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꽃
이태준
마닫이에 불벌레 와 부딪는 소리가 째릉째릉 울린다. 장마 치른 창호지가 요즘 며칠 새 팽팽하게 켱겨진 것이다. 이제 틈나는 대로 미닫이 새로 바를 것이 즐겁다.
미닫이를 아이 때는 종이로만 바르지 않앗다. 녹비(鹿皮) 끈 손잡이 옆에 과꽃과 국화와 맨드라미 잎을 뜯어다 꽃 모양으로 둘러놓고 될 수 있는 대로 투명한 백지로 바르던 생각이 난다. 달이나 썩 밝은 밤이면 밤에도 우련히 붉어지는 미닫이의 꽃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긴 가을밤 꿈의 실마리를 삼는 수도 없지 않았다.
과꽃은 가을이 올 때 피고 국화는 가을이 갈 때 이운다. 피고 지는 데는 선후가 있되 다 마찬가지 가을꽃이다.
가을 꽃, 남들은 이미 황금열매에 머리를 숙여 영화로울 때, 이제 뒷산머리에 서릿발을 쳐다보면서 겨우 봉오리가 트는 것은 처녀로 치자면 혼기가 한참 늦은 셈이다. 한(恨)되는 표정, 그래서 건강한 때도 이윽히 들여다보면 한 가닥 감상이 사르르 피어오른다.
감상(感傷)이긴 코스모스가 더하다. 외래화여서 그런지 그는 늘 먼 곳을 발돋움하며 그리움에 피고 진다. 그의 앞에 서면 언제든지 영녀취미(令女趣味)의 슬픈 로맨스가 쓰고 싶어진다.
과꽃은 흔히 마당에 피고 키가 낮아 아이들이 잘 꺾는다. 단추구멍에도 꽂고 입에도 물고 달아달아 부르던 생각은, 밤이 긴 데 못 이겨서만 나는 생각은 아니리라.
차차 나이에 무게를 느낄수록 다시 보이곤 하는 것은 그래도 국화다. 국화라면 으레 진처사(晉處士) 도연명을 쳐드는 것도 싫다. 고완품(古翫品)이 아닌 것을 문헌치레만 시키는 것은 그의 이슬 먹은 생기를 빼앗는 짓이 된다.
요즘 전발(電髮)처럼 너무 인공적으로 피는 전람회용 국화도 싫다. 장독대나 울타리 밑에 피는 재래종의 황국이 좋고 분에 피었더라도 서투른 선비의 손에서 핀, 떡잎이 붙은 것이라야 가을다워 좋고 자연스러워 좋다.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다. 그 맑은 향기를, 찬 가을 공기를 기다려 우리에게 주는 것이 고맙고, 그 수묵필로 주욱쭉 그을 수 있는 가지와, 수묵 그대로든지, 고작 누런 물감 한 점으로도 종이 위에 생운(生韻)을 떨치는 간소한 색채의 꽃이니 빗물 어룽진 가난한 서재에 놓아 어울려서 더욱 고맙다.
국화를 위해서는 가을밤도 길지 못하다. 꽃이 이울기를 못 기다려 물이 언다. 윗목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으면 방안은 더욱 향기롭고 품지는 못하되 꽃과 더불어 누울 수 있는 것, 가을밤의 호사다. 나와 국화뿐이려니 하면 귀뚜리란 놈이 화분에 묻어 들어왔다가 울어대는 것도 싫지는 않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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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산옥 작성시간 22.11.16 가을꽃을 이렇게 섬세하고 감명 깊게 표현하다니.....
오늘은 안양 천변에 피어 있는 가을꽃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작품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노정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11.16 가을꽃이 슬픔과 명예라니 특별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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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용선 작성시간 23.02.20 가을꽃!
꽃잎에 묻은 찬란한 슬픔.
가을꽃.
찬이슬 머금고
마지막 사력을 다한 향기로 스러져가는 자신을 달래는 가을꽃.
그래도 가을꽃은 다가오는겨울을 순응으로 받아드릴뿐 두려워하지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