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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외 산 문

나의 인생관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작성자작가회|작성시간19.12.02|조회수10 목록 댓글 0
  나의 인생관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글쓴이 : 류인혜날짜 : 04-06-15 16:41     조회 : 1712    


불가사의한 것은, 이 세계에서 우리의 지위이다.


누구나가 매우 짧은 동안의 방문을 위하여 여기에 온다. 왜이냐는 모른다. 하지만 때때로 하나의 목적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이 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 특히 자기의 행복이 그 사람의 미소와 행복에 달려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서이고,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동정의 연줄로 그 사람의 운명과 매어 있는 것 같은, 무수한 미지의 사람들을 위하여서라는 것이다. 나 자신의 외적 생활과 내적 생활이, 나와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의 -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죽은 사람들과의 - 노고에 얼마나 많이 근거하고 있는가, 또는 내가 스스로 받은 만큼을 보답하기 위하여 나는 어떻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 나는 그것을 하루에도 몇 번을 실감으로 안다.

나의 마음의 평정은, 내가 다른 사람들의 일의 덕분을 너무나 많이 지고 있다는, 마음을 어둡게 하는 느낌으로 때때로 흐트러진다. 나는 우리가 철학적 의미로 얼마간이라도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적 강제 하에서 행동할 뿐 아니라, 또한 내적 필연성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므로. "사람은 확실히 그가 하려고 마음먹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마음먹느냐를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청년시대의 나의 마음에 각인되고, 그 이래로 인생의 신산을 목격하거나 스스로 경험하거나 할 때, 언제나 나를 위안하여 주었다. 이 확신은 끊임없이 관용의 마음을 길러 준다는 것은, 이 확신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너무나 진지하게 생각함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유머의 느낌을 돕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이유나 인생 일반에 관하여 끝없이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는 객관적 견지에서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 지망이나 판단을 지도하는 어떤 이상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앞에서 언제나 빛나고 있고 나를 살 기쁨으로 채워 주는 이상은 선과 미와 진리이다. 안락이나 행복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직껏 나의 마음에 호소한 적이 없다. 이런 기초 위에 세워진 윤리의 체계는 단지 가축의 무리에 대하여서만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만약에 예술이나 과학적 탐구에 있어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일로, 같은 마음가짐의 사람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면, 나의 생애는 마치 공허한 것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린 아이 적부터 나는 평범한 한계가 때로 인간의 양심 위에 놓이는 것을 언제나 경멸하여 왔다. 갖가지의 소유, 세간적인 성공, 인기, 호사 - 이런 것은 나에게는 언제나 경멸할 것이었다. 간소하고 높은 체하는 생활의 양식은 누구에게나 최상의 것이다. 육체를 위하여서나 정신을 위하여서나 최상의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사회적 정의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나의 열정적 관심은 내가 남자들이나 여자들과도 직접 교제하고 싶다는 욕망을 현저히 갖고 있지 않다는 언제나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는 말하자면 한 마리 말에 적합한 말이지 두 마리씩이나 한 조가 이루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게 생겨 먹었다. 이제껏 한 번도 나는 자기 동포나 벗들 사이에 전심을 기우려 소속한 적이 없다. 아니, 자기 가족에 대하여서까지도 그러지 않았다. 이러한 연루에는 언제나 그에 대한 어떤 막연한 초연적 기분이 수반하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 속으로 기울려는 원망이 해와 더불어 늘어간다. 이런 고립은 때로 괴롭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남의 이해나 동정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음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확실히 나는 그 때문에 잃는 것이 있지만, 그 대신에 나는 남의 풍습이나 의견이나 편견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됨으로써 보상되고 또 자기 마음의 평화를 이런 마음이 잘 바뀌기 쉬운 토대 위에 두려는 유혹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참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다. 이런 감정에 인연이 없는 사람 - 더 이상 발을 멈추고 경이하지도, 두려움으로 나를 잊고 서성이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의 눈은 감고 있다. 인생의 신비에 대한 이 통찰은 공포를 수반한다 해도 또한 종교를 불러 일으켰다. 우리의 이지로 관통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존재하고 우리의 둔한 능력에는 가장 원시적인 모습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그것이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 이 지식, 이 감정은 참 종교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런 뜻에서 -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만, 나는 충심에서 종교에 귀의하고 있는 사람들의 하나이다. 자기의 창조의 대상으로, 좋은 보수를 받거나, 이것을 벌 주기도 하는 신, 우리 인간의 목적과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신(神) -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취약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 신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개개의 사람이 그의 육체의 사후에도 산다는 것을 - 정신이 약한 사람들은 공포에 몰리거나 아니면 이기심에서 이런 생각을 품기는 하나 -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의식을 가진 생명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신비를 바라보고 우리가 막연히 인정할 수 있는 우주의 불가사의한 구조를 반성하고, 그리고 자연 속에 계시된 작은 미분의 일부라도 이해하려고 겸손하게 시도하는 것 - 그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하다.


- <부싯돌> 2004년 봄 2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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