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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자막 / 김이경

작성자이미선|작성시간26.06.08|조회수71 목록 댓글 0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라는 말이 있다. 표현은 서툴고 투박해도 듣는 이가 그 속마음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말은 언제나 표면의 뜻만 담고 있지 않다. 말 사이의 숨결과 감정, 차마 다 하지 못한 마음까지 함께 실려 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서로의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소음이 된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상대의 말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요즘 부모와 자녀 사이의 대화를 보면 거울 앞이 아니라 단단한 ‘벽’ 앞에서 멈춰 선 듯하다.

부모님의 언어에는 반어적인 사랑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 언어는 번역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뭘 또 내려오냐. 차 막히는데.”

그러나 사실은 “네 차 들어오는 소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다림이다.

“반찬 냉장고에 많다. 아무것도 사 오지 마라.”

그러나 냉장고는 썰렁하고 시어진 김치만 있을 때가 많다.

“네가 사 오는 것들이 역시 맛있더라.”가 마음속에 자막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전화는 됐다. 애들 밥이나 잘 챙겨 먹여라.”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쉽게 전화를 끊지 못한다.

“네 목소리 들으니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마음이 말 뒤에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이런 부모의 언어를 어느 정도는 알아듣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 발길을 끊거나 빈손으로 가기도 한다. 그래서 생겨난 우스갯소리도 있다. 시어머니가 “고등어 머리가 맛있다.”고 하자 며느리가 소풍 도시락에 고등어 머리만 잔뜩 넣어 드렸다는 이야기다. 부모님이 생선 가시를 발라 드시며 “머리가 맛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속뜻은 “맛있는 살점은 너희가 먹어라.”에 더 가깝다. 그 마음을 읽고 살뜰히 살점을 발라 올려드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찰떡같이 알아듣는 ‘마음의 자막’을 읽는 일이다.

자녀들의 말도 다르지 않다. 자녀들은 그들 나름의 고통과 아픔을 지니고 있다. 부모가 사랑을 반어로 표현한다면, 자녀는 서툰 배려와 미숙한 방어를 말 속에 숨겨 둔다. 그 말속에 숨어 있는 참뜻을 발견하지 못하면 관계는 늘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신경 좀 그만 쓰세요.”

그 말은 “저도 잘 해내고 싶어요. 조금만 믿고 기다려 주세요.”라는 바람이 숨어 있거나

“내가 기대만큼 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해요.”라는 자책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래요?”

반항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지만

“괜찮은 척하는 것도 이제 너무 힘들어요.”라는 신호일 수 있다.

어쩌면 “그냥 제 편이 되어주시면 안 돼요?”라는 간절한 바람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부모와 자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듯 살아간다. 말은 분명 오가는데, 마음은 자꾸 엇갈린다. 그러지 않아도 깊은 세대의 골은 오해와 감정이 얹히며 더 깊어진다.

늦게 귀가한 자녀에게 “잠도 안 자고 이 시간까지 뭐 하고 돌아다니냐!”라고 화를 내는 것은, 사실 “네가 안 들어와서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는 불안과 사랑이다. 그러나 자녀는 이렇게 받아친다.

“왜 안 주무시고 그래요? 제가 애예요? 알아서 할게요!”

겉으로는 짜증 같지만, 어쩌면 그 속에는 “늦게까지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걱정 끼쳐드려 정말 죄송해요”라는 미안함이 숨어 있는 서툰 고백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말들을 번역하는데 늘 감정이 끼어든다는 점이다. 미안함은 짜증으로 표현되고, 관심은 간섭으로 들린다.

“그건 왜 그렇게 하니?”라는 부모의 질문은 “네 일상이 궁금하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뜻일 수 있지만, 자녀에게는 “너를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처럼 들리기도 한다.

“너만 믿는다.”는 듣기 좋은 말이다. 그러나 믿는다는 말은 등을 밀어주는 손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넘어져서는 안 된다는 무게로 얹히기도 한다. 어떤 아이들은 혼나는 것보다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을 더 두려워한다. 사랑과 믿음이 어느 순간 응원이 아니라 ‘실패하면 안 되는 족쇄’처럼 느껴질 때, 아이들은 스스로에게 먼저 무너진다.

그래서 대화는 단지 들리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다. 말의 행간에 숨어 있는 눈물을 읽어내고, 그 안에 감춰진 미소를 발견하는 일이다. 서로의 진심을 조금 더 따뜻하게 번역해 주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의 자막’을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지나갔다. 서로 건네는 짧은 인사 속에도 말보다 더 깊은 마음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냇가에 묻어다오.”

어미 청개구리의 마지막 부탁을 떠올린다. 사랑은 때로 끝내 제 마음과 반대로 말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사랑은, 끝내 통역이 필요한 언어인지도 모른다.

출처 : 반월신문(http://www.banw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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