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
卍瞛 조 성 복
며칠 후면 서울 사는 자식들 곁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삼십여 년 가까이 살던 살림이라 엄청났다.
아내가 쓰는 장롱이며 머릿장, 화장대 같은 안방 가구부터, 살면서 사들인 거실장, 탁자, 오래된 목재 피아노까지 그야말로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살림살이라 거실로 끄집어내고 보니 대단했다.
엄두가 나질 않자, 서울 사는 아들과 두 딸이 주말마다 내려와 이거 치워라, 저거 버려라. 서울 살림은 단출해야 한다고 간섭을 해댔다. 게다가 이사 갈 서울집에는 이미 새로운 가구들을 들여놨기 때문에 구닥다리 살림은 필요없다는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어쩔 수 없이 그러마는 했으나 애들이 가고 나면 다시 가구들을 제자리에 들여놓곤 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어제는 서울서 내려온 애들이 초강수를 썼다.
애들이 직접 가구를 재활용분리수거장으로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파손을 해서 말이다.
아내가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간섭을 했다. 그러자니 언성도 높아졌다. 삼십 년 넘도록 손때묻은 가구인데, 너희가 쓰는 것도 아니면서 뭘 안다고, 이게 어떤 물건인지 알기나 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옆집 아주머니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그래도 애들은 못 들은 척 이것 저것 들어냈다.
급기야 방으로 들어간 아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애들은 막무가내였다.
가구가 모두 빠지자 방과 거실이 헐렁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재로 쓰는 내방 가구들이다.
낮에 아들이 행정복지센터에서 구매해 온 폐기물 스티커를 책상과 책장, 서랍장 등에 갖다 붙이면서 아버지 방은 단출하니 아버지가 알아서 치우라 하고는 가버렸다.
두어 평 남짓 되는 서재로 쓰는 방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았다.
사면 벽으로 둘러친 책장과 컴퓨터 책상, 그리고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서랍장이 모두였다.
그러고 보니 초고로 쓴 원고지나 탈고한 원고 뭉치가 열댓 상자나 여기저기 쌓여있었고, 무슨 책이 그리도 많은지 뒤 베란다 공간까지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종종 아내의 잔소리로 저놈의 책과 서랍장 좀 내다 버리라 했지만 내가 고집 피우길, 책과 서랍장만은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건강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책이라 우기면서까지.
그런데 낮에 아들이 경비실에서 빌려다 놓은 손수레에 책을 실어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책을 실어내고 남아있는 책을 책장에 정리한 뒤 마지막으로 서랍장과 마주했다. 그리곤 어떻게 하나였다.
이 서랍장이야말로 나와는 인연이 깊다.
삼십여 년 전 이사 들어올 무렵 전에 살던 집주인이 쓰던 물건이다. 이사를 하면서 버리고 간 세간살이 중에 유독 눈에 들어온 가구가 바로 서랍장이다.
원목 가구에 방수제를 발라 물결무늬가 살아있고 고풍스러운 데다가 튼실하기까지 해보였으며 서랍마다 잠금장치가 멀쩡해 그날 밤으로 아내와 둘이 합쳐 서재로 옮겨 놨다. 그게 인연이 돼 여태까지 잘 사용해왔고.
그런데 이제는 버려야 한다. 낮에 애들한테 사정하길, 이것만은 가져가자고 했으나 요즘에 누가 이런 걸 쓰느냐며 서울집에 더 좋은 것으로 하나 놔드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깝지만 내다 버려야 한다.
한참을 서랍장과 마주 앉아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서울 사는 아들이 집에 도착했다며 말끝에 가구는 다 들어냈냐고 콕 집어서 물어왔다. 못 믿는 것 같아 언짢은 투로 알았다! 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스카치테이프를 찾아 서랍장을 둘둘 동여맸다.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이.
원체 무거운 가구라 한참을 걸려 손수레에 실었다.
현관문 여는 소리에 아내가 일어나 내다보더니 혼자서 되겠냐며 거들었다.
흐리던 해거름 날씨가 밤이 되면서 비로 변했다.
그 비를 맞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분리수거장에 도착해 거기 빈자리에 서랍장을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서랍장이 꼼짝없이 비를 맞는다. 이를 어쩌나! 싶어 안타까이 서 있는데 뭣하냐며 아내가 잡아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파트 경비원이 다가서서 스티커는 붙이셨냐? 고 묻더니 이 좋은 가구를 왜 버리냐? 고 덧붙이자, 아내가 돌아서서 부드러운 말로 덧댔다.
“이 서랍장 참 좋은 거예요. 우리 아저씨가 여태 쓰던 물건인데 실은 내놓기가 아까워요. 원목 가구라 누가 갖다 써도 되는데…” 하고는 경비원을 슬쩍 쳐다본다.
별 반응이 없자, 토라지듯 아내는 내 소매를 잡아끌며 어서 들어가자고 했다.
집에 들어와 창고를 뒤져 헌 비닐을 찾아냈다.
테이프와 비닐을 챙겨 들고 재활용수거장으로 다시 나갔다.
그새 내다 놓은 서랍장이 비를 맞아 상판 위가 흥건했다. 가져간 신문지를 주워 상판을 닦아내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씌웠다. 그리고 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다음 차양이 있는 지붕 밑으로 끌어들였다.
다행히 비는 맞지 않고 바람까지 막아주니 적이 안심이 된다.
또 한 번 경비원이 나타나서 그렇게 애지중지할 거면 뭣 하러 버리냐고 해 애들 핑계를 대려다 말고 집으로 들어와 텅 빈 서재를 들여다봤다. 썰렁했다. 왠지 거기 서있기 뭣해 거실로 나와 TV 리모컨을 잡았다.
때마침, TV에서는 대중가요 오디션을 하고 있는데 어떤 무명 가수가 「무정」이란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고 있었다.
“날 데려가오! 날 데려가오! 왜 버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