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 이렇게 저물면 유병덕 초대 없이 찾아온 이 세상이다. 가난하게 태어나 낮은 포복으로 맨땅을 기어 왔다. 물고기가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그물에 걸리듯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낯선 직장에 걸려들었다. 재주가 없는 몸이라 빠져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물속에 수초처럼 참참했다.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아랫사람 눈치를 보느라 자심한 날을 보냈다. 속절없이 늙어가던 어느 날 낯선 세상으로 밀려났다. 내 인생 이렇게 저물면 억울하다. 퇴임 첫날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지만 늘 앉던 그 자리가 어색하다. 그동안 나의 자리는 명패가 있는 사무실이었다. 가끔 주말에 와서 밥이나 한 끼 먹고, 옷이나 갈아입곤 하던 하숙집 같던 내 집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변화는 아내도 마찬가지일듯하다. 세끼 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캄캄할 거다. 혼자 지내던 자유의 공간을 침범당한 기분이고, 마음대로 활동하며 자유로이 쓰던 시간에도 제약이 따르니 그녀도 나만큼이나 혼란스러울 것이다. 퇴직해 보니 이런 이도 있다. 세상 물정 어두운 내게 집요하게 달라붙어 송충이처럼 갉아 먹으려 한다. 마치 갓 쓰고 장도칼 찬 격이다. 그럴싸한 명함을 내밀며 고수익 상품에 투자하라고 추파를 던진다. 이뿐 아니다. 정치판에 기웃거리던 이는 공천을 주겠다며 영업 사원처럼 찾아오고, 알 듯 말 듯한 기자는 광고를 내야 한다며 인터뷰하자고 풍장이다. 그리고 산지사방에서 연락이다. 동창회나 동문회에서는 나오라고 보채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만나자고 성화다. 지난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픈 상처가 먼저 고개를 내민다. 늪에 빠져 버티기보다는 피하는 편이 좋을듯하여 집을 나섰다. 낯익은 유럽과 지중해 연안을 샅샅이 뒤지고, 지인이 사는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동남아는 오며 가며 들렸다. 또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어 사는 이가 집들이한다고 하여 뉴욕으로 향했다. 따듯한 봄날 그와 함께 센트럴 파크를 거닐며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 바람의 온도, 공원의 냄새를 맡았다. 이어 홀로 남미 쪽으로 이동해 산티아고와 상파울루,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안데스산맥을 넘나들던 중이다. 우리네 인생사 아무도 모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구아수 폭포로 가는 야간 버스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자정 무렵 곯아떨어져서 기억이 어렴풋하다. 다음 날 아침 로컬 버스로 옮겨타려다가 짐이 없어진 사실을 알았다. 알량한 영어로 버스 기사에게 짐을 찾아 달라고 청하자, 야간에 괴한이 침입하여 가져갔다는 거다. 그러면서 짐은 본인이 챙겨야 한다고 덧붙인다. 달랑 휴대폰 하나 남았다. 다급히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하자 기다려 보라는 말뿐이다. 난데없이 빨간 줄 사건이 머릿속을 스친다. 젊은 날 시골에서 면장을 할 때다. 어떤 여인이 딸을 결혼시키려고 서류를 준비하러 왔다가 산 사람 죽여놨다고 난리를 피운 일이다. 그 일을 처리하느라 법원에 드나들었다. 전남편은 전방에 근무하느라 집에 자주 오지 못했다고 고백이다. 그런데 그녀는 딸아이를 외국으로 유학시키면서 해외를 오가다 한눈을 판 것이다. 그는 오랜 기간 연락이 닿지 않자, 그녀를 실종 처리하고 새 부인을 얻은 사건이다. 낯설고 물 서른 이국땅에서 미아가 될 처지다. 지구촌을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다가 이구아수 폭포 아래서 멈추어야 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대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간청하자, 난감해하며 도울 방도를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때마침 그는 국립외교원에서 장기 교육을 받으며 알게 된 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돌아왔다. 공교롭게 팬데믹으로 집에 오래 머물며 아내와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에 핍진한 세월이 새겨져 있다. 돌아보면 살가운 남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걸핏하면‘깜둥이가 세수하나 마나, 장님이 눈뜨나 마나, 자신이 결혼하나 마나라고.’ 두런거렸다. 자기 모멸의 어두운 늪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억울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일 것이다. 아들을 낳아 기르고 어려운 살림을 꾸리느라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훗날을 위해 모진 세월 참고 견디며 보험을 들지 않았을까. 그 보험은 ‘내게’ 말이다. 머지않아 산에 둥지를 틀 나이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멈출지 모른다. 가멸찬 마음으로 외부 강의를 줄이고 여러 모임은 정리하고 집안일을 도맡았다. 장보기, 밥하기, 청소하기…. 그리고 집에서 하릴없으면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서 세상과 소통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소일거리를 찾았다. 취직이 아니다. 어느 문학지에서 신인 작가를 모집한다고 하여서 응모한 결과 운이 좋게 당선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리비도가 고개를 들었다. 숨겨져 있는 재능의 편린을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늘그막에 축복이고 생존의 힘이 되는 일이다. 작가로 등단하자 원고 청탁이 이어진다. 글쓰기는 힐링이다. 마음속 깊이 응어리진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순간 비로소 해방과 자유가 찾아온다. 해바라기는 여름에 피고,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고, 동백꽃은 겨울에 핀다. 모든 꽃이 봄에만 피지 않는다. 오늘도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아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구멍을 메우고 있다. 모처럼 그녀와 사부작사부작 걸어서 동네 족욕 체험장에 가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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