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동계곡에서
어제가 말복이었다. 이제 입추도 지나고 삼복도 넘어섰다. 하지만 더위는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는다. 이열치열, 산을 오르며 후줄근하게 땀을 흘려보는 거다. 계곡물에 텀벙 뛰어들어보는 거다. 산과 계곡물이 있으니 아니 좋으랴. 물은 자꾸 낮게 낮게 계곡을 타고 물줄기를 만들며 힘차게 내려가는데 나는 거슬러 올라가듯 능선을 따라 갈모봉 정상을 오르고 있다. 처음 내딛는 산길도 아닌데, 지레 힘들다고 잔꾀를 부릴수록 발길은 점점 버거워진다. 삼복더위의 연장선상에서 그 누군들 땀이 흐르지 않고 어렵지 않으랴. 다만 나름대로 참고 견뎌내며 자신과 싸우는 인내력이다.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한 발 두 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래도 우거진 숲과 함께하니 좋다.
그 누가 가는 곳마다 저토록 가팔라 접근하기 험준한 곳에도 길을 만들어 놓았을까? 얼핏 궁금하기조차 하다. 한여름 녹음으로 잔뜩 우거진 숲속은 길이 없을 듯싶어도 길은 있다. 발길은 발길을 부르듯 요리조리 헤집고 잘도 찾아간다. 오르는 겨움이 있으면 내리는 가뿐함이 있다. 그 과정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그 참맛을 진지하게 느낄 수 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핥으며 지날 때마다 그 어찌 감격스럽도록 고맙지 않으랴. 계곡에서 보는 제한된 하늘과 확 트인 정상에서 보는 하늘은 사뭇 다르게 들어온다. 그래서 호연지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발아래 땀방울 같은 물기가 그야말로 시작은 미미해도 계곡에서 모여 함께 흐르면서 물길이 된다.
어찌 보면 저들은 더워야 사는 것들이다. 더위를 베어 먹고 사는 것들이다. 나무가 무성하고 풀이 우쭐하게 자랐다. 그러고 보면 너무 무덥다고 아우성만 칠 일이 아니다.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도 시나브로 삶을 짜릿하게 누린다. 저렇게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저렇게 줄기를 곧게 세우고 꽃 피웠던 자리에 열매를 맺어 익어가고 있다. 뒤늦게 꽃이 피어 멋쩍은 듯 웃고 있다. 가장 활동하기 적합한 계절인 것처럼 제 몫을 챙기는 데 소홀함이 없지 싶다. 덥다는 것은 한낱 핑계였다. 밤낮없이 펼쳐놓고 마음껏 삶을 누리는 것이다. 더위도 삼키고 빗줄기도 맞으며 여름을 즐기는 거다. 찬 바람이 불어오며 가을이 덥석 올까 봐 아직은 아니라며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물아, 너는 좀 막막하여도 강이 그립다거나 넓디넓은 바다가 보고 싶어
무작정 낮은 곳만을 좇아서 그리 바삐 흐르는 건 아닐 터
돌아, 너는 수천수만 년 허구한 날 묵묵히 수도하는 도인인 양 한자리에
꿈쩍 않으면서 가장 의연하고도 고고한 척하는 건 아닐 터
숲아, 너는 하늘 아래에서 가장 낮은 곳처럼 푹 파인 계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안쓰러워 옷자락처럼 휘감아주는 건 아닐 터
솔아, 너는 기슭에서 붉은 종아리에 힘줄 생기도록 버티고 서서 푸르른
머리 은은한 향기 슬쩍 뿜고 느긋이 지켜보는 건 아닐 터
풀아, 너는 깊은 산 속 비록 키는 작아도 계절을 읽고 느끼며 아름다운
꽃 피워도 보아주는 이 없다고 투정 부리는 건 아닐 터다.
새야, 너는 뭐가 그리 당당한지 때로는 슬픈 울음소리 때로는 감미로운
노랫가락처럼 지저귀며 세상만사를 읊조리는 건 아닐 터
해야, 너는 계곡에서 계절 따라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는 일들이 자꾸만
궁금한지 주위를 환히 밝히며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닐 터
달아, 너는 밤이면 내려와 나뭇가지에 걸려 보고 돌 위에 앉아도 보고
물속에 잠겨보면서 네 나름대로 멋을 부려보는 건 아닐 터
흙아, 너는 초목은 물론 못된 벌레에게도 자리를 아낌없이 내주고 품어
생명을 돌아보는 것은 달리 할 일 없어 그런 것이 아닐 터
산아, 너는 푸르다 못해 검도록 땡볕으로 내리쬐는 여름을 만끽하면서
초록바다로 번들번들 출렁거리는 건 싫어서가 아닐 터다.
바람아, 너는 귀가 옅으며 입 간지러워 주변의 것들을 다소곳이 가슴에
품지 못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흘리고 다니는 건 아닐 터
하늘아, 너는 바다와 같고 큰 화판과도 같아 이것저것 그리고 담으면서
계곡 하늘이 높은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닌 포용하는 것일 터
폭포야, 너는 물 없으면 한낱 절벽일 수밖에 없어 네 힘의 근원은 물로
도도한 목청에 산자락 울리는 것은 그냥 허세 부림 아닐 터
이끼야, 너는 나무나 바위에 빌붙어 죽은 듯싶다가 파랗게 생기가 돈다
언제나 햇볕을 멀리하는 건 두려움에서 그런 것이 아닐 터
사람아, 너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뽐내며 아주 이기적이다. 쓰레기 하나
처리 못해 눈살 찌푸리는 건 자연을 얕잡아본 것이 아닐 터
- 선유동계곡에서
무더운 날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보다 더 좋은 곳이 있으랴. 그도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을 만큼 빼어난 경관을 갖춘 곳이라면 가슴이 설렐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고고함에 정겨움이 묻어나는 선유동이다. 상류에서 물길 따라 자연스레 타고 내려간다. 물은 가만히 흐르지 않고 온갖 표정을 짓고 이리저리 일탈에 이지러지기도 하고 돌과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기도 한다. 폭포에서 겁 없이 뛰어내리다 하얗게 질려 소리를 내지르면서 깊은 소를 만들기도 한다.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어울려 신비감까지 자아낸다. 바위 또한 장기자랑이라도 하듯 저마다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계곡에 땀을 담그고 몸을 담그고 피로를 담그며 하루를 담그고 여름을 담근다.
작은 군자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하는 갈모봉을 오르는 길이나 그 아래 장성봉 자락에서 발원한 선유동계곡이나 수없이 풍상에 갈고 닦여 특별난 모습으로 바뀐 바위들은 여전히 개성을 드러내듯 뽐내고 있다. 그중에 선유동문, 경천벽, 학소대, 연단로, 와룡폭, 난가대, 기구암, 구암, 은선암은 그럴듯한 전설까지 가득 담고 있을 만큼 빼어난 모습으로 지나는 이의 발길을 은근슬쩍 당기며 선유구곡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제5곡의 와룡폭은 용이 물을 내뿜듯 거침없이 쏟아내는 물소리가 벼락 치듯 흩어지며 물안개를 만들어 내는 모습은 장관이다. 무더운 여름날 찾아들기에 더없이 좋은 피서지로 가슴까지 시원하게 씻겨 내린다.
저토록 잠시도 멈춤 없이 바지런하게 흐르는 물도 자동차로 불과 10여 분 거리 하류에 이르러서는 선유동 본래 이름에 미련 없어 지우듯 화양동으로 화려하게 거듭난다. 이처럼 선유동계곡과 화양동계곡은 같은 줄기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같은 속리산국립공원 내에서 같은 물줄기를 받고 흘러도 화양동계곡이 남성적으로 웅장함이 깃들여있다면 선유동계곡은 여성적인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비견되며 보는 마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선유동계곡을 느긋이 거닐며 새삼 눈여겨본 것은 자연이란 한 틀에서 서로 보듬으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빼어난 경관에 듬직하며 멋들어진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