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현대수필> 겨울호에 추선희 선생 리뷰를 읽고 주문했다.
그는 '우리의 길동무, 몸' - <몸의 일기>가 몸을 거쳐 마음으로 길을 내고 그 마음이 지나는 몸을 다시 보게 된다고 했다.
책은 비닐로 꽁꽁 밀봉을 해서 왔다. 의아해하면서 포장을 풀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몸과 마음을 떨어뜨려놓고 바라보던 글을 제법 썼다. '몸의 말'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 벌써 다가왔지만 아직 경청하지 않는 나를 돌아본다.
12세 11개월 18일에 시작해서 87세 19일, 눈감을 때까지 몸을 중심으로 쓴 남자의 비밀일기다.
'사랑하는 리종에게' 일기장을 딸에게 남기면서 당부하는 마음이 중간중간 나온다.
장편소설을 난 또 수필처럼 읽었다.
몸이 이울어가는 시기에 만나서 일까. 몸의 변화에 대한 적나라한 기록은 내게 위안을 주었다. 거침없는 열정의 시간은 길지 않다. 그는 몸이 딱 맞는 아내를 만났다. 그럼에도 마음까지 밀착되지는 않는다. 내 궁금했던 의문도 몇 가지 풀 수 있었다.
내 몸처럼, 아니 나와 동일시하던 비올레트 아줌마의 죽음을 맞고, 열 살 아래 친구와 손자의 죽음도 보아야했다. 사고는 몸에 흔적을 남기고 병은 몸에 기억을 새긴다. 지내온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 모든 죽음은 상처다. 그 와중, 황혼에도 잠깐 열락을 맛보기도 한다.
병에 발목이 잡히고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 기념식 중에 난 뭐 때문에 울었던 걸까? 비올레트 아줌마가 돌아가신 후론 운 적이 없었는데. 최근에 팔꿈치가 으스러지는 바람에 아파서 운 걸 빼면 말이다. 어쨌거나 난 기념식 내내 참지 못하고 계속 울었다. 흐느낌도 없이 계속 울었다. 몸을 비우듯,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가 팡슈와 나, 우리 둘에게 훈장을 주었을 때도 난 계속 울고 있었다.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내게 남자답다고 칭찬해주었다. 이제 자네도 울 권리가 있어! 21세 9개월 (140쪽)
* 퇴원을 했다. 모나의 침대에서 자축했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13은 돼야 하는데 9.8밖에 안 됐다. 구멍이 숭숭 난 내 몸에 아직까지 혈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모나의 화끈한 친절이 없을 때의 얘기다. 난 보란 듯이 발기했다! 우리 또 지속 시간의 기록도 깼다.
발기는 했지만 그다음엔 이상한 일이 뒤따랐다. 오르가슴 대신 눈물이 펑펑 쏟아진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은 변명을 하려들자 더욱 격렬해졌다. ... 원인 모를 슬픔, 존재자체의 괴로움이 마치 둑이 무너진 것처럼 예상치 못한 파도로 날 공격하고 파괴했다. 43세 9개월 17일 (247쪽)
* 긁는 즐거움, 찌릿한 쾌감이 점점 커지다가 결국 시원함으로 끝나는 것뿐 아니라, 특히 가려운 지점을 1밀리미터 오차도 없이 정확히 찾아냈을 때의 희열이란, 그거야말로 '자신을 잘 이해하는' 것 아닐까. 끍어야 할 지점을 옆 사람에게 정확히 가리켜준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사람은 날 만족시킬 수 없다. 누가 하든 목표 지점을 살짝 비껴가기 일쑤다. 59세 1개월 14일 (319쪽)
* 건망증이 점점 심해진다. ... 문장을 쓰던 중에 갑자기 막히기도 하고,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르는 낮선 사람 앞에서 바보스럽게 침묵을 지킬 때도 있다... 방금 인용한 책 제목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물건들을 어디 뒀는지 몰라 찾아다니고, 약속해놓고도 못 지켜 욕을 먹고.. 예전부터 날 괴롭혀온 이런 일들이 생각할 수록 기막히다. 그러나 가장 절망스러운 건, 금방 대화를 시작해놓고도 내가 말하려던 걸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나서 긴장해 있는 바보 같은 상태이다. 내 기억력이 도무지 미덥지 않다. 66세 1개월 1일 (353쪽)
* 선생님, 됐잖아요, 나자레가 날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해냈다. 난 부활한 자처럼 즐겼다.
... 내가 떠나올 때 나자레는 얼굴 표정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녀의 조약돌 같은 뺨 위로 흘러내리는 고요한 눈물, 그 보물이 날 꼭 껴안아주는 바람에 내 가슴속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74세 5개월 9일 (421쪽)
* 마침내 리종에게 남기는 글을 마무리 했다. 글을 쓰는 건 지치는 일이다. 만년필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등정이고 단어는 산이다. 86세 11개월 27일
* 수혈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온정에 매달려 영원히 살 건 아니다. 87세 17일 (483쪽)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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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산옥 작성시간 23.12.26 선배님 크ㅡ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오늘도 선배님 덕분에 좋은 글 읽고갑니다.
몸의 일기는 꼭 나를 대변해주는 것 같아요.
그가 66세에 쓴 글
지금 저에 현실입니다. 늘 쓰던 단어도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침묵.
ㅎㅎ
아! 인생은 그런건가 봅니다.
선배님 감사해요. -
답댓글 작성자노정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12.26 맞아요. 위로받은 구절이 많아요.
그게 나만이 일이 아니라 몸의 흐름이라는 거죠. ^^ -
작성자이문숙 작성시간 24.01.25 66세가 되면 다른 사람도 이렇게 되는군요~ 저만 그런가 하며 마음 졸이는 일은 이제 그만 해도 될까 싶습니다.
덕분에 위로를 받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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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노정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2.29 맞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늙어감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지요.
서로서로 위로하며 앞으로 나아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