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에 대한 김훈의 기록이다.
작가는 <하얼빈에서 만나자> 를 제목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안중근의 가족과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이 하얼빈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풍경에 방점을 찍으려했던 것이다.
출판사에서 정한 '하얼빈'은 불친절하지만 열린 제목이다.
새로운 점은 인간 안중근과 이토의 공통점이 있다는 거다. 동양평화론에 대한 생각과 인간에 대한 예의? 이런게
이토 히로부미에게도 있었다는 거다.
천주교 신자로서의 안중근과 당시 프랑스 신부의 처신이 세세하다.
거사 후 우리 조정에서의 대처도 참으로 한심하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낙후된 게 정치다.
대하소설이 되어야 할 소재를 짧게 뭉치려니 아쉬움이 크다.
이 책에서도 김훈은 소설이 감당하지 못했던 일들을 <후기>에 적어두었다.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하며, '연대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덕순과 이토 히로부미, 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생애. 안중근의 아들 딸의 행적도 밝혔다. 일곱 살에 죽은 큰아들 안분도만 빼고 작은 아들과 딸은 이토의 자식에게 사죄를 하며 '박문사 화해극'을 벌였다.
안중근의 모친인 조마리아가 손자녀와 함께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안중근의 처 김아려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애통하지만 역할이 미미하다.
* 신년의 첫 접견이므로 범하지 못할 만큼의 위험이 필요할 것이었다. 메이지(만 14살 황제)는 군복을 입으라는 신하들의 마음을 그렇게 헤아렸다. 두려움은 못 느끼듯이 느끼게 해야만 흠뻑 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8쪽)
* 이토는 지시했다.
- 기념 연설문은 평화를 중심으로 해서 작성하라. 일본 제국이 설정하는 평화의 틀 안에서 동양 삼국과 러시아가 조화롭게 온존할 수 있고, 문명개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일본은 이 틀을 강고히 할 중대한 책임이 있음을 밝히라. 문명은 선진에서 후진으로 흐르는 것이며 평화 문명개화가 같은 방향임을 말하되, 언사를 숙여서 순하게 하라. (109쪽)
*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를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탄창에 네 발이 남았을 때, 안중근은 적막에서 깨어났다. ... 나는 이토를 본 적이 없다....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
안중근은 다시 조준했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찰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이토 주변에 서 있던 일본인 세 명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몸으로 덮쳤다. 안중근은 외쳤다.
- 코레아 후라
(167쪽)
* - 저는 10월 26일에 이토를 쏘았는데, 저의 처자식이 27일에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저의 처자식이 미리 도착해서 저를 만났다면 저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을 것입니다. 저는 이 하루 차이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 도마야 너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 이 모든 것이 저의 모자람이고 저의 복입니다. 이 복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268쪽)
https://www.ddanzi.com/ddanziNews/747847098
기사 - 책에서 마주친 100개의 인생 16: 하얼빈 - 청년 안중근이 건네는 말
놀라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직 수치와 굴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인간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하늘을 보지 말고 땅을 보고 살아야 한다. 5000년을 유지한 독립국가이자 인구 2,000만(당시 콩고, 르완다 등을 식민지로 갖고 있던 벨기에 제국의 인구가 700만이었다)의 나라가 세계사에서 사라지는 데 총성 한 방 울리지 않았다.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도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통치권을 넘기는 것은 정부 대신들의 도장으로 이루어졌다. 그 어떤 저항도 없었다. 일본은 나란히 서지도 못할 강력한 제국,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을 때도 몇십 년이 걸렸고 수많은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유자의 나라’ 조선은 종이 쪼가리에 도장을 찍은 것으로 스스로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군대가 있었으나 허울뿐인 ‘황제’라는 감투를 쓴 ‘순종’은 전투명령 대신 해산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나의 뜻을 헤아려서 각자 맞는 일거리를 찾아서 살아라."
"군대를 해산시킬 때 폭동에 미리 대비하라. 혹시 폭동을 진압할 일이 있으면 이토 통감에게 의지하고 부탁하라."
이것이 자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며 ‘황제’가 자신의 ‘병사’들과 ‘내각’에 지시한 내용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토록 부드럽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전 과정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설계가 있었다. 이토는 단지 식민지 조선의 초대 통감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두뇌였으며 심장이었다. 그는 ‘일본 최고의 거물’이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였고 ‘최연소 총리’였으며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하얼빈’에서 러시아로 연결되는 일본 제국주의의 설계자였다. 그는 ‘온건파’라는 가면을 쓴 ‘일본 제국주의의 두뇌’였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1984년까지 1,000엔짜리 지폐를 그의 초상으로 꾸몄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