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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수필(문예)

또바리 / 장용숙

작성자서강석|작성시간26.06.16|조회수62 목록 댓글 0

또바리

장용숙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숟가락 들어가는 것처럼 보기 좋은 것은 없다.”는 말을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다. 모내기 철이 되면, 바닥이 말라서 갈라져 있던 논이 어느새 물을 머금고 하늘을 품는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물 위로 바람이 지나가면 잔물결이 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모들이 줄지어 들어선다. 예전에는 허리를 굽혀 손으로 심던 모를 이제는 기계가 대신한다. 논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간 뒤로 푸른 줄무늬가 반듯하게 새겨진다. 세상은 빨라졌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손길과 품앗이의 정겨운 풍경은 조금씩 사라진 듯해 아쉽기도 하다.

  어머님은 해마다 우리를 두 번은 꼭 부르셨다. 모내기하는 날과 타작하는 날이다. 다른 일정이 있어 가지 못하면 무척 서운해하셨다. 그때는 그저 일손이 부족해서 그러신 줄 알았다. 돌아보면 어머님은 일을 시키려 하기보다 자식들에게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우리를 오라 하시는 날은 농사일로 가장 바쁜 날이기도 하지만, 먹을 것이 가장 풍성한 날이다. 품앗이 나온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왁자지껄 웃음이 넘쳤고, 그 속에 자식들이 함께 있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어머님의 사랑은 늘 밥상 위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모내기 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새벽부터 마당이 떠들썩했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논에서는 탈탈거리는 경운기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머님과 형님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모내기 날은 작은 잔칫날이다. 아침을 먹고 나면 새참, 점심을 먹고 나면 또 새참, 저녁까지 하루에 다섯 번 상이 차려진다. 상 위에는 평소 어머님이 아끼시던 밑반찬들이 빠짐없이 올라온다. 바삭하게 튀긴 고추부각, 붉은 새우가 들어간 짭조름한 마늘쫑 볶음, 부추를 숭숭 썰어 넣고 지진 장떡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피어난다. 아침상을 치우기가 무섭게 새참 준비가 시작된다. 일꾼들이 땀 흘리며 일하다가 논두렁에 걸터앉아 국수 한 그릇을 비벼 먹고, 이보다 맛있는 음식은 없다는 표정이다. 거기에 막걸리가 한 사발씩 돌 때면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새참을 나르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하얗게 삶은 소면과 볶은 김치, 각종 양념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담은 큰 양은다라를 논으로 가져가라는 심부름을 맡았다. 어머님은 내 머리 위에 또바리를 얹어 주셨다. 짚을 둥글게 엮어 만든 또바리는 큰 물건을 머리에 일 때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머리에 임질을 해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걸음을 떼려니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었다. 부엌일로 한참 바쁜 형님과 어머님은 나의 당황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채 빨리 가라고 재촉하셨다. 결혼하고 시댁에서 처음 겪는 난감함이었다. 머리에 무엇을 이고 걷는 일이 익숙지 않았던 나는 논두렁을 따라 뒤뚱뒤뚱 걸어갔다. 겨우 논에 도착해서 양은다라를 내려놓고 보니 양념장이 하얀 국수 위에 절반이나 쏟아져 있었다. 새참이 왔다고 반갑게 음식을 받아주던 동네 아주머니가 크게 웃으며 새댁이 음식을 처음 날랐나 보네하셨다.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따라 웃으며 누구 하나 타박하지 않았다. 양념이 뒤섞인 새참을 먹으면서도 초보 새댁의 실수를 웃으며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그 속에서 긴장했던 나는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모가 논에 자리를 잡고 나면 밤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판을 가득 채웠다. 개굴개굴 이어지는 소리는 마치 모내기를 마친 논의 축하 공연 같았다. 온 들판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새벽녘이 되어야 개구리 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어린 모들은 물결 속에서 몸을 흔들며 곱게 써래질 된 흙 속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은 기계가 농사의 대부분을 대신하면서 품앗이 풍경도 드물어졌다. 하루 종일 북적이던 웃음소리 대신 논마다 기계 소리만 지나간다. 그러나 내 기억 속 모내기 날은 여전히 사람 냄새로 가득하다. 논에 물이 들어오던 반짝임, 머리에 인 새참의 무게, 논두렁에 둘러앉아 먹던 국수 맛, 그리고 자식들 먹이느라 분주히 움직이던 어머님의 발걸음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물이 들어찬 논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머님의 부엌 냄새와 일꾼들의 떠들썩한 이야기 소리가 정겹게 떠오른다.

  논에 심긴 모가 물결 속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려 땅심을 받고 자라듯이, 사람도 추억 속에 삶의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모내기 철 물이 들어찬 논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여전히 그 푸른 들판 한가운데서 어머님의 밥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장용숙 약력

 

충북 제천에서 태어남

중등교장 정년퇴임

등단: 한국문인2022.

수필집: 상야리의 사계일광. 2022.

수상: 18회 전국소월백일장 산문부 준장원(2022), 15회 도민백일장 산문부 차상(2022), 3회 이팝문학제 대상(2026)

문학활동: 충북수필가협회, 충북레터스작가회, 알콩달콩 수필카페 회원

 

이메일:wkddydtnr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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