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날 제정/윤재천

작성자송남섭|작성시간16.12.10|조회수108 목록 댓글 0



 1.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수필계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

모든 것이 변화를 거듭하며,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시대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무장을 해야만 한다.

지난 2001년 수필문단의 현실을 재조명하며, 새로운 각오와 성찰, 진로를

검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자제(地自制)의 정착으로 지방문화가 활성화되고, 많은 문예지가 창간되어

지령(誌齡)을 더해 감에 따라 한국문단은 발표지면의 홍수시대를 맞고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양해지고, 이에 발맞춰 각종 놀이문화가 개발되어

대중의 생활 속에 깊이 침투되었으며, 매스미디어와 컴퓨터산업의 발전에 따라

전통문학에 대한 대중의 호응과 관심이 전에 비해 저하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기현상으로 독자층의 일원으로 안거하는 수동적 위치에서 벗어나 창작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해 보려는 잠재적 작가층의 수가 급증하고, 이에 부합해 문예지가

참신한 문인을 발굴하기 위해 많은 신인에게 등용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수적으로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인구가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으나, 작가층의

무분별한 확대로 문인의 자질과 작품의 질적 저하가 현실로 나타나는 만큼, 무조건

긍정적으로 볼 수만도 없다. 이로 인한 잡음이 문단 밖에서도 백안시하는 우려의

소리가 들리는 만큼 자정과 성찰이 요구된다. 그러나 시장논리와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이런 현상은 자연스럽게 평정될 수 있는 만큼,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우수한 작가와 작품은 나올 수 있다. 지나치게 이를 문제 삼는 것은 글을 쓰는

일을 전문직으로 자평한 나머지 정저지와(井底之蛙)와 같은 병적 선민의식으로

비춰질 수 있다.

보다 바람직한 태도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기하고, 우수한 작품을 양산하는 데

전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자질과 창작의욕, 작품의 질이지, 숫자가 문학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다고 모두 우수한 작가일 수 없고,

많다고 패거리집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지금은 계층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그 경계를 규정짓는 것을 무시해도 좋은 시대다.

이는 텔레비전시대에서 컴퓨터시대로 전환하면서 가시화된 자연스러운 추세다.

 전 세기 ― '텔레비전시대'는 각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보를 수용자의

입장에서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반대중이 청중의 무리일 수밖에 없는

시대였으나, 지금은 수용자가 오히려 정보의 주인이 되어 자기의사를 여과없이

개진할 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그 정보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는 키를

일반대중이 쥐고 있어 전근대적인 발상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문학의 위기', '종말' 운운하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판과 비난 속에서도 중요한 것은 작품의 질이 문제이고, 이에

의해 평가되고 판단될 수밖에 없다. 바닷물이 자체의 정화능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3%의 염분농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바닷물은 이내

썩고 생태계에 큰 타격을 입혀 모든 생명체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중요한 것은 3%의 염분농도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이 농도가 평균치를

잃고 상승하거나 하강해도 생태계의 위협요소가 되지 않으면 문제될 것은 없다.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수필인구가 1,300명에 이른다. 여기에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활동하는 인원까지 합치면 수필인구는 이보다 훨씬 많다. 중요한 것은 수

필인의 수가 아니라, 과연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 시대와 독자가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며, 그들이 만들어낸 감동이 정신고양과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작가가 한 작품을 낳기 위해 많은 산고를

겪으며, 인류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고뇌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느냐 하는 점이다.

사람은 옛 선현이 남긴 말을 통해 삶의 난관을 해결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받곤 한다. 오늘을 살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먼 훗날, 누군가에게 지혜의

열쇠가 되고 꿈을 갖게 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춘향전>이나 <흥부전>은 단순한 춘향이와 이도령, 놀부와 흥부의 살아가는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나 우애가 도덕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가를 전해주기 위한 메시지다. 모든 문학작품이 도덕이나 윤리를 선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나, 이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작가를 공인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이야기나 지루하게 늘어놓고, 병적일만큼

자기 감상이나 피력하는 데 그치는 문학은 가치창출에 기여할 수 없고,

가치 있는 창작행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또 하나의 공해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수필

에도 건전한 비평문화가 자리를 잡아 선도적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정실비평이나 찬사일변도의 결혼식 주례사와 같은 비평이 아닌 철저한

검증과 분석, 진로를 제시할 수 있는 비평문화가 수필계에 자리 잡을 때,

옥석이 가려져 수필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지난 한 해는 외화내빈의 노출시대였다. 작품수로 보아서는 풍성했지만, 천편

일률적인 소재와 자기응시의 변명이나 넋두리, 회고적인 성격이 주류를 이루었다.

변화 그 자체가 모두를 해결할 수는 없으나, 낡은 것은 과감히 털어내고 그 자리에

견고한 축조물을 건설해야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필요한 과업이다. 지난 한

해를 거울 삼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Ⅱ. 관념의 답습에 그치는 일반적 형식주의의 극복

 사회 각 분야에서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일시에 도태되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

못하던 것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수필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어떻게 각인되었으며, 그에 따른 문제점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수필의 진로 설정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에 대한 인식은 다른 장르, 시와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문학적이고,

형식이나 내용면에서도 제약요소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한계와 영역이 분명

하지 않아, 신변잡기에 그치는 것으로 관념화되어 있다. 이는 문학에 대한 지나친

권위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편견에 지나지 않지만, 검증없이 무조건 치부할 일은

아니다. 문학만 아니라, 사회전반에서 기존의 인식이 붕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지금은 인식이 교체되는 과도기다. 문학에서도

'퓨전의 시대'가 당도하고 있다. 이런 추세를 확인할 수 있는 두드러진 현상은

장르 사이의 전통적인 관념이 빛을 잃고, 문학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문학이

범역화되어가는 점이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시와 소설, 수필을 대비해 어느 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변화를 꾀하는 일이 중요하다.
 시와 수필, 소설은 모두 문학이라는 점에서 그 맥을 함께 한다. 다만 그 표현상의

차이와 목표, 갈등을 창출해 긴장감을 고조시킴으로써 문학적 이상에 도달할

것이냐, 아니면 합일을 통해 순화된 질서로 이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관념화된 인식이 서로 연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을 뿐,

실제는 그렇지 않은 만큼, 그 시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필의 발전적인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면과 함께 지성에 바탕한

건강한 작품이 창작되어야 한다. 지성은 자기절제를 기할 수 있는 힘이다.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비평이 자기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작가자신의 끊임없는 자기정진을 통해서만

실현가능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노력을 기울일 때, 수필은 문학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문학은 개성적인 표현과 혁신적인 사물인식의 태도가 낳은 창조물이다. 수필이

명실공히 독창성을 지닌 문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르와의 상보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신선한 상상력과 감동의 극대화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일은 수필의 진로에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다.


Ⅲ. 수필발전을 위한 모색

 수필은 다른 장르보다 인간미를 중시하고, 이를 근간으로 하여 나름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기에, 오늘의 당면한 과제인 인간성 회복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내적 바탕을 보유하여야 한다.현대인은 예외 없이 극도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불안과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다.

 생존이나 정체성(identity)을 어떤 형식으로든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세계질서를 흔들어 놓고, 이에 대항하는 국가의 저항양상을

살펴보면 이를 가늠할 수 있다.
 수필의 우선 목표는 정의의 제시여야 한다. 이는 인간성 회복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한 편의 시보다 몇배 더 참신하고, 소설작품보다 더 긴장감을 갖게 하며,

삶의 진실한 면모를 유감없이 제시할 수 있는 작품을 대중에게 파급시키면 군사적인

힘보다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다. 이것이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예다.
 숲을 보느라 나무를 보지 못하거나, 나무에 정신이 팔려 숲을 보지 못하는 수필

이나 수필인은 더이상 작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철저히 무장된

자기세계를 구축하는 일과, 세계와 우주를 바라보는 혜안이 시급하다. 그것이

좋은 수필을 낳는 근간이 될 수 있다.
 수필문학은 다른 장르에 비해 이론적 근간이 부족하다. 이 점에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제약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의 경계를 마련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이론이 만들어지고 그를 근거로 한 작품이 창작될 수 있고, 작품을 군집한

후 이를 바탕으로 한 이론을 결집할 수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합당하고 그렇지

못한가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만큼 병행할 수밖에 없다. 부단히 이론개발에 혼신을

다하면서, 예술적 가치를 고양할 수 있는 수필을 창작하는 일에도 매진해야 한다.
 현실에 주목할 때, 우리에게 당면한 일은 수필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건강한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의 회복'은 신뢰의 건전한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 스스로의

신뢰가 파괴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문학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조응관계를

살피고, 재무장하는 일이다.

Ⅳ. '수필의 날' 제정에 따른 의의와 각오

 2001년 12월 1일, 『현대수필문학회(현대수필)』에서 '수필의 날'을 제정하면서

발표했던 선언문은 단순히 의식(儀式)적인 절차에 의해 급조된 것이 아니고,

수필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뜻을 모아 인간의 삶에 기여할 수 있는 정신의

양과 새로운 생명의 열기와 인간만이 보유한 아름다운 심성을 발견케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간절한 염원을 모아 만든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필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음성이다. 진지한 삶의 돌아봄이다. 우리는 수필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가슴에 불꽃을 피울 수 있으며, 강과 바다를 찬란히

여울지게 할 수 있다. 인류의 화해와 자연과 신과의 만남도 이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지혜와 포용이 그 안에 있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수필과 함께 함을

확신한다. 수필은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향해 펼치는 사랑의 향연이고, 언어의 축제여야 한다. 모든 고뇌와 기쁨이

정제되어 수필의 품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의 삶도 빛날 수 있다.훗날에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이 날이 온전한 향기로 살아 있고, 그때마다 보다 더

큰 빛이 사람들의 가슴을 안온히 휩쌀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에 '수필의 날'을

제정한다.
 우리에게 시급한 당면과제는 건전한 삶의 풍토를 조성하고, 이를 생활의 근간

으로 삼아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가는 인간미를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구의

보존자원은 고갈되어 가고, 60억에 달하는 세계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하여

머잖아 100억에 이르게 된다. 생존환경이 최악의 상태를 향해 치닫는 상황 속에서

인구가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너무나 자명하다.

20세기 초 과학의 발달과 대량생산체제의 구축만이 인류를 무지와 궁핍에서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전력을 다해 매진한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편리와 풍요였지만, 생존질서의 문란과 지구환경의 파괴, 민심의

파탄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앞에서 우리에게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를 언급하면서 물질문명의 발달에

두지 않고, 인간성과 인간미의 회복을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수필이 해야 할

역할도 이를 근간으로 해야 한다. 지금은 변화의 물결이 휘몰아쳐, 발전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시대다.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문학도 한 운명에 처해 있다. 더이상

자기옹호나 변명의 수단으로 수필을 도구화해서는 안 되고, 그런 것을 기대해

서도 안 된다. 어떤 것이든 유일한 존립의 근거는 개체가 보유한 가치뿐이고,

얼마나 현대인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것이 인정되지 않는

한 위장된 논리로 포장을 해도 백일하에 드러나 지탄의 대상이 된다.문학은

인류 상호간의 문제와, 자연과 우주와의 갈등까지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문학의 출발이 신화적 세계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적 세계'란 신과 자연, 인간이 일체의 갈등 없이 하나로 합일된 상태를

말한다. 수필을 위시한 모든 문학과 예술은 반목을 극복하고 화해의 길을 여는

수단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이행해야만 한다. 수필은 의도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호소력 있게 전할 수 있는 특성을 보유하는 만큼 적극적으로 이에

매진해야 한다.

 '수필의 날' 제정에 따른 취지를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구체적 제안을 했다.

이를 되새기면서, 근본적인 의도가 어떤 것인가를 환기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열정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바람직한 준비라 믿고,

인간적 감동이 어린 작품을 창작하는 데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여기서 말한 '인간적 감동이 어린 작품'이란 단순히 자기경험을 소개하거나,

감상을 피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와 세계를 이해하고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

순응할 수 있는 심성을 고양할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의

사회현실은 생명의 존엄성이 경시되고, 도덕과 윤리가 한낱 인습 정도의 취급을

받으며, 물질만능의 잘못된 가치관이 팽배되어 있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다. 우리 사회는 우리의 후손들이 각축을 벌이며 살아가야 할 유일한

삶터인 만큼 우리의 힘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 현실적인 공간개발이나 편리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이타적인

삶에서 보람을 찾는 정신적 영토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것이 수필 ― 문학에

맡겨진 사명이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고발하는 일보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인간에 대간 애정을 근간으로 하는 작품을 낳는 일에 최선의 힘을 경주할 것이다.
 이는 일종의 방법론의 제시다. 사악해진 인간의 심성을 고발하는 것으로는

인류가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바에 이를 수 없다. 각박해진 현실 속에서 삶을

영위해 가다보니 인간의 단점이 노출된다. 그것은 부정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폄하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여지는 것이 그 개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면은

아니다.

어느 일면이 개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의 전체를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사탄의 눈에는 마수의 모습만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 문학이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빛이 되기 위해서는 이 점을 간과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우리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계도적인 글보다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발굴, 형상화하려는 자세로

일관된 노력을 할 것이다.문학은 특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그러한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문학은 대중의 호응과

사랑을 받을 수 없다. 문학이 나가야 할 길은 선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가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계몽적인 성격의 문학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다.
 넷째, 우리는 지금까지의 수필이 보여주었던 전통적 면모를 고수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는 일에도 나태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보존적 가치를 보유하는 것을

'전통'이라 하고, 시간적으로는 경과되었으나 그 존재의미를 상실한 것을 '인습'

이라고 한다. 지금 수필계가 해야 할 일은 참다운 가치를 보유한 전통을 수립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작가는 작가의 사명을

명찰하고, 이에 매진해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자기주변의 일을 소개하거나 자기변명에 급급한 글보다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수필문학을 만들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수필이 다른 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문학적이고, 신변잡기라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 이 일은 시급히 극복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는 수필을 감정의 소산물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연구하는 자세와

지성적 면모를 구축해 갈 것이다.
 수필이 단순한 경험이나 감정의 기록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수필인 모두가

진지한 연구자의 모습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기변명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보다 진지한 삶의 가치를 고양하고, 문학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정신적 무장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곱째,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두를 애정어린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과 이웃해 한가족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진정한 문학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크고 넓게, 깊이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근시안적 눈을 가진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은 그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작가에게 아쉬운 것은 자기 주변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반도라는 지정학적 특징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노력 여하에 따라 극복할

수 있다.
 여덟째,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힘을 보유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갈등임을 명지해 이를 수필을 통해 해결하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보유한 물질의 다과(多寡)를 통해, 사람을 평가하거나 계층을

나누는 일은 수치스러운 모습이다.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인류의 화해는

요원하다.
 그러한 면에서 강대국의 오만과 약소국의 비굴함이 다반사로 발견되는 오늘의

현실은 안타깝다. 이는 강압적인 힘이나 타협으로는 평정될 수 없다. 문학의

위력이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때만 이를 해결할 수 있다.
 아홉째, 우리는 모국어 발전을 통해서만이 성숙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할 것이다.
 작가의 사명은 기존의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서사(敍事)를 창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국어를 순화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 언어는 작가에게 생명

같은 존재다. 모국어는 작가에게 자기의 생각을 유감없이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열째, 우리는 문학이 현상을 기록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견고하게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함을 확신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다.
 문학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인간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한 모습이다.

어떤 일이든 완전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거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

간의 행복은 완전함에 도달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자신의 노력이 인류를 위해 어떤 보탬도 되지 않으면,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비극이다.

 이상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수필문학의 재무장의 필요성이다.

위기는 기회일 수 있고, 새롭게 길을 개척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필인의 각성과 각오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수필은 수적으로는 미증유의 기록을 세웠으나, 작품의

질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해이했기 때문이다. 다만 보여지는 것, 경험한 사실을 언어의 수단을

통해 기록하는 것은 그 가치를 감할 수밖에 없다. 수필의 목표는 사실의 기록에

있지 않고, 진리의 접근에 있어야 한다.

 작가가 스스로 작가의 사명을 명찰하고, 이를 위해 부단히 정진을 계속할

때만이 견고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수필의 성격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객관적인 비판의 잣대를 만드는 것이다.
 많은 신인이 문단에 진출하지만, 그들은 지금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표류하고 있다.

 등단은 출발일 뿐, 완성을 이룬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가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자격증 부여일 뿐이다.
 작가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공인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명찰하는 일이다.

자기의 세계를 축조할 수 있도록 정진을 계속하는 일이다. 그 길만이 수필의

전통을 새롭게 수립하는 길이다. 우리 수필은 자기주변사에 얽매여 표류하지

말고, 보다 크고 넓은 세계를 지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를 위해,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수필문학이 되기 위해 정진을 거듭하는 길만이 수필을 견고히

지킬 수 있고, 우리 시대의 가치를 고양하는 길이 될 수 있다.

 힘을 모아 다져진 세계를 만듦으로써 수필인의 수적 팽창에 그치지 않고, 그

상응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 창작되어 풍성한, 더없이 아름다운 작단(作壇)이

되기를 기대한다.

                                                         ◈ 筆者 : 윤재천 <한국수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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