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들었다. 깊은 내적 갈등이 무거운 망설임이 되어 손에 든 수화기 위에 얹힌다. 무거워 그대로 내려놓고 싶다.
# 누가 악인인가
반 시간 넘게 경련하는 아이가 실려 왔다. 응급실 내 다수의 의료진이 아이의 경련을 멈추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약이 들어가고 나서 잠시 멈추는 듯했으나, 몇 분 후 아이의 몸은 다시 뻣뻣해지고 바들바들 떨렸다. 입에서는 거품이 올라오고, 눈은 두 시 방향으로 돌아갔다. 설명을 위해 보호자를 찾으니, 보호자 대기실 한구석에서 등이 굽어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느릿느릿 오신다.
“아이 경련이 겨우 멈췄어요. 약이 여러 가지 들어갔고, 지금도 들어가고 있어요. 경련을 너무 오래했어요. 예전에도 경련으로 여러 차례 오긴 했는데, 아이는 입원해서 약을 투약하면서 용량을 새로 맞춰야 할 것 같아요.”
한참을 설명하는데 할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할머니의 눈빛은 공허했고,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혹시 많이 놀랐을까 해서 다시 한번 천천히 설명했다. 다시 깊은 정적이 흘렀고, 잠시 후 할머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입원은 못 해요.”
다시 한번 입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래도 더 이상의 대답은 없었다. 아직 아이의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니 아이 옆에 계셔달라고 한 후 진료실로 돌아왔다. 아이의 이전 진료 기록과 과거력을 보고 있는데, 응급실 침상 환자의 응급벨이 응급실 전체에 울렸다. 다급히 뛰어가 보니 아이의 할머니가 응급실에 진료를 보러 온 소아신경분과 교수님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보안요원이 뛰어 들어와 말렸지만 등이 굽고 마른 할머니는 끝까지 손을 떼지 않았다. 여러 명의 성인이 달려들어 겨우 할머니를 떼어내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할머니는 악을 쓰면서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쏟아냈다.
“저놈 때문이야. 저놈 때문에, 애들은 다 어떻게 하라고.”
아이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집의 셋째로 태어났다. 계획된 아이는 아니었다.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본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경련을 했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퇴원할 수 없었다. 병원 신생아중환자실에 남아 정밀검사를 진행했고, 자기공명영상(MRI)에서 뇌병변이 확인되었다. 이미 집에는 다른 자식들이 있었다. 아픈 아이를 키운다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작은 아이가 엄마 옆에서 경련하는 그 모습이, 아마 두려운 잔상처럼 남았을 것이다. 아이는 추가 검사들을 무사히 마쳤고, 엄마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갔다.
한겨울 밤, 아이는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다급하게 실려 왔다. 아이는 작은 입에 튜브를 삽관 받고 불어넣어 주는 숨과 가슴을 압박하는 사람들의 손을 통해 혈류를 공급받아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엄마는 아이가 자다가 경련을 오래하면서 이렇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아이의 심장과 폐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다시 한번 시행된 MRI에서 아이의 뇌는 저산소성 손상이 무척 커 보였다.
이전 영상에서 뇌병변이 컸던 것도 아닌 데다 경련을 예방하는 약제도 쓰고 있었는데, 아이가 심폐소생술을 받아야 할 만큼 경련을 했다는 것에서 의구심이 생겼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봐 왔던 신경분과 교수님은 아이의 부모를 아동학대로 신고하였다. 이후 조사를 통해, 부모가 아이를 해하기 위해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씌우고 질식을 유도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부모는 구속되었고, 뇌손상이 크게 남아 압력을 낮추기 위해 수술과 시술을 반복한 끝에 살아남은 아이를 포함한 세 남매는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그리고 할머니는 재판에서 증언을 하던 그 교수님을 응급실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다시 할머니와 면담을 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 신경분과 교수님에게 패악질을 부렸던 것인지, 할머니는 에너지를 잃은 시든 식물 같았다. 이윽고 침묵이 깨졌다. 할머니의 마른 입술에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지금도 옆집에 두 명을 맡기고 왔어. 옆집에서 더는 못 맡아주겠다네. 그럼 이제 어떡하냐고, 부모를 다 갖다가 감옥에 처넣으면 애들은 어쩌라고. 이 늙은이는 이제 기력이 없고 애는 정상이 아닌데, 나 혼자 뭘 어째. 도저히 애 셋을 볼 수가 없는데, 어쩌라고.”
이내 목소리에 울음이 가득 찼다. 오열하는 할머니를 앞에 두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더 이상 입원을 해야 한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봤던 아이가 한순간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악화된 상태로 생사의 경계에 달려 있는데, 담당 의사라면 이를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신고를 하고, 재판에서 의학적 소견을 증언하고, 그것이 역할의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역할의 끝은 없었다. 아이는 여전히 진료가 필요하고, 아이를 떠맡은 할머니는 원망을 투사하여 담당 의사에게 쏟아낸다.
비난은 쉽다. 우리는 매체를 보면서 아동학대를 한 부모를 욕하고, 검찰의 구형 과정을 보면서 더 높게 형을 책정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여러 의견을 쏟아낸다. 그러나 감옥에 부모를 보낸 뒤 남은 아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없다. 나쁜 사람들이 벌을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하다.
안타까운 아동학대의 이야기들은 모두 비슷한 배경과 흐름을 갖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부에게 이미 어린아이들이 둘이나 있었고 계획에 없던 셋째가 태어난 이야기의 배경에, 그 아이가 평생 아플 수도 있다는 장애를 진단받은 부모의 근심이 갈등 요소로 더해지고, 결국 이 무거운 부담감은 압박이 되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는 절정(climax), 그리고 처벌받는 결말까지.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환경과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 사회의 취약점이자 결점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들의 흔한 주제가 아동학대는 아니었을까?
이 비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과연 의사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의인이었을까, 아니면 악인이었을까. 그의 신고가 아이를 구한 것이었으니 아이에게는 의인이었을까 하다가도, 이 아이의 형제인 또 다른 두 아이에게는 학대를 신고한 의사가 가장 큰 악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극적인 이야기는 아직도 흘러간다. 사회적 결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고서는, 그리고 이야기의 배경에 대한 개선이 없이는 이야기는 계속 생성될 것이다.
잠시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 끝나지 않은 이야기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진료가 이어진다. 진료 안에는 수많은 아이의 삶이 있다. 성인에 비하면 짧은 삶이건만, 그 안에 든 사연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10세 아이가 구토와 설사로 내원하였다. 아이는 열도 없고 혈압도 정상이었으며, 다른 생체징후도 다 정상이었다. 진료를 해 보니 청진상 장음이 항진되어 있고 엑스레이상 가스가 차 있는 것이, 흔한 장염 같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듯 엄마에게 기대어, 얼굴을 찡그리며 힘들다고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칭얼거린다. 간단한 검사를 하고 수액을 맞은 뒤에 귀가하기로 했다.
아이는 태어나 백일이 채 안 되었을 때 뇌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뇌출혈이었다. 뒤집기도 못하는 시기, 아이가 혼자 다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때 아이에게 발생하는 외상은 100% 양육자에 의해서다. 양육자가 안고 있다가 같이 넘어지거나 기저귀를 갈다가 아이를 떨어뜨리는 등의 실수로 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의료진들은 이 시기 아이들의 외상은 항상 양육자로 인한 학대의 가능성을 의심한다.
아이는 후자였다. 연이은 뇌출혈과 뇌수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는 각막이식수술도 받았다. 확실한 확대였다. 아이의 기록은 무서웠다. 뇌출혈, 각막손상, 망막출혈, 쇄골골절, 갈비뼈골절도 있었다. 당시에는 아이가 살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는 결국 학대로 인해 친모와 분리조치되었고 시설로 옮겨졌다. 그리고 거듭된 수술을 받으며 양부모를 만났다. 재활의 기간도 길었다. 그러나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양부모는 지금까지 아이를 키웠다.
양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아이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보여준다. 당연히 발달도 정상이고, 눈도 잘 보이고, 키도 제법 컸다. 평범한 초등학생처럼 보였다. 마치 아이의 그런 과거는 기록 속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복한 열 살의 그맘때 아이처럼 보였다. 아이는 수액과 약을 맞고 나서 많이 편안해졌다며, 이번에는 엄마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씩씩하게 잘 걸어 나갔다. 그래도 엄마의 손은 꼭 잡고서…….
십여 년 전, 아이를 학대로 신고했던 의사는 이런 행복한 결말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아이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테다. 그의 역할은 거기까지였고, 이는 그에게 큰 비극적 결말로 끝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는 강한 생명줄을 쥐고 이겨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이의 진정한 ‘부모’님이 있었다. 아이를 낳은 건 아니지만 아이를 품은 천사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를 위한 천사는 친부모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아 있다. 그것은 최악이었던 것 같은 절망을 딛고 일어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혹은 아이가 아직 자기 천사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숨겨진 천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면 이 이야기에서 의사의 역할이 의인이 되든지, 악인이 되든지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전화기를 들었다. 손에 든 수화기를 단단하게 쥔다. 이 이야기가 비극일지, 행복한 결말일지, 하나의 해프닝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작은 아이의 생에 또 다른 이야기가 되리라.
“아동 학대 좀 신고하려고요.”
제24회 한미수필문학상 심사평
긴 글을 써 온 사람으로서, 말이나 표정보다 글이 사람의 마음을 더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에세이는 말이나 표정보다 더 솔직하고 내밀한 표현 수단인 것 같습니다. 올해 접수된 원고들은 상당수가 ‘의료 대란’이 벌어지는 중에 집필됐을 것이고, 여러 원고에서 예년에 비해 의료 현장의 고단함과 그 풍경들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경, 정서적인 고뇌가 더 많이 느껴진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그 원고들을 대하는 심사위원들의 마음 역시 여느 때보다 무거웠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의 의미, 의사와 환자, 의사와 사회의 관계를 깊이 살피는 글을 더 지지하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심사했습니다.
특히 올해는 심사위원들이 대상감이라고 올린 원고 세 편은 모두 소아청소년 환자를 다룬 글이었는데, 이것이 단순한 우연인지를 놓고 가벼운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 작품은 비슷한 시기에 접수되었는지 원고 번호도 거의 연이어 붙었습니다. 접수 순서대로 〈무거운 통화〉, 〈최고령 환자〉, 〈혼자 하는 인계〉입니다.
세 글 모두 어느 작품이 대상으로 선정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수작인데 소아청소년 환자라는 대상은 같지만 글쓴이의 생각이 머문 지점과 독자에게 주는 울림은 각각 달랐습니다. 그 외에 성(性) 문제를 말하는 글, 질병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다 넓게 보려는 글이 늘어나 반갑다는 촌평도 나왔네요.
심사위원들이 지지하는 작품은 하나로 쉽게 모아지지 않았고, 투표를 두 번이나 거친 끝에 〈무거운 통화〉가 대상의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의사는 여러 결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집니다. 그 중에는 아동 학대 의심 사례를 수사기관에 신고하는 것도 있습니다. 촘촘하게 짜인 의료 시스템, 사법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지만 그 개인은 시스템들이 만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매뉴얼대로 한 행동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은 사례도 목격한 바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그저 규정에 정해진 대로 따르면 충분하다는 자세는 혹시 70년 전 나치 독일에서 아이히만이 지녔던 마음가짐과 같은 건 아닐까요. 반대로 자기 마음의 불편을 양심이라는 말로 포장해 수많은 사람들이 숙고하고 토론해 만든 규정을 어기는 것이야말로 괴물로 향하는 길인 건 아닐까요.
〈무거운 통화〉는 그 고뇌를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긴장감까지 얹어서 독자에게 전합니다. ‘이 이야기가 비극일지, 행복한 결말일지, 하나의 해프닝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마지막 문단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수상을 수상한 〈최고령 환자〉는 분량을 더해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인물들의 개성이 돋보였습니다. 길어져도 좋겠다고 썼지만, 현재 분량으로도 이야기로서 매력이 살아 있습니다. 그만큼 압축을 잘했고, 읽는 이의 감정을 효율적으로 건드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22살이 되어서도 어릴 때부터 진료 받던 소아청소년과를 다니는 ‘최고령 환자’ 젊은 여성, 아내를 여의고 이제 곧 딸과도 작별해야 하는 블루컬러 아버지, 그들을 지켜보고 때로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의사들의 모습을 과장되지 않게 잘 전했습니다.
〈최고령 환자〉가 짧은 소설 같았다면 〈혼자 하는 인계〉는 아주 잘 쓴 르포르타주였습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신생아 집중치료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바탕으로 소아과 의사 부족 현상과 열악한 진료 환경, 전공의 사직 사태는 물론 외국인 노동자 이슈, 사람의 생명을 책임진 사람의 중압감까지 매끄럽게 풀어냈습니다. 역시 우수상을 수상한 〈의사는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가〉와 함께, 소명의 무게를 그 소명을 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글이었습니다.
〈의사는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가〉는 소명의 무게를 그 소명을 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잘 전달하는 글이었습니다. 가치 있는 삶을 만드는 고집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들고 여운을 남기는 좋은 직업 에세이의 본보기였습니다.
훌륭한 의사를 뽑아야 하는 걸까, 훌륭한 문장가를 뽑아야 하는 걸까, 매번 한미수필문학상을 심사할 때마다 위원들이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늘 결론을 못 내는데, 올해는 훌륭한 의사이자 문장가들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수상자 분들께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