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확 끌린 책이다. 총알배송으로 받아서 바로 읽었는데...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해독 불가한 난해함에 부딪치는데 흥미로운 건 뭔지. 고급진 글쓰기 교본이다.
시작부터 어렵다는 옮긴이의 말을 건너뛰었는데 다시 읽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2000년 콩쿠르 수상작 『떠도는 그림자들』로 선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천 편의 소설과 맞먹는 한 권의 책을 썼다. 단락 하나 하나가 한 편의 잠재적 소설이다."
숨겨진 책 몇 권을 찾는 건 읽은 이의 능력이다. 나는 숨겨진 책을 찾기는커녕 이 책도 다 들이질 못했다. 거듭 거듭 읽어야 할 듯.
프론토 -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황제의 스승인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1~2세기 로마의 문법학자, 수학자인 그는 파격적인 생각으로 당대에 추앙받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파스칼 키냐르가 불러낸 사람들이 사상에 비해 명성을 얻지 못한 인물들이 많다.
*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근원으로 가십시오" 하고 프론토는 마르쿠스에게 거듭 말한다. "철학 속에 리듬을, 말하는 목소리를, 그리고 그 목소리가 차용해 남아 있는 감정적 소리 psophos를 잃지 마십시오. 철학의 울퉁불퉁 비뚤어진 논고를 물리치십시오. 나는 당신께서 낱말의 선택을 통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옛것의 새로움, 충동 깊이 자리한 오래된 것의 새로움을 통해, 이미지 탐구에 몰두함으로써 말의 힘potestas만이 아니라 그 잠재력 속까지 파고들기를 바랐습니다. ...
"힘은 언어입니다. 당신의 힘은 언어에 있습니다. 땅의 황제인 당신께서는 언어의 황제여야 합니다. ..." (29쪽)
* 언어를 넘어서는 사색思索이 있다. 자연이 침묵 가운데 무르익음의 절정에, 부패의 절정에 내주는 사색이다. 마르쿠스는 말한다. 아름다움은 때아닌 것과 때맞은 것을 나눈다. 노인의 얼굴에, 너무 익어서 터져 버린 무화과에, 빵의 균열에, 멧돼지며 사자 같은 맹수의 크게 벌린 아가리에 나타는 죽음은 때맞다. 유혹적이다. 로고스 없는 이 아름다움, 즉 계절의 한 속성이다. (43쪽)
* 목소리를 내는 자연에는 한계가 없다. 용해되려는 선천적인 것과 열광하려는 후천적인 것 사이, 작가의 재능과 언어적 기교 사이, 생물학적 상황과 역설이며 이미지의 탐구 활동 사이에도 경계가 없다. 숭고함은 듣는 이를 설득이 아니라 열광으로 이끈다. 위대한 시인이나 위대한 산문 작가는 몰아지경의 말을 찾는다. (49쪽)
* 일상의 말은 몸을 가리는 옷과 같다. 그러므로 문학 언어는 두려울 정도로 발가벗은 언어다. 언어의 알몸 상태를 로기노스는 숭고함이라 불렀다. 숭고함을 뜻하는 라틴어 수블리미스sublimis는 그리스어 힙소스hypsos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힙시hypsi는 위쪽, 먼바다, 고지대이고, 그에 비해 우리는 아래쪽에 있고, 멀리 있다. 숭고함이란 도드라지는 것이고, 긴장시키는 것이고, 남성적 욕구처럼 스스로 긴장하는 것이다. (50쪽)
* 『소론집』은 내가 나의 스승들에게 바치는 세금이다.
그 빚은 결코 다 갚지 못했다.
나는 꿈에 대한 꿈(세금)을 갚고 싶었다.
스승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는데, 스승들 가운데 가장 근면한 스승은 죽음이다. 그러나 진짜 스승은 꿈이다. 꿈은 인간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른일곱 종의 척추동물과 조류도 지배한다. (117쪽)
* 임제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당혹스러운 문체의 스승이다. "바울이 격렬한 문체의 스승이듯이 임제는 당혹스러운 문체의 스승이다." 삶이 살아진 순간부터 삶에 환대를 제공하는 유일한 장소는 오직 말뿐이다. 그리스의 온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수사학자인 로기노스는 삶이 어떻게 문자언어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묘사했다. 글로 쓰인 작품은 라이터에서 솟구치는 불꽃처럼 그것을 쓴 사람의 내면에서 급격히 전개된다. 쓰는 사람은 스크린도, 이론도, 숙고도 없이, 무엇보다 언어도 없이, 갑자기 장면들을 눈앞에 보아야 한다. (128쪽)
* 문체는 독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개를 쳐들고 쉬쉬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독사에게 들쥐가 홀리듯이,
그래서 읽는 이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홀린 것이다.
그래서 꿈꾸는 자들은 거의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그들의 성기만 일어선다.
홀린다는 것, 그것은 눈으로 죽이는 것이다. (132쪽)
* 좌절한 자는 소설을 쓰지 못한다. 우울할 때는 소설을 쓰지 말아야 한다. 신경 쇠약을 이용해 에세이를 써야 한다. 맹목, 욕망, 몽상은 포유류의 살과 직접 연계된 요소들이다. (148쪽)
* 읽는 자는 침묵한다.
독자는 눈으로 먹는다. 독자는 귀로 씹는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골족 전사들에게 마련한 환영 의식. 전사들은 그들을 신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로마인들이 움직이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다 골족들은 그들이 손발을 움직이고 말을 시작하려는 것을 보자 그들을 죽였다. (155쪽)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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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산옥 작성시간 23.07.01 문체는 독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어야 한다. 고개를 처들고 쉬쉬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독사에게 들쥐가 홀리듯이,
그래서 읽는 이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홀린 것이다......홀린다는 것, 그것은 눈으로 죽이는 것이다.
'읽는 자는 침묵한다.
독자는 눈으로 먹는다.
독자는 귀로 씹는다.'
ㅋ.....너무나 멋진 표현입니다.
언제나 독자를 아연질색하게 만들고 읽는 이들을 옴짝달싹못하게 할까요.
이 책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선배님 늘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노정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7.01 이 책은 많이 어렵네요. 두고 두고 또 읽어야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