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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의 아이들 / 정진숙

작성자이미선|작성시간26.06.19|조회수45 목록 댓글 0

아련히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먼 듯, 가까운 듯 부드러운 바람에 포근히 안겨 있었다.

“선생님 사랑해요”

낭랑한 그 목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어두운 방, 창호지를 바른 문이 희부옇게 보인다. 아직은 컴컴한 밤. 뒷담 쪽으로 난 방문을 열어보니 사위가 조용하다. 비몽사몽, 꿈이었을까. 달려가는 발소리를 들은 듯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개구쟁이라고만 생각했던 아이들이 이 깊은 밤 찾아온 것인가. 잠든 내 귓가에 들려준 노래, 다시 듣고 싶어 눈을 감는다.

선생과 제자라지만 나이 차이는 십 세 안팎, 돌이켜 보니 나는 더 할 수 없는 철부지였다. 가을날 우리는 별암리 배밭에 간다는 핑계로 바다를 끼고 도는 시오릿길을 걸었다. 바닷가 바위에 엉겨 붙은 굴을 캐며 신비의 세계에 머무르다 돌아오는 길, 어느 동네 앞, 건달 같은 젊은이 몇 명이 텃세를 놓았다. 나를 빙 둘러싸고 숨겨주던 아이들, 가슴은 두려움에 콩닥거렸지만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는지.

김장철이 가까워지면 폭이 차오른 배추를 서리해 왔다. 반찬이 없어도 신나는 날, 쌀 한 주먹씩 가져와 밥을 짓고 궁색한 내 자취방에 둘러앉아 된장에 쌈 싸 먹었다. 토끼몰이하는 날 짓궂은 아이는 뱀을 잡아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 아이는 노트 검사하는 날도 미루다 맨 마지막 슬그머니 제출했다. 부러 그런 거 같았다.

학교 화장실은 장마가 지면 빗물이 스며들어 변을 보면 풍덩 소리와 함께 똥물이 튀어 올랐다. 유일한 해결 방법은 퍼내는 것. 긴 막대 끝에 바가지를 매어 퍼내는데 누가 할 것인가. 지각생이 제일 많은 반이 하기로 결정했다. 남학생들은 밥만 먹고 등교하고 여학생들은 설거지까지 마쳐야 오던 시절이다. 산 넘어오는 아이들은 서둘러 오는 데, 교문 앞 문방구 집 아이는 날마다 지각이다. 덕분에 여학생반을 담임한 나는 푸는 작업에 나서야 했다. 교장선생님이 시범을 보이니 담임이 안 할 수 없었다.

젊은 날에도 이성에게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은 적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또 그렇게 덤덤히 살았다. 이제 저만치 팔순을 바라보는 남편 옆에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접는다. 어둠 속에서 사랑한다고 들려주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 지금은 그들도 초로의 길로 접어들었을 터, 어느 길목에선가 가까이 스친다 한들 우리는 남으로 지나칠 인연들. 바닷가에서 주워 모은 조그만 조가비로 목걸이를 만들어주던 그 작은 소녀는 지금쯤 그만한 손녀를 두고 있지 않을까. ‘언니에게’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던 용감한 아이,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도 그늘이 없어 보였지만 그 편지 간직해줘야만 할 것 같던 그 아이, 먼 곳이 아닌 내 가까이 살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처음 받았던 곳, 화원반도. 나를 청춘으로 머물게 하는 아이들, 잠시 머물다 떠나왔지만 유일한 사랑을 속삭여준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지금도 초가지붕이 이어지던 그 시절에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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