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2026년 회원작품방

公務와 어쩌다 幸運

작성자Kim joung su|작성시간26.06.06|조회수44 목록 댓글 0

공무와 어쩌다 행운

33년이라는 긴 직장생활 동안 매달 봉급을 받아왔다. 월급생활자는 한 달에 한 번, 장사하는 사람은 매일, 농사짓는 사람은 품종에 따라 쌀은 1년, 토마토·참외·오이는 3개월 후에 돈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을 벌려면 장사가 가장 빠르다는 것을 진작 알았지만, 봉급은 가정의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는 주춧돌이 되어 고스란히 아내의 손을 거쳐 가정을 지탱해 주었다.
처음 3년간 다닌 기업체의 급여는 공무원 봉급보다 훨씬 많았다. 덕분에 전세금을 빼고 돈을 더 보태어 우리 명의의 첫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직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너무나도 적은 보수가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아내도 생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시작한 옷가게는 특유의 친절하고 싹싹한 성격 덕분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나는 내가 이루지 못한 사업가의 길을 아내에게 열어주기로 마음먹고 사업 규모를 키웠고, 다행히 이는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이후 본청에 근무할 때 자녀 교육을 위해 큰맘을 먹고 대구 수성구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한 번은 고된 일과 끝에 술에 취해 기차를 타고 귀가하다가, 내려야 할 경산역을 지나쳐 청도역까지 간 적도 있었다. 밤늦게 청도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돌아오면서, 하루 왕복 1시간 이상 걸리는 출퇴근길이 몸에 무리를 주고 있음을 직감했다. 폭설로 고속도로 노상에서 몇 시간씩 고립되는 일이 생기면서 가정과 직장 생활의 균형이 무너졌다.
결국 고심 끝에 원래 살던 대동다숲 아파트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돌아오는 길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따랐다. 불과 7개월 사이에 아파트 가격이 1억 원이나 올라 있었던 것이다. 고생 뒤에 찾아온 뜻밖의 보상이었다. 이를 발판 삼아 대출을 조금 더 내어 오랜 숙원이던 상가 건물을 매입하게 되었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건물주가 되는 행운을 쥐었다.

이제 '공무(公務)'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공직에 몸담았던 시절은 노태우 대통령부터 문재인 대통령 시대까지다. 이 시기 대한민국은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사회에는 '마이카' 시대가 시작됐지만, 행정관서에는 '오토바이' 시대였다. 행정의 최일선은 참으로 열악했다. 개인 컴퓨터는 단 한 대도 없었고, 상부에 보내는 문서는 일일이 타자기를 두드려 작성해야 했다. 행정 시스템과 예산은 구시대의 틀에 머물러 있었다.
정부 재정이 부족하다 보니 당시 공무원의 업무는 청소 행정, 기초수급대상자 지원, 상·하수도 관리, 병무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가뭄이 들 때면 몇 날 며칠을 논에 나가 밤새워 다단 양수기를 가동해야 했고, 지방도와 고속도로변의 쓰레기를 줍는 대민 지원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총무부서를 시작으로 개인 사무용 컴퓨터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개인 PC가 전원 배정되며 행정의 전산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정부 재정에도 여유가 생기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사업비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추진된 농기계 반값 지원, 비닐하우스 개보수 사업 등은 농촌의 기계화를 급격히 가속화했다. 농촌의 중심축이 전통적인 쌀농사에서 특용작물(특작)로 변화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때 농기계 대리점의 전성기 였다. 대동, LG, 동양, 아시아등 기업체의 큰 발전이 있었다. 하우스 짓는 기업체도 많이 생겼으며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사계절 내내 오이, 토마토, 딸기, 참외가 쏟아져 나왔다. 정부의 쌀 수매는 점차 줄었지만, 이 특용작물들이 농촌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농촌을 살리기 위한 다각적인 정책도 쏟아져 나왔다.
벼 육묘장 설치가 기산면을 필두로 읍,면 에 하나씩 생겨 농민들이 힘들게 모를 기르는 대신 돈을 주고 사서 심는 시대가 열렸다. 쌀 브랜드화 및 현대식 도정공장 설립이 사양화되던 쌀 산업에 경쟁력을 불어넣었다. 그대표적인 브랜드가 금종쌀, 한백황토쌀, 학나루쌀 등이다. 논농업직불금 및 농기계 대여 사업은 농가의 소득을 보존하고 고질적인 인력난을 해소했다. 맞춤형 비료 공급이 토질 개선을 가져와 영농 작업이 한결 수월해졌다. 특작을 통해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늘어나며 '억대 연봉 농가 ' 수가 급속히 증가했고, 이 시기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봉계동과 금남리에 화훼단지가 조성되어 국화, 장미, 백합이 일본으로 수출되었고, 파프리카도 대량 수출 길에 올랐다. 각 시군마다 농산물 브랜드화 바람이 불었는데, 우리 지역의 '아침 해 칠곡'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아침해 칠곡은 여가 상표을 등록을 하고 조례를 만들어 포장박스를 제작하여 박스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농가에 배부 했다. 박스 포장문화가 정착된 계기다.

오늘날의 농촌은 이제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운영조차 되지 않는 구조가 되었다. 스페인의 농촌처럼, 머지않은 미래에는 우리 농촌도 외국인 가족이 아예 정착하여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 상생 시대'가 오지 않을까 싶다.
한편, 정부는 양적 개발의 시대를 매듭짓고 질적 성장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도시계획도로 일몰제' 등으로 인해 기존 도시계획이 폐지되는 현실이다. 사유재산권 보호도 좋지만, 주민 편의와 지역 발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부 주도의 도로 개설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앞으로의 농촌은 단순히 농기계를 대여해 주는 수준을 넘어, 품삯을 받고 농사를 전반적으로 대신 지어주는 '영농 대행 체제'로 진화해야 한다. 그것만이 젊은 층이 떠나간 우리 농촌이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기업체에서의 3년, 그리고 공무원으로서의 30년을 가만히 되돌아본다. 과거의 기업은 사람을 도구로 쓰고 버리려 했고, 정부는 적은 봉급을 주며 무조건적인 충성심만을 요구하곤 했다.
이제 우리 조직 문화에서 혈연, 지연, 배경 같은 구시대적 유물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유럽의 선진국들처럼 공정하고 투명한 조직 문화가 정착되어야만 음성적인 거래와 부정부패가 근절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행정이 한 단계 더 성숙해진다면, 언젠가는 명예직으로서 오직 지역 사회에 순수하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무보수 읍,면장'이 선출직으로 선출 됐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