... 고단해요. 난 그만... (여자. 그 자리에 눕는다. 소녀 혼자. 겹겹의 미래 중 가까운 곳을 바라 보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소녀: (혼잣말)...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저 세상이 바로 다음 세상일가요? 모르겠어요. 낯선 옷을 입은 저와 그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해요... 아주머니의 모습도요...
12장 그 사이의 생애
(남자는 가상의 수조 안에 여전히 갇혀 있으나. 다음 대사를 읊조리는 동안 그는 그 어느 생애에도 속해 있지 않는넋과 같은 상태이다.)
남자: 한해 두해 늙어갈수록, 내가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하나하나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이 내 늙은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나는 노후에, 전쟁터도 아닌 곳에서 내 가까운 사람 하나를 죽인 듯한 악몽에 매일 밤 시달렸다. 그렇게 혼미한 채로도 나가 싸우다. 늙은 나는 전쟁터에서 죽었다. 내가 누굴 죽였는지 몰랐듯, 내가 죽은 이유도 모른 채 구천을 떠돌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다시 그 전쟁터였다. 그렇케 몇 겹의 생애가 하루처럼 흘렀다.
13장 뒷모습
(여자와 남자 무대 좌우에 각각 자리잡고 있다.)
여자: (남자의 여장을 챙기며)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난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만나 아홉 아이를 낳았고, 그 중 두 아이를 잃었지요, 그와 지낸 세월동안 제 배는 쉴새없이 불렀다 꺼졌다 불렀다 꺼졌다 ... 그러니 한 십여년 세월 되나요. 짧지 않은 세월 몸 섞고 살았는데. 얼굴을 못 보다니요.
남자: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녀의 몸을 전혀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녀와의 사이에 일곱 아이를 두었지만. 그 아이들이 정말 내 몸을 받고 그녀 몸을 빌어 태어났는지. 거짓말 같습니다.
여자: 하긴 따로따로 지낸 날이 더 많지요. 부풀렀던 배의 바람을 빼고 하나 더 늘어난 아이를 추스를 때쯤이면, 그가 돌아오곤 했어요. 어느 땐 꽤 길게 머물다 가곤 했지만. 어떤 땐 그렇게 또 잠깐 와서 내 배에 다시 바람을 불어넣어 놓고 그 바람이 꺼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은 적도 있으니...(그녀는 챙긴 짐을 남자에게 내놓는다. 남자를 향해) 여기 걱정은 마세요. 언제 오셔도 그대로일 테니....(고개 숙여 눈물 훔치는 것만 같다.)
남자: (여자의 뒷모습 바라보며. 떠나려는 몸짓으로) 내가 떠날 때마다 그녀는 늘 뒤돌아 서있었지요. 난, 나를 떠나 보내는 그녀의 표정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어쩌다 돌아올 때도 그녀는 꼭 그렇게 뒤돌아 선 채 나를 맞았지요. 처음에 난. 그녀가 화가 나서 내 모습조차 보려 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그저 눈물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는데.... (여자를 향해) 이번엔 쫌 길어질 것 같소. 너무 기다리지 말아요. (여자가 건네준 짐을 멘다)
여자: (종이 모형들에게) 얘들아, 아빠 또 떠나신다. 그만들 일어나.(그들을 한 줄에 꿰어 목에 두르고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며) 벌써... (남자를 찾아 무대를 휘돌다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힘없이 선다.)
(여자와 남자. 다음을 노래하듯 읊조린다.)
여자: 꿈속에 들어앉아/ 떠 꿈을 꾸네/
남자: 꿈 밖에 나서서/ 또 꿈을 꾼다./
여자: 한세월 사랑이/ 꿈이 아니면/ 내 어찌 그님의/ 얼굴 모르리/
남자: 한세월 인연이/ 꿈이 아니면/ 내 어찌 그 녀의 / 몸을 모를까/
여자: 꿈속의 꿈/ 겹겹산중/
남자: 꿈 밖의 꿈/ 겹겹산중/
여자: 꿈이 님의 모습 가려/
남자: 꿈이 님의 몸을 감싸/
여자: 님의 몸을 알고도/ 님의 모습 모르네.
남자: 님의 표정 못 본 채/ 님의 몸에 손닿지 않네.
(바람 소리 들려오고, 여자와 남자 각각 상대방을 향해 뒤돌아보나. 서로의 시선 만나지 못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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