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얘, 국광이나 좀 사 오너라."
" 아버지, 국광이 뭔데요?"
" 과일 가게에 가서 물어 보고 삼천어치만 사 오너라."
" 후지 사과가 훨씬 맛이 있는데 왜 국광을 사 와요?"
" 잔말 말고 빨리 사 오기나 해라."
오래만에 일직 퇴근한 어느 날 막내와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막내는 국광 맛에 푹 젖어 있는 아빠의 어릴 적 입맛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 그래도 후지 사과가 더 맛있는데... ." 하며 못마땅한 눈치다. 막내를 동리 입구의 과일 가게로 보낸 후 혼자 천장을 향해 누워 변해 버린 사과 맛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본다.
내가 태어난 곳은 금호 강변의 사과밭이 줄지어 늘어선 경산군 하양읍이다. 때문에 사과 맛은 유달리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모양만 봐도 맛이 있고 없고를 당장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다. 올 복숭아가 한물 가기 시작하는 초여름에 출하되는 축이란 이름의 사과를 우리는 일본식 발을인 ' 이와이' 라 불렀다. 축의 싱그러운 푸른색과 한 입 베어 물면 색깔에 걸맞게 젖어오는 시원한 여름 빛을 달콤함만을 앞세우는 후지 사과에 비할 수 있을까?
삼복 더위와 함께 빨갏게 익어가는 홍옥 그 정열적인 붉은 의상 속에 은밀하게 감춰져 있는 희디흰 속살, 그리고 그 맛이란 ' 새콤함' 이란 하나의 낱말로는 표현이 오히려 모자라는 저 뭐랄까 진한 정사 끝에 오는 전율 같은 것. 또 국화가 피기 시작할 때 겨우 익기 시작하여 서리가 내릴 때쯤이면 끓는 피를 참지 못해 껍질이 찢어지는 국광. 문풍지가 울 정도로 매운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밤에 따듯한 아랫목에서 " 나, 그대에게 전할 말 있어도 전하지 못하여" 가슴이 터져 버린 국광을 먹어 보지 않는 사람이 어찌 사과 맛을 알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의 아파트 곳곳을 아빠와 함께 떠돌아다닌 막내가 " 사과는 후지 사과가 더 맛이 있는데... " 라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하는 것을 내 짐작하지 못하는 반은 아니다.혀끝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달콤함을 사과의 참 맛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멱을 감기 위해 금호강으로 갈 때는 으례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는 능금밭 사잇길을 택한다. 능금밭 주인이 아무리 막아도 열리기만 하는 개구멍은 있게 미련이고 그곳은 우리들의 통로가 된다. 구멍으로 몰래 들어가 따온 능금은 러닝 셔츠 속에 넣어져 무성영화 시대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과 같은 배불뚝이 차림새가 되곤 한다.
다른 개구장이 녀석들이 사잇기 여기저기에 발이 걸리면 넘어지도록 길게 자란 풀을 서로 비끄러맨 ' 발걸이' 에 걸리는 날에는 셔츠 속의 능금 알이 몽땅 쏟아지는 곤욕도 그때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초등학교 사 학년 때인가? 같은 반 급우이자 유년주일학교에도 함께 다녔던 친구가 능금밭 주인의 아들이었다. 그와 나는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서로 이기려는 치열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자 아버지를 가졌고 나는 아버지가 없어 매양 끌리는 입장이어서 항상 그게 못마땅했다. 그 친구에게서 주눅이 드느 날이면 나는 저승에 계시는 아버지가 미웠고 그 미움은 한없는 그리움으로 변하기도 했다.
유년 주일학교가 파한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그는 " 여학생 몇을 데리고 가 우리 능금밭에서 놀자" 고 제의했다. 노는 것은 둿전이고 ' 우선 능금은 실컷 먹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 좋지" 라고 대답했다. 나는 친구의 속마음을 얼른 알아차리고 제 맘에도 들고 내 맘에도 드는 여자아이를 포함해서 친구 네댓 명에게 사발 통문을 돌려 함께 능금밭으로 갔다.
우리는 까치와 벌레들이 파먹은 것들과 바람에 떨어진 ' 흠다리'능금을 주워 와 차일을 쳐둔 그늘 밑에 모여 앉았다. 능금 한 알을 들고 한 입 다득 베어 무는 순간 그는 무엇이 못마땅했는지 느딧없이 " 활이 너는 집에 가 봐라" 라고 말했다. 먹다 남은 능금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는데 눈물 한 방울이 멍석 위에 떨어졌다. 소쿠리에는 먹음직한 능금이 수북이 담겨 있고 여자아이 몇몇이 원을 그리듯 앉아 있는 그 통한의 능금밭이 더러 꿈에 나타나면 나는 지금도 몸서리가 처진다. 빌어먹을.
분하고 서러운 것은 둘째치고 먹다 남은 능금이 눈에 밟혀 엉엉 울면서 병천 둑을 따라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치마를 붙잡고 목놓아 울어 버렸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 죽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최초의 슬픈 사건도 바로 이때였다. 능금이 씹힐 때마다 즐거웠던 추억과 서러웠던 기억이 동시에 되살아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평생의 한이 된 마음의 상처를 준 그 친구도 생애 중에 꼭 한번 만나 " 그날, 자네 아버지 능금밭에서 쫓겨날 때는 정말 섭섬했다네" 란 말을 전하며 회포를 풀고 싶다. 그래야 그 날 아버지가 저승에서 흘리신 눈물에 대한 갚음이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도무지 만날 길이 없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그 기찻길 옆 능금밭에서 먹다 말고 두고 온 눈물 방울 떨어지게 한 능금이 생각난다. 다시 한번 잃어버린 그 날의 사과 맛을 느껴보기 위에 이렇게 막내를 시켜 " 요즘 사과 말고 아버지가 옛날에 먹었던 그런 능금을 사 오너라" 고 당부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내와 함께 시장보기를 좋아한다. 같이 가되 아내를 따라 가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나를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가족의 찬거리를 사고 나는 내 입맛에 맞는 어릴 적 고향에서 먹어본 것 중에서 다시 먹고 싶은 것들을 사러 간다. 시장에 도착하면 서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나는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아내가 " 아. 당신도!" 하고 큰 눈이 더욱 커져 버릴 것들만 골라 한아름 들고 온다. 씀바귀, 무 장아찌, 콩잎, 호박잎, 간고등어. 딱장배추... 주로 이런 것들이다.
청과 시장엘 들러도 아내는 반드시 후지 사과를 산다. 도시 출신이기 때문이려니 하고 아예 간섭하지 않는다. 아내와 별도로 계절에 따라 어렵게 어렵게 홍옥도 사고 국광도 산다. 그러나 요즈음 사과나무도 현대식 품종으로 수종이 갱신된 탓인지 옛날이 그리운 사람이 먹고 싶은 능금은 웬만큼 큰 청과 시장에서도 쉽게 눈에 뜨지 않는다. 이럴 때는 고향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추억을 오롯이 담아둔 낡은 사진첩을 달리는 열차에 두고 내린 그런 기분이어서 허전하기 그지 없다.
동네 입구의 과일 가게로 간 막내가 " 아버지, 국광이란 사과는 업던데요." 하고 볼멘소리를 하며 빈손으로 돌아올까봐 불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