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서 나온 돌
이주영
일 년 가까이 원인을 몰랐던 통증의 진원지가 밝혀졌다.
그것은 기쁨보다는 당혹스러움이었다. 명치가 아파 응급실에 실려가기를 여러 번. 매번 위검사에서는 괜찮다고 했다. 신경성이나 역류성 식도염을 의심했다. 그러나 통증은 더 자주, 더 진땀나게 사르르 찾아왔다.
음식 먹는 것도 두려웠다. 새벽에 일어나 남펀이 등을 두드려주거나 달밤에 아픈 몸으로 걷기운동을 하기도 했다. 건강검진할 때 초음파 검사만 했으면 알아냈을 것을,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일 년 동안 몸을 혹사시켰다. 원인을 모른 채 소화제만 먹었고 다음 날이면 꾀병처럼 괜찮아지니 또 과식을 하고 술을 마시고 함부로 살았다.
동네의 중소 병원에서 복부 초음파 검사를 해보니 쓸개에 돌이 생겼다고 했다. 의사는 대번 수술해야겠네요, 라고 말했다. 담낭염이었다.
검사하러 왔다가 갑자기 수술대에 눕는다는 건 상상해보지 못했다. 몸에서 장기 하나를 빼내는 건데 최소한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주일 후 나는 파티마병원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난 여름 내내 엄마의 암수술로 한 달 넘게 보낸 곳이다. 하필이면 엄마가 담낭암이었는데 딸인 내가 담낭염이라니 유전자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나는 수술한 엄마가 놀라실까봐 알리지 않고 엄마의 담당 선생님을 찾아갔다. 엄마의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생명의 은인 같은 분이시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재검진 후 수술하겠다고 했다. 이미 입원과 수술에 대비해 간단한 생필품을 챙기고 아이들을 학교 보낸 후 금식하고 왔다.
담당의는 근엄하고 차분하셨지만 환자의 가족이라고 배려해주셨다. 빠른 검사와 입원실 예약으로 저녁에는 6인실에 누워있었다. 다음 날 결과를 보고 수술을 결정하기로 했다. 나는 오진이기를 마음 한구석으로 기도했다. 수술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간호사가 수술복을 갖다주었고, 보조 의사는 수술 전 준비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결국 수술해야 하는구나 마음이 어두워졌다.
낮에 배낭과 겉옷을 들고 다니며 혼자 검사를 마쳤고, 입원수속을 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다음에야 남편은 퇴근 후 병원에 도착했다. 그마저도 아이들 때문에 집에 가라고 보낸 후 혼자 밤을 맞았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이 낳을 때 빼고는 입원도 수술도 처음 있는 일이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수술실 안을 처음 들어가 본다. 엄마가 수술할 때도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수술실 전등이 희미해지면 수술이 시작되는 거라고 누가 이야기한 게 생각났다.
수술실에는 환자 혼자만 들어간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해준다는 게 너무 감사했고, 의료진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마취가 시작되고 눈을 한번 감자 천장의 전등이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수술이 끝난 수술실. 눈이 나빠 안경이 없으니 모든 게 흐리게 보였다. 너무나 추워서 온몸이 벌벌 떨렸다. 간호사가 이불을 덮어주었고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이인실로 들어갔다. 옆에는 먼저 온 환우가 있었지만 마취약이 깨고 너무 아파 정신이 없었다. 무통주사를 팍팍 눌러댔다. 그러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형광등 불빛도 거슬렸다. 옆자리의 환우에게 이른 저녁이지만 불도 티브이도 꺼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여유가 생겨 인사를 나누었다. 그분과 4박 5일을 함께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나에겐 참 행운이었다.
같은 날 수술하고 첫날 외엔 보호자 없이 둘이서만 보냈다. 이인실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이도 비슷했던 그 친구. 맹장과 쓸개를 떼낸 차이는 있지만 치료의 과정은 비슷했다. 그 친구는 십 년 전에 이미 쓸개수술을 했다고 했고, 그것이 웬지 동질감과 위로를 주었다.
담당 의사가 달라서 엇갈려 들어오는 의료진을 비교하며, 우리는 어디가 아픈지 주사는 어떤지 서로 관찰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 친구가 먼저 링거를 떼자 내 밥상을 옮겨주었다. 같이 티브이를 봤고 5일을 같은 밥을 먹고 같이 잤다. 커튼도 드리울 수 없이 완전히 오픈된 이인실에서 우리는 서로의 가족들도 다 만났다. 손님이 빵이라도 사오면 나눠먹었다.
이런 인연이 있을까 싶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은 연락처를 주고받지 않는다는 통설을 어디선가 들었다. 그래서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전화번호를 물었더니 흔쾌히 가르쳐주었다. 그 친구는 어린이집 영양사라고 했다. 아이들이 동영상으로 “선생님, 빨리 오세요.” 하는 인사말도 같이 보았다. 그 친구도 나도 일터로 돌아가 다시 일상을 시작하게 되겠지만, 같은 아픔을 가졌기에 오래도록 기억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그 친구를 생각했다. 두려운 수술을 잘 극복하게 해준 그 친구가 너무도 감사하다.
“엄마, 그 돌 어디 있어?”
둘째가 뜬금없이 물었다.
“서랍에 잘 있지. 왜?”
“그냥 궁금해서.”
나는 장기를 잃은 게 서운해서 뱃속에서 나온 노란색 기름덩어리를 소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보관 중이다.
가지고 있었을 때는 몰랐던 그 가치. 잃고 나서야 쓸개가 내 몸에서 소중한 것이었구나 어리석게도 깨닫는다. 다시 돌아가면 건강한 음식만 먹고 소식하며 내 몸을 잘 돌봤을까? 이제부터라도 내 몸을 아끼며 살아야겠다. 저 돌을 볼 때마다 생각하려 한다.
2018 파티마병원 주최 간병투병 수기공모전 입상작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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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주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7.03 작년에 수술했거든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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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산옥 작성시간 18.07.03 어머나....지금 괜찮으시죠?
수술하기 전 그 아픔은 없지요?
얼마나 아프던지,,,,,
건강 조심하세요.
우리 서로 화이팅 해요. -
답댓글 작성자이주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7.03 네.ㅎ 선생님도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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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일주 작성시간 18.07.24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셔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배우자는 물론 그 누구도 대신 아파 줄 수 없다는 사실이지요.
스스로 건강을 챙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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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주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8.07.24 네.선생님.감사합니다.선생님도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