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임진년의 기억 (8)

작성자최상근|작성시간26.06.07|조회수26 목록 댓글 0

□ 6창의倡義 결의

 

인각암에 오르니 산그늘이 아직 젖어 있었다. 이희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본디 학문을 같이 하던 벗이었으나, 전란이 일어난 뒤로는 공산의 암자들을 오가며 피난민과 파발, 관속과 승려들의 말을 묶어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산중으로 흘러드는 세상의 소문이 먼저 그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셈이었다.

그에게 전하의 소식을 물었다.

평양의 공기는 이미 사람 살 곳이 아니오. 임금의 거취도 바람처럼 흔들린다 하오. 왜적의 발걸음이 너무 빠릅니다.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말을 남쪽으로 오는 사람마다 똑같이 전하고 있소.”

평양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이희의 말이 산바람처럼 가슴 밑을 스쳤다. 나는 곧장 삼성암으로 향했다. 공산의 능선 가까이 있는 암자였다. 산길은 사람의 기척이 끊겨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 소리조차 경계처럼 들렸다. 나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을 거두었다. ‘언제가 아니라 지금이어야 했다.

암자에 도착하니 종기의 모친이 죽 한 그릇을 내어주었다. 그 따뜻함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잠시 뒤 종기가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빛이 서려 있었다.

병장기 마련이 잘돼 가는가?”

. 쇠를 구할 곳이 없습니다. 마을은 텅 비었고, 대장장이들도 다 피난 갔소.”

남은 것만으로는 부족하겠군.”

턱없이 부족하오. 장정의 수가 늘어나는데, 창하나 쥐어 줄 수 없는 실정이니. 군량도 그렇고선생님, 이렇게 모아서 싸움이 되겠나이까?”

나는 죽 그릇을 내려놓고 그의 눈을 보았다.

지금 우리가 물러설 수 있느냐를 먼저 생각해야 하네.”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이 될까 두렵소.”

나도 두렵네.”

말을 잇는 데 한참이 걸렸다.

허나 왜적은 멈추지 않네. 우리가 멈추면, 그다음은 고향이고, 부모고, 자식일 것이야.”

말씀 잘 새기겠나이다. 병기 마련을 끝까지 해보겠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 사람의 어깨가 이토록 가볍고 믿음직스러운지. 전란은 늘 그 두 극을 동시에 떠안게 했다.

서쪽 산등성이로 몸을 돌렸다. 굳이 험한 능선을 택한 것은, 혹 아래 길에 적의 눈이 도사리고 있을지 두려워서였다.

능선을 돌아 견불암에 내려섰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짧은 하루였으나 마음은 수십 리를 헤맨 듯 무거웠다. 평양의 소식은 나를 결단 쪽으로 몰아세웠다. 삼성암의 대화는 다시 나를 겁박했다. 해야 하는 일은 늘 절망적이었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들었소? 해촌이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었다 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설마.”

곽재겸의 두 아들도 왜적의 칼끝을 피하지 못했다 하오. 집안이 통째로 무너졌다 하니.”

세상에나!”

그 애들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릴 마중 나왔었는데.”

어제 함께 웃던 얼굴들이, 오늘은 모두 흙이 되었다니.”

서집도 크게 다쳤소! 어깨를 베여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오.”

살아 있다 하나 상처가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오.”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해촌의 불길은 단순한 한 고을의 화마가 아니오.”

오늘은 해촌, 내일은 우리 차례일지 누가 알겠소.”

주위는 더 깊은 정적에 잠겼다.

 

부사는 병사들을 모아놓고도 산중에서 움츠린 채 창의 손잡이만 매만졌다. 그의 얼굴엔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 분개가 적을 향한 결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산중에 오래 머물다 보면, 처음의 분노와 토적의 기개는 흐려진다. 끝내는 병력을 거느려 제 몸을 지키는 모습이 되고 만다.

부사는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병력이 모자란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모두 죽을 뿐이다. 나라도, 그대들도 다 잿더미가 될 게 뻔하지 않겠소!”

그가 의병 창의를 싫어하는 까닭은 단순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성 하나를 지키다 무너져 내린 지휘관들의 최후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었다. 조정은 명확한 명도 내리지 않고, 책임은 오롯이 지방 지휘관에게만 덮어씌워지는 현실, 그 부당함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의병은 공식 군령의 틀 밖에 있었다. 한 번 일어섰다가 패하면 역적이 되기도 한다. 이겨도 조정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알았다. 그 앎이 그를 더 깊이 묶어두고 있었다.

의병이란 게 말은 그럴듯해도 결국엔 책임질 곳이 없소. 죽으면 허망하게 죽는 거요. 살아남으면 조정에서 뭐라 할지 모르는 일이지. 이런 판국에 감히 먼저 나서겠다니. 미혹한 짓이오.”

그 말은 그 자신을 향한 자책인지, 우리를 향한 경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깊은 염려 속에는 두 자락의 마음이 동시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야 한다는 서늘한 의리와, 한 번 잘못 나서면 죄인의 몸으로 생을 마칠지도 모른다는 현실의 심연. 그 어둠이 서로 부딪히며, 그를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산 출신의 한 장수는 주먹을 굳게 움켜쥐고, 분노를 억누르느라 온몸을 떨었다. 그의 분노가 무엇이든 부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족쇄는 무엇보다 무겁고 단호했다.

 

천험의 요새라 일컫는 공산성을 직접 보고 싶었다. 전란의 불길이 사방을 집어삼키는 이때다. 산세의 험준함과 그 속에 깃든 옛 성의 위용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갈망이 일었다. 나는 서사술과 함께 몇몇 숙부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피난의 행렬 같으면서도, 무너진 세상 속에서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의지처를 찾는 순례길 같았다.

정각암에 이르니 조계맹, 유이안, 서발 등이 먼저 나와 있었다. 그들의 얼굴빛은 핏기 없이 수척했다. 모두가 피로에 절어 있었다. 눈빛만은 날이 선 칼처럼 번뜩였다.

오셨군.”

조계맹이 짧게 말을 건넸다. 그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기다렸다는 듯 묵직했다.

흩어졌던 이들이 이렇게 다시 모이는구나.”

이 자리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힘을 모으는 순간이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길목마다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했다. 숲은 더 깊이 어두워졌다. 그 어둠 속에서 서로의 발걸음 소리가 겹칠 때마다 위로가 되었다. 바람에 묻힌 심장의 고동이 서로를 부르는 듯했다.

견불암의 승려 일혜도 뒤따라왔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우리 곁을 걸었다. 산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며 흘렀다. 견불암에서 들려오던 염송의 소리가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듯, 숨소리가 기도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었다.

나의 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왜적을 벨 것인가, 아니면 그 악을 멈추게 할 것인가. 왜적의 살기를 마주하면서부터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의로써 그들을 베겠다 다짐했건만, 내 붓이 다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곧 사람의 마음이리라.

人心惟危道心惟微.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세한 법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칼을 들려 하고 있었다. 성현께서 이르셨다. 以直報怨以德報德. 원한에는 곧음으로, 덕에는 덕으로 갚으라 했다. 하지만 그 곧음이 반드시 칼이어야 하겠는가?

그러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죽어 가는데, 싸워서 적의 목숨을 거두지 않음이 어찌 의로울 수 있겠나? 사실 의란 싸움의 모양이 아니다. 마음의 바름이다. 미움으로 싸우면, 미움이 나를 삼킬 것이다. 칼은 악을 끊을 수 없다. 조이안이 말을 걸어왔다.

나으리의 의는 이미 칼을 넘어선 듯 보입니다.”

무슨 말인가?”

惟精惟一允執厥中. 오직 정밀히, 한결같이, 그 중심을 붙잡아라. 이것이 곧 도심이요, 나라를 살리는 길일 것입니다.”

전란 속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칼과 활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함께 걷는 사람들의 기개, 묵묵히 이어지는 발걸음, 침묵 속에서 스며드는 기도의 울림이야말로 공산성으로 향하는 우리의 유일한 길잡이였다.

공산성이라면버틸 수 있겠지?”

누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성을 떠올렸다. 산세가 방패 되고, 칼보다 바위가 먼저 서 있는 그 성이 우리를 품어줄 것인가. 아니면 그저 돌무더기에 불과할 것인지.

나라가 이리 흔들리는데, 산성 하나가 버팀목이 되겠나.”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면 돌벽도 무너지는 거다. 우리가 마음을 붙들면, 다시 나라의 울타리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우리가 기댈 곳은 어디인가. 발걸음 하나하나에 희미한 믿음과 불안이 교차했다. 어둠 짙은 산길 위에서 우리의 작은 무리는 그렇게 요새를 향해 나아갔다.

산성에 이른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빛이 산허리를 붉게 물들였다. 남문으로 들어서니 무너진 성벽 사이로 칡이 자라 있었다. 돌마다 세월의 흠집이 깊었다. 그 사이를 뚫고 다시 생명이 피어나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그 돌을 손으로 짚었다. 차가우면서도 묵직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비장함이 내 가슴안에 서서히 퍼졌다. 그 느낌이 스며든 자리에 훨씬 깊은 어둠이 존재함을 알았다. 그 어둠속으로 함께 들어가야 할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만이 텅 빈 성을 감돌았다.

언제쯤 여기에 다시 사람이 가득 찰 수 있을까. 차디찬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이곳이 마지막 보루라 말할 수 있을까. 성 위로 부서진 꿈들이 흩날리는 듯했다. 성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돌 하나하나가 우리의 늦은 도착을 속삭였다.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감격이 갑옷으로 변해 나를 감싸안았다. 참담함도 깊이를 더했다. 나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성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여전히 폐허였다. 동시에 묵직한 옛 현장이기도 했다.

우리는 곧장 동쪽 곡성대로 올라갔다. 잠시 숨을 고르며 앉았다. , , 북 삼면을 굽어살폈다. 영천과 경산, 팔거의 산과 들, 강줄기와 마을 터가 발 아래 길게 이어졌다. 잠시나마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리는 듯했다. 옛 장수들의 기척이 여전히 산성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지붕은 오래전 훼철되어 남은 것이 없었다. 흩어진 기왓조각들이 아직도 땅 위에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손에 쥐어보았다. 싸늘한 감촉 속에 당년의 웅장함이 어렴풋이 살아났다. 한때는 군사들의 발걸음이 울렸을 테지. 화살과 북소리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나는 폐허 속에서도 그 근고近古를 상상했다.

허물어진 돌과 깨어진 기와 속에서도, 성곽의 혼백만은 건재하리라. 나라가 무너져도 산과 성은 남았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잡게 하는 것 같았다.

성의 동쪽 길을 따라가니 숲 사이로 허술한 초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짚과 나뭇가지를 엮어 급히 지은 듯,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 수효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몇 달 전만 해도 이 산성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몸을 의탁했었는지를 말해주었다.

막 안을 들여다보니 모두 비어 있었다. 처음엔 오싹한 두려움이 앞섰다. 혹 적이 이미 휩쓸고 간 자취가 아닐까. 숨죽여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떠난 자들은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불씨를 지피리라. 빈 초막들은 비록 적막했으나, 그 자체로 다시 살아날 가능성을 품은 흔적이었다.

초막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바람을 헤집으며 다가왔다. 어스름이 막 내려앉는 시각, 희미한 그림자들이 성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경응, 강충립, 강홀, 도진효, 도진성

한때 동쪽과 서쪽에서 각기 난리를 맞아 생사를 알 길 없이 흩어졌다. 그들이 세월의 틈을 비집고 나온 듯 하나둘 성안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을 죄던 긴장이 풀리며, 다리가 힘을 잃을 듯했다. 우리는 거의 숨을 멈춘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초췌한 얼굴, 먼지 묻은 옷자락,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 믿어도, 이렇게 현실이 될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살아 있었구나.”

그 말 한마디에 오래 쌓인 두려움이 사라졌다. 전란 속에서 잃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의 기적이었다.

도경응 등이 밥을 싸서 왔다. 우리 일행 또한 산 아래에서 가져온 소반을 풀었다. 성안의 임수 속에 둘러앉으니 해는 이미 서산에 잠겼다. 산새의 울음도 멀어져 갔다. 밥 냄새가 전란의 냄새와 뒤섞여, 묘한 따뜻함이 일었다. 그저 밥 한 그릇이었지만, 서로 남은 힘이 되었다. 말이 없어도 되는 자리였다.

어둠이 성벽의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시 각자의 어둠 속으로 흩어져야 했다. 떠나는 발걸음이 묘하게 가벼웠다. 살아 돌아온 이들의 발자국. 오늘 하루 그 성을 다시 요새로 만들었다.

 

채정응을 만나기 위해 확배점으로 향했다. 그는 군사전략에 일가견이 있었다. 나는 그의 전략이 궁금했다. 동화사를 지나 중로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이간을 만났다. 그가 전한 말은 피로 쓴 소식이었다.

백헌수백행수 등이 어제 주륙 당했다는 것이다. 본디 두 사람은 고을의 유생을 자처했다. 예전에는 문안에도 출입하던 자들이었다. 전란이 닥치자 적에게 붙어 다니며 신수를 유지했다. 온몸을 비틀어 바람을 타고 살아남는 데 능했다. 적을 쫓아다니며 호령을 가장하고, 백성을 협박하며 재물을 모았다. 사문斯文을 어지럽힘이 지극하니, 들은 자 마다 통탄했다. 어찌 유학의 이름을 빌려 몸을 더럽히랴.

은흥복이 그들을 붙잡아 의로써 처단했다. 참으로 포상할 만했다. 그는 본디 향리의 잡직을 맡은 말단이었다. 변란의 때에 나아가 옳음을 좇았으니, 신분이 무엇이겠는가. 대의는 신분을 가리지 않거늘, 세상은 어찌하여 평소 그를 낮게 보았던가.

사람의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세상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하늘의 뜻이 비록 아득하나, 의로운 자 하나가 세상을 구한다. 도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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