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천의 수필문학 연구 - 남홍숙

작성자송남섭|작성시간16.12.10|조회수72 목록 댓글 0

윤재천 수필 문학 연구


남 홍 숙
(수필가)



Ⅰ. 서론

1. 문제 제기

근간 한국 수필 문학은 계간 ꡔ수필ꡕ, 격월간『수필과 비평ꡕ, 월간『수필문학ꡕ,『월간 에세이ꡕ, 계간『에세이 문학ꡕ,『창작수필ꡕ, 격월간『한국수필ꡕ, 계간『현대수필ꡕ 등 수필 전문지가 발행되고 있으며 수필가의 수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02. 1월 현재 문인협회에 등록된 수필가, 1350명.
동인지, 단행본, 문예지, 잡지를 통하여 수많은 작품이 발표되고 있는데 종래의 주류를 이루던 서정수필이나 신변잡기적인 수필에서 벗어나 사회비판․사색․철학적 수필 등 사회적이고 지성적인 수필이 증가하고 있으며, 수필의 문학성도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수필 문학은 문학의 한 장르이면서도 본연의 문학적인 위상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많은 일간지에서 행하는 신춘문예에서 수필 부문이 제외된 것에서도 단면이 드러난다. 한상렬은 , “한국문학상을 비롯한 일부의 문학상에도 아직 수필 문학을 제외시키고 있는 것도 역시 수필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윤재천,『수필학ꡕ 제 7집, 한국수필학연구소, 2000, p.236.
고 하였다. 또, 윤재천은 “이론이 체계화되지 않은 수필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혼류를 빚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이론 개발에 노력해야 한다” 한상렬, 「수필 문학의 현실에 대한 연구」, ꡔ수필학ꡕ 제 9집. 한국수필학회, 2002, 머리말.
고 하였다. 또 임헌영은 「현대 한국수필의 위상」에서 “피천득의 「수필」이 우리 시대의 보기 드문 명편이면서도 여기에 속박 당한 채 머리 깎인 삼손처럼 맥을 못 추는 오늘의 한국 수필이 너무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위의 책, p.133.
고 하면서, “오히려「수필」은 모든 문장의 뒤에다가 ‘…가 아니다’를 붙여 읽으면 진정한 광의의 수필 문학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고 덧 붙였다.

이렇듯 우리나라 수필 문학의 양상을 살펴보면, 작품과 작가에 비하여 수필이론, 작가론, 작품론의 연구가 미흡하다. 이는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써도 된다”,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등의 안이한 태도로써 글을 쓰도록 방치한 수필 문학적 문제점이며, 이것은 수필가들이 스스로 타개해 나가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글감으로 써진 수필에 있어서 작가의 감성에만 치우치고, 작가적 안목․절제된 감정․예리한 통찰력․독자의 흡인력을 고려하지 않을 때, 이를 수필 문학이라는 범주에 두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필 문학의 발전과 문학적 위상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수필 문학 이론이 요구되며 이를 작품에 도입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전문적인 수필가를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69년 11월 ꡔ현대문학ꡕ에 “만년 과도기”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윤재천은 수필이론서 26권과 수필집 10권을 발표하였다. 윤재천에 대하여 한상렬은 「정관(靜觀), 고요에의 침잠」에서, “우리 수필 문단에 흔치 않은 수필 문학의 연구자로서 본격 수필을 창작하는 윤재천은 실로 수필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본격 수필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윤재천, ꡔ수필학ꡕ 제8집, 한국수필학회, 2001, p.176.
고 하였고, 김정오는 「내일을 창조하며 사색하는 수필계의 거목」에서, “ 70년대 중반쯤, 윤재천을 주축으로 ‘한국수필문학회’를 창립했다. 모임은 신문에 보도되면서 수필문학계에 하나의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윤재천, 『수필의 길 40년ꡕ, 문학관, 2001, p.102.
고 하였다.
윤재천에 관한 연구는 단평만 있을 뿐,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사실 수필 문학에 있어 양적인 팽창에 비하여 질적인 확충이 부족한 지금, 문학의 답보상태에서 벗어나, 수필 문학의 ‘변화’를 추구하며 수필론을 개척하고 그것을 수필 문학에 접목시키면서, 40 년 간 수필의 외길만 걸어 온 윤재천의 수필 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 수필 문학사에 있어 의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 연구 방법 및 범위

김태길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쉽게 느껴지는 글」에서, 수필은 사실개념으로 정의 할 수 도 있고, 가치개념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사실개념으로 정의할 때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모두 수필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가치 개념으로서 정의할 때는 오직 수필다운 수필만이 수필로 인정된다. 윤재천, ꡔ나의 수필 쓰기ꡕ, 문학관, 2002, p.171.
고 했다. 이는 수필의 양적인 팽창에 비해 질적인 확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 비판적 견해이며 문학 수필과 비문학 수필을 구분하는 개념적 정의이다. 구인환은 「앙금에 비친 사색의 여적」에서, “수필은 그저 담수와 같은 심정으로 자연이나 인생을 바라보아 자유로운 형식에 담아 표현하는 문학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소설의 산문성을 침식하기도 하며 시의 서정성을 차용하기도 한다. 또한 사색의 앙금이 반짝이기도 하고 다소곳이 속삭이기도 한다” <수필춘추> 통권 7호, 1999. 가을. pp218~221.
고 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형식’ 이라 함은 아무런 제약 없이 쓰는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수필이 자유로운 형식이되, 문학 밖의 ‘餘技’가 아니라 문학 작품으로서의 자유로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필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작가의 개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문학으로 탄생된다.
본고에서는 먼저, 윤재천의 작가의식의 형성과 문학활동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둘째, 윤재천이 주장한 수필론을 살펴보고 그 특질을 추출해내어 정립해 보기로 한다. 셋째, 윤재천의 수필세계에 있어 문학적 특질을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윤재천, 구인환, 장백일은 수필 요소 중 4 요소설로서 소재, 구성, 주제, 문장(서술)을 들었다. 윤재천,구인환, 장백일, ꡔ수필 문학론ꡕ, 개문사, 1973, p.67.
필자는 이를 바탕으로, 윤재천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소재의 선택, 주제 의식, 구성, 문체의 특성에 대하여 연구한다. 주제별 유형으로는, 1. 명상적․사색적 수필, 2. 현실 비판적 수필, 3. 삶의 철학적 수필, 4. 자연 관조적 수필 등으로 구분해서 분석한다. 구성은 ‘단순구성’, ‘복합구성’, ‘긴축구성’, ‘산만구성’ 등 4가지의 측면에서 살펴본다. 또 윤재천 수필에 나타난 언어 표현에서 문체적 특성을 조명함으로써, 그의 수필 문학에 나타난 개성적 특질을 연구하기로 한다.
본고에서, 수필 이론서로는 ꡔ수필 문학론ꡕ(공저 1973), ꡔ수필창작의 이론과 실제ꡕ(1989), ꡔ수필 작법론ꡕ(1994), ꡔ수필작품론ꡕ(1994), ꡔ수필문학의 이해ꡕ(1995), ꡔ여류수필 작가론ꡕ(1998), ꡔ현대수필작가론ꡕ(1999), ꡔ수필이야기ꡕ(2000), ꡔ나의 수필 쓰기ꡕ(2002),(이상 9권)을 집중 연구 대상으로 할 것이며, 10권의 수필집 중 ꡔ구름카페ꡕ(1998), 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 상, 하권(2001) (이상 3권)에 실린 글 중, 중복되는 글을 제외하고 수필 작품 총 149편을 대상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이는 윤재천이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수필론을 연구하며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수필 작품에 어떠한 방식으로 접목시켰는지를 고찰하기 위하여는, 현재와 가장 근접한 수필 작품집을 분석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Ⅱ. 작가의식의 형성과 수필론

1. 작가의식의 형성과 문학 활동

윤재천은 1932년 경기도 안성에서 아버지 윤명희, 어머니 박수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에서 보낸 후, 1952년 중앙대학교 국어 국문과를 입학하여 현대문학을, 1956년에 동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20대 중반의 청년기에 당시 중앙대학교 문리대 학장이던 白鐵을 만나 1955년부터 1958년까지 4년 동안, 백철의 조교로 있게 되었다. 당시, 스승인 백철의 연구실을 드나들던 내방객은 거개가 시인, 소설가 등의 문필가였는데, 이는 그가 문학의 길로 들어서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60년대 초, 그가 집필을 시작하던 당대의 문학적 경향은 ‘수필이 餘技의 문학’ 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68년 상명여자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커리큘럼에 ‘수필론’을 시론이나 소설론과 동격의 과목으로 처음 올려놓고” 윤재천, ꡔ수필의 길 40년ꡕ, 앞의 책, p.129.
수필의 문학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이듬해 11월, ‘현대문학’지에 수필 「萬年過渡期」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다. 그리고 1958년부터 ‘국어국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1967년 ꡔ국문학 사전ꡕ을 발간하였으며, 1970년 ‘현대수필 문학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한국수필학회 이사’ 를 역임하면서 수필문학에 열의를 보인다. 1973년부터는 ꡔ수필문학론ꡕ, ꡔ수필 작법ꡕ 등의 수필 이론서를 발간한 것과 함께 현재까지 발표한 수필 이론서는 26권에 이르며 1974년 처녀 수필집 ꡔ다리가 예쁜 여인ꡕ을 필두로 현재까지 10권의 수필집에 600여 편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92년부터 수필 전문 계간지, ꡔ현대수필ꡕ을 발행하고 있으며 94년부터는 연속 간행물로서 국내 유일의 수필 이론지인 ꡔ隨筆學ꡕ을 창간하여 비매품으로 독자와 각 대학교 도서관에 공급하면서 수필 문학을 학문(science)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정오는 「내일을 창조하며 사색하는 수필계의 거목」에서,

김진섭을 한국 수필문학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윤재천은 한국 수필학의 아버지임에 틀림없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수필을 학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정착시킨 사람은 윤재천 이전에도 이후에도 아직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나 문인들이 논문과 이론서를 발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편적이고 단기성에 불과 했다. 묵묵히 수필을 학문의 경지로 끌어올린 윤재천의 업적은 문단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위의 책, p.103.

고 했고, 같은 책에서 정목일은 “주변 문학쯤으로 가볍게 보이던 시선을 본격 문학의 대상으로 바꿔 놓았다” 위의 책, p.320.
고 했다. 또 임헌영은, “1960년대 말엽부터는 아예 한국 강단 수필의 일인자로 군림했다” 위의 책, p.303.
고 하였으며, 또 구인환은, “윤재천은 수필과 수필 문학이 바로 삶의 의미요, 그 성취라고 할 만치 수필과 그 이론적 정립을 위한 수필문학을 삶의 동반자로 삼고 있는 것이다” 위의 책, p.38.
고 했다.
수필집,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에서 그는, “나는 지금 한없이 가볍다. 40여 년 동안 5~600편의 수필에 온갖 사유와 비판, 갈채와 질시, 미움과 사랑까지도 모두 실어보낸 이제, 가벼움은 나를 참으로 자유롭게 한다”고 했다. 이는 그의 문학관과 생활의 많은 부분이 수필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아 왔음을 암시한다.
윤재천의 호는 雲亭, ‘구름카페’이다. 수필 「구름카페」에서 그는, “구름을 좇는 몽상가들이 모여들어도 좋고, 구름을 따라 떠도는 역마살 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도 좋다. / 옆자리의 모르는 이에게 희망을 풀어 주기도 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며 꿈을 되찾을 수 있는 곳 즉, 상상 속에서 다가오는 따뜻한 풍경…”이라고 하는데서 로맨티스트로서의 면모도 풍긴다. 그는 2001년 12. 1일을 기점으로, 매년 12. 1일을 ‘수필의 날’로 제정하고 ‘수필의 날 선언문’을 낭독, 범 수필적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공표 하였다. 윤재천,「수필의 날 제정에 즈음하여」, <현대수필> 통권 41호, 2002. 3, pp.16 - 19.

대학 재학시절 백철, 김동리, 이병기, 조병화를 스승으로 조우하여 그들에게 문학을 수학했음에도, 그들이 걸었던 평론․ 소설․ 시조․ 시의 길을 따르지 않고 당대에는 불모지라 할 수 있던 수필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을, 남이 돌아보지 않는 분야를 일궈 내겠다는 그의 개척자적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인간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싶어하는 욕구가 저변에 내재된 것 일진데 윤재천은 수필 문학에 대한 개척 정신이 보다 강하게 서려 있었던 것이 아닐까. 40여 년 동안 수필 문학에만 전념해 온 연유는, 그의 수필 작품 전편을 타고 흐르는 ‘성실․ 진실․ 꿋꿋함’의 품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2. 창의적 기법을 모색하는 수필론

1) 수필가와 잡문인의 구분
“1920년대의 수필은 시인, 소설가, 수필가들의 전유물이 되었음은 물론, 정치인, 법조인, 학자 등 당대의 지성을 대변하는 명실상부한 시대의 노래, 민족의 분노와 저항성을 농축한 서사시로서, 또한 동양인의 문학으로서 각광” 오창익, 「1920년대 한국 수필 문학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85, p.13.
을 받게 되었다고 오창익은 그의 논문에서 말하였다. “평론 같은 수필, 소설 같은 수필이 성행하게 됨으로써 20년대 수필은 ‘양식에서뿐만 아니라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도 제 문학을 대표하고 리드’하게 된 것 위의 논문, p.13.
을 부인 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그러다가 “한국 본격 수필의 형성기라고 하는 1930년대에는 우리 수필 문단에도 수필에 대한 이론이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윤재천외. ꡔ수필문학론ꡕ. 앞의 책, p.48.

김광섭은,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것으로 보고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라고 하였으며, 김진섭도 시, 소설, 희곡 등은 명료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수필은 문학으로서의 일정한 형식을 갖지 못하고 차라리 작품으로서의 형식을 갖지 않는데 그 특질이 있다.

고 하였다. 신상철, ꡔ수필 문학의 이론ꡕ, 삼영사, 1984, pp.32 - 36.
피천득은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 피천득, ꡔ수필ꡕ, 샘터, 2001, p.18.
라고 하였다. 위의 정의를 언뜻 종합해 볼 때, 수필은 일정한 형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며, 구성의 원칙이 없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쓴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교를 부렸으나 기교가 표면화되지 않고, 형식을 따졌으나 형식의 구속감을 보이지 않고 그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재천은,

‘수필’하면 피천득과 이양하의 글을 떠올리고, 교과서적 수필 범주를 벗어나는 것을 제약시하는 문학적 풍토가 수필 문학계에 계속되는 한, 우리 수필의 항시적 진전은 기대할 수 없다. 교과서적 수필이 전형(典刑)을 이룬 이래, 반세기가 지나도록 수필은 그 수준과 범주,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재와 내용, 형식이 자유롭고 무한한 변혁과 발전을 기할 수 있는 장르가 수필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수필계에 자기 반성과 심기일전이 요청된다.
모든 면에서 긍정적이거나 모범적인 것은 아니지만, 김용옥(金容沃), 마광수(馬光洙), 김승희(金勝熙)의 자유분방하고, 대담하며 날카로운 산문은 한국 수필 문학의 발전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좋든 싫든 장르 확산의 이론이 보편화되어 있는 이즈음 이들이 전문 수필가가 아니라 철학자, 시인들이라는 점에서 수필계의 각성은 더욱 절실해 진다. 윤재천, ꡔ수필 이야기ꡕ 문학관, 2000, p.18.

고 하였다. 반세기 동안 문학의 한 장르이면서도 시나 소설만큼 문학성이 발전되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머문 이유를 수필계 스스로 반성하고 수필의 발전을 위해서는 수필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하여 전위적 문학의 실험을 행하여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이 무형식의 형식이라는 등 난해한 정의를 내리고 있어 신변잡기나 잡문이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므로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수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정의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윤재천은 또,

수필은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이다. 나를 떠날 때만이 나를 만날 수 있는 고도의 창작 행위다. 문학은 자기 응시만을 위해 필요한 거울 같은 무기물, 나르시시즘의 산물이 아니다. 위의 책, p.1.

고 하며 신변 잡기적인 잡문을 거부하고 ‘나’를 떠나 ‘우리’의 시각에서 세계를 들여다보고 자기에 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여과 시켜서 인생을 관조하여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쓰도록 하고 있다. 조연현은,

수필이 아무리 비형식의 형식을 그 특징으로 한다지만 형식이 없을 수 없고 형식적 특징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서정시적이면서도 서정시가 아니고 소설적이면서도 소설이 아니고, 희곡적․비평적이면서도 그런 것이 아닌 수필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조연현, ꡔ문학개론ꡕ, 어문각, 1983, p.196.

고 하였다. 수필에는 형식이 없을 수 없고, 시, 소설, 희곡인 듯 하면서도 수필의 독자적인 양식이 있다고 하였으며, 한흑구는

수필에는 고정된 형식이 없다고 하지만 붓이 가는 대로 제멋대로 쓴다고 하면 그것은 잡문이 될 것이고, 문학적인 작품은 될 수 는 없을 것이다. 한흑구, 「관념의 역할과 영감」, ꡔ한국수필ꡕ 1975, 가을, p.123.

고 하였다. 이는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은 잡문이 되어 문학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서정범은,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은 오해라 하겠는데, 이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은 어느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 그러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 붓 가는 대로 쓴다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라 잡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서정범, 「수필 문학의 반성」, , <월간문학> 154호, 1981. 12, pp.40 - 41.

고 했다. 이는 위의 김광섭, 김진섭, 피천득에 의한 수필 이론에서 보다 구체성을 띠거나 체계를 정립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형식이 없이 신변 토로만 늘어놓을 때 이는 잡문이지 수필이라는 문학의 범주에 속하지 못할 것이다. 문학성을 알고 수필을 쓸 때만이 수필가로 인정받으며, 붓 가는 대로 무작정 써 놓으면 잡문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 윤재천은,

그동안 수필가는 ‘잡문’이라는 일부 독설가의 비난과 조롱에 위축되어 잡문이란 용어를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필문학의 정상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수필가 스스로 이 어휘를 즐겨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이냐 하는 점이 문제지만, 문학성이 결핍된 작품을 ‘잡문’이라 칭하고, 그런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를 수필가라는 이름 대신 ‘잡문가’, ‘잡문인’ 이라고 하면 수필의 질은 괄목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윤재천, ꡔ수필 이야기ꡕ, 앞의 책, p.40.

고 했다. 이처럼 수필 문학에 있어서 ‘잡문’의 거론이 회자되는 것은, 전게한 피천득, 김광섭, 김진섭의 이론이 왜곡되게 받아들여져 신변 잡기적인 수필이 양산됨으로써 빚어진 결과라고 보겠다. 윤재천은, 문학이랍시고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잡문은 무조건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수필가 대신 ‘잡문인’․‘잡문가’로 분류하자는 것이다. 이는 조연현, 한흑구, 서정범의 수필론과 일맥상통하기도 하며, 수필 문학의 비 문학성에 대하여 진일보한 대응책이라 생각된다.
문학이란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문자로 표현하되 미학을 불어넣어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야 되기 때문에, 잡문과 수필은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윤오영은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한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 글이 유창하고 재미있고 미려해도 문학적 정서에서 출발하지 아니한 것은 잡문이다” 윤오영, ꡔ수필문학 입문ꡕ, 태학사, 2001, p.175.
고 함으로써 잡문과 수필이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다.

2) 허구성의 강조
이정림은 “수필에서 창조라는 말은 허구와 동의어이다. 수필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이정림, ꡔ한국 수필 평론ꡕ, 범우사, 1998, p.59.
이에 대하여 김병규는 “수필에서 허구는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필에서도 허구가 아닌 창조는 용인되어야 하지 않을까. 수필가가 일상 생활 속에서 여느 사람이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썼을 때 그것은 하나의 ‘창조’라 할 수는 없을까” 김병규, 「수필의 자리매김을 위한 노력」, <수필공원>, 1998, 여름, pp.317~318.
고 하였으며, 일부 논자들은 “수필 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장 할 수 있다면 이를(허구) 거부할 이유가 없다(정진권)고 했으며, 허구가 있음으로써 사람의 정신 세계는 풍요로워지고 생활의 폭은 넓어진다.(공덕용) 고 주장하고 있다. 윤재천, ꡔ수필학ꡕ 제 6집, 앞의 책, p.97.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상상(想像, imagination)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좋게,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 이상섭, ꡔ문학비평 용어 사전ꡕ, 민음사, 1976, p127, 위의 책, p.98 재인용.
이라 하였고, 김우종은 “상상력의 공급부족으로 인한 미적 감동의 결핍현상” 김우종, 「한국수필의 문제성과 그 극복」 - 젊은 독자가 원하는 수필, <수필공원>, 1997, 겨울. p.106.
을 예로 들었다. 윤재천은,

수필 고유의 미감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허구의 도입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작가의 정화된 감정과 사려 깊은 태도가 내포되어 있지 않거나 완전히 전해지지 않은 문학은 장르에 관계없이 문학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한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진실을 보다 진솔하게 구명하기 위해서 어떠한 기교와 기법의 도입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윤재천, ꡔ수필 이야기ꡕ, 앞의 책, p.61.

고 하였다. 수필의 미학은 기교와 기법이 필요하고,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행위가 따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윤재천이 말하는 허구란, 삶을 관조적으로 조망하고 사색을 통한 사려 깊은 자세를 말한다. 즉, 인간의 본질을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한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생생한 체험이 사색을 통해 걸러지는 심상의 세계, 그것은 체험의 재창출이며 문학적 형상화이다. 윤재천은 그것을 허구로 보는 것이다. 위 논지를 종합해 볼 때, 김병규, 정진권, 공덕용, 김우종, 프란시스 베이컨은 윤재천과 같은 맥락으로서 수필에도 상상력과 허구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필자의 생각은, 수필이 사실 체험에서 우러나온 문학적인 글인 만큼 독자가 일상 생활에서 발견하지 못한 미감의 발견 - 상상력에 의한 허구를 수용하되 후일 독자에게 실망을 안겨 줄만큼 비약적인 허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수필이 아니라 허구성을 기조로 하는 소설이나 꽁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소설, 수필의 틀이 무너지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의 문단풍토가 조성되고 있더라도 시, 소설, 수필 등의 문학적인 변별성은 지켜야 할 것이다.

3) 퓨전 수필의 제시
퓨전 퓨전의 사전적 의미로는 융합, 결합, 연합, 합병, 제휴, 연합체등의 뜻이지만, 이제는 문화현상의 키워드로서 ‘서로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섞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 이란 뜻으로 확대되어 쓰인다. (이상, 이유식「새시대의 수필 소재와 장르 확대」, 윤재천, ꡔ수필학ꡕ 제 8집, 앞의 책, p. 47 참조)
수필에 대하여 이유식은 「새시대의 수필 소재와 장르 확대」에서, “시와 소설, 수필을 합성하여 문학을 창출하되 그것은 수필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영역, 즉, 수필이란 동일 장르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위의 책, p.147.
이라고 하였다. 구인환은 또, “시의 정서와 메타포, 소설의 설화성과 서사성, 희곡의 공간성에 빠지지 않고 회귀의 미학을 살릴 때에 수필은 알베레스의 말대로 흔들리는 구슬들 사이로 반짝이는 불꽃이 될 수 있다” 윤재천, ꡔ수필학ꡕ제 4집, 한국수필학회, 1997. 2, p.21
고 했다. 이는 이유식의 논지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윤재천은 또,

과거와는 달리 시와 구별이 모호해진, 수필이나 동화 같은 순수함을 지닌 수필, 소설 이상으로 독자를 긴장시킬 수 있는 수필 작품과 비평적 성격이 강한 수필의 모습이 등장하여 문학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퓨전수필’이며 시적 수필, 소설적 수필, 비평적 수필, 희곡적 수필, 동화적 수필로 확장 발전해야한다. 이 모두가 어우러져 녹아 내릴 때 ‘퓨전수필’의 특성을 구축 할 수 있다. 윤재천, ꡔ수필 이야기ꡕ, 앞의 책, p.124.

고 하였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수필은 ‘퓨전수필’이라며 어느 형태의 문학이든 독자의 관심을 끌지 않으면 퇴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 문학의 포용력이 강한 퓨전수필로써, 수필 문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그는 또, “퓨전 시대의 수필은 무엇보다 지루함을 경계한다” 윤재천, ꡔ수필학ꡕ 제9집, 앞의 책, p.95.
고 하였다. 여기서 윤재천이 나타내는 퓨전은 무질서한 해체나 집결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는 우리의 생활에 대응하는 문학 - 시와 소설, 수필의 영역 구분에 대한 굳건한 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도 문학이라는, 확고한 기반 위에서 재창출되고 발전하는 문학의 형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수필이라는 기존의 고정된 틀에서, 상상력이 동원된 창의적인 수필 문학의 기법을 모색하고 있다. 무분별한 확장이나 통합이 아니라 이론을 근거로 한 작품의 창출을 희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수필 문학의 결집을 바라는 것이다. 전게한 ‘허구성의 강조’가 내용적 측면이 강한 이론이라면, ‘퓨전수필’은 형식적 측면을 더 강조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4) 수필 문장의 美文化
윤재천은 「수필문장의 美文化」라는 글에서,

미문(美文)은 미사여구로 채워진 글이 아니다. 이를 명확히 구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미사여구의 남발은 오히려 글을 천박하게 할 뿐,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장해 요인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수필문우회 엮음, ꡔ한국수필의 위상 제고ꡕ, 2001, p.62.

고 하였다. 미문(美文)의 사전적 의미는, “아름다운 글귀로 쓰여진 글”이다. 언제부터인가 문학에서의 미문은, 아름답게 꾸며 쓴, 천박한 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윤재천이 보는 미문은, 밖으로 드러내는 형식적인 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내면에 문학적인 미학이 함유됨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다음의 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수필은 의도적으로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설 필요가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다 냉철한 비판을 스스로 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힘의 문학으로서 작가적 이상을 실현 할 수 있다. 이는 보다 지성적인 작가로 태어나고 무장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전을 통해 문학의 진지함을 답습하고, 젊은 작가의 신선한 반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감상은 더 이상 수필의 범역이 아님을 인식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와 미문의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위의 책, p.63.

이렇게 윤재천이 주장하는 수필의 진정한 미문화란, 밖으로 드러내는 글이 아니다.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를 비판 할 수 있고, 지성의 눈으로 고전 문학의 진지함과 젊은 작가의 신선한 반란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윤재천이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은, 미사여구로 채워진 수필을 지양하고 지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작가적 소명을 발휘함으로써 보다 깊이 있는 수필을 창조하자는 것이다. 이는, 문학의 범주에서 소외되고 있는 수필을 보다 수준 있는 문학으로 평가받기 위하여 수필가 스스로 노력하여야 한다는 논지라고 본다. 윤재천이 제기한 수필의 진정한 미문화란 첫째, 예술적 긴장감으로 팽팽한 글, 둘째, 지속적으로 감동을 유발하는 글, 셋째, 항구적 가치를 유지하는 글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진권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미문이란 아름다운 글을 뜻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수필에 있어서 미문이라고 하면 흔히 일부러 아름답게 쓴 글을 의미하게 되었다. (중략) 이런 글을 꼭 미문이라고 해야하는가.(미문을 부정적으로 보는 현실을 고려 할 때)하는 용어 사용상의 문제는 혹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어떻든 나는 윤재천 교수가 이번에 우리 수필가들이 반드시 도달해야 할 문장상의 한 목표를 설정 해 준데 대하여 경의를 표한다. 위의 책, p.65

윤재천, 구인환, 장백일은 “미사여구문은 화려체(flowery style)문장에서 많이 대하게 된다. 비유와 미려가 지나칠 정도로 많을 뿐만 아니라 문장이 화려한 스타일이다. 일종의 美文이라 할 수 있다. 한 센텐스 안에 직유, 은유, 의인법 등이 중첩되어 있어 마치 말의 비단을 짠 것 같다. 이러한 미사여구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현실감, 사실감이 감소되기 쉽다” 윤재천외, ꡔ수필 문학론ꡕ, 앞의 책, p.135.
고 했다. 또 이정림은, “미문이란 미사여구로 쓰여진 문장을 말한다. 미문의 특징은 한 문장 속에 비유된 수식이 넘치게 들어 있어 그 꾸밈이 화려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다” 이정림, ꡔ한국수필 평론ꡕ, 범우사, 1998, p.20.
고 했으며, 김태길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쉽게 쓰여지는 글」에서 “초보적 독자들의 미감과 잘 어울리는 문장을 세상에서는 흔히 미문이라고 부른다” 윤재천, ꡔ나의 수필 쓰기ꡕ, 문학관, 2002, p.171.
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윤재천이 제기한 美文이란 용어 사용상의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상으로 그의 수필론 중, 특질적인 것 4가지를 추출해서 고찰 해 보았다.
끝으로 그의 수필 「수필은」 이라는 글에서 나타난 수필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수필은 삶에 대한 작가 자신의 진지한 해석이다.
2) 수필은 내용과 형식의 구속이 적은 포용력이 강한 문학이다.
3) 수필에는 인간적 체취가 서려 있어야 하고 자기 삶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어야 한다.
4) 수필에는 날카로운 비판이 내재되어 있어야 하나, 검증과 객관성 없이 비 난해서는 안 된다.
5) 수필은 함축미를 가진 언어에 의해 자체의 미감을 확대하기도 하고, 점층 적 효과를 발현하기도 한다.
6) 수필은 쉽고 부드럽게 써야 한다.
7) 수필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의 수필론을 종합해 볼 때, 수필문학입문에서 상용되어 오던 피천득의 수필론 ①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蘭이요 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 같은 글이 다.
② 수필에는 설흔 여섯 살 中年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情熱이나 심오한 지 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다.
③ 수필에는 인생의 香趣와 餘韻이 담겨 있는 글이다.
④ 수필의 색깔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 같은 글이다.
⑤ 수필은 산뜻한 문학이다.
⑥ 수필은 꽃다운 향기를 갖고 있는 茶와 같은 글이다. (이상, 윤재천외, ꡔ수필 문학론ꡕ, 앞의 책, p.136 참조)
과는 상대적 논지임을 알 수 있다. 즉 피천득 수필이 주변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주로 쓰는 찰스 램형의 수필이라면, 윤재천 수필은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프란시스 베이컨형의 수필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윤재천이 추구하는 수필론을 종합해 보면, 그는 문학이 시대의 변화에 대응함은 물론 사회의 흐름을 선도하는 역할로서의 변화된 기법, 즉 기존의 수필론을 수용하면서도 확장 발전하는 수필 문학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Ⅲ. 수필의 주제 분석

연구 대상으로 삼은 윤재천의 수필집 중, ꡔ구름카페ꡕ에 수록 된 작품 70편을 대상으로 분석 해보면, 자연물을 소재로 취한 작품은 17편이었고, 의견진술을 소재로 취택한 작품이 그 나머지를 차지한다. 자연물 중에는 구름․ 달․ 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각각 1편씩이며 그 외에는 봄․ 여름․ 겨울이라는 ‘계절’을 소재로 취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물을 관조하며 음미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연물을 그 자체만으로 보아 넘기지 않고 사회․ 역사․ 환경․ 문화적인 측면으로 결부시켜서, 명상과 사색으로써 그들의 내면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소재를 바탕으로 하여 주제가 표출 되는 바, 필자는 주제의 분석에 앞서, ꡔ구름카페ꡕ에서 나타나는 윤재천 수필 작품 중 2편을 추출하여 소재의 특질을 분석해 보겠다.

바람이 전하고 있는 무수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산다는 것이 그렇게 소중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소중함이란 의욕과 그리움일수도 있고, 아픔일수도 있다. 떠도는 바람의 체온에 자신의 온기를 확인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짜 바람과 마주한다. 바람, 그것은 간절한 기다림이다. 「바람의 실체」 윤재천, ꡔ구름카페ꡕ, 앞의 책, p.24.

김병규는 “깨닫게 되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 우리의 의식을 멈추게 하고, 일상의 의식에 나타나는 현실의 단편에서 구체적인 전체를 향하여 우리를 넘어서게 하는 심벌적 형태가 예술” 김병규,「신변잡기론」, 윤재천,ꡔ수필학ꡕ 제 6집, 앞의 책, p.17.
이라고 하였다. 위의 작품에서 소재로 등장한 ‘바람’은 자연물이면서도 우리의 구체적 삶 위에 놓여진 의식, 즉 오랜 응시에 의해 나타나는 정신의 세계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바람은, 인간의 ‘소망’과 자연의 ‘바람’이라는 중첩된 의미로 해석 할 수도 있다. 위 인용문에서 앞부분 3행까지의 바람은 자연을, 뒷부분의 4행에 인용된 바람을 우리 인간의 소망으로 해석해 보면 이 작품은 보다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즉, 바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바람의 온기에 자신을 확인하면서, 인간의 내면과 자연이 화합하게 되어 작가가 희구하는 하나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바람처럼 스쳐 지나치는 일상이 윤재천의 작품에 소재로 취택되어, 수필의 주제로 형상화되고 있다.
윤재천, 구인환, 장백일은 소재를 작가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두 종류로 나누었다. 繼時的 소재와 同時的 소재 ① 繼時的 소재 : 사건, 여행, 행사, 약속 등은 주로 시간성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 로 시간적 순서를 따라 널려 있는 소재를 말한다.
② 同時的 素材 : 자연, 사회적, 공간적, 상황, 오락회의 유희. 의견진술 등은 대개 공간성을 띄고 있으므로 동시적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繼時的 소재와 同時的 素材는 결국 소재의 두 성질에 지나지 않는다. 윤재천외, ꡔ수필 문학론ꡕ 앞의 책, p.71 참조.
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윤재천의 수필에 취택 된 소재를 繼時的 소재와 同時的 소재로 분류해 본 결과, 자연물과 의견진술들로 이루어진 同時的 소재에 속하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권희관은 그의 논문에서 “계시적 소재가 動的인데 비하여 동시적 소재는 靜的” 권희관, 「윤오영 수필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5, p.38.
이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윤재천의 생활상은, 動的이 아니라 靜的이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업의 현장에서 담 흘릴 때도 일부 부유층에서 벌이는 사치성 행락과 부유층 자녀의 퇴폐적 행위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외국에 유학하여 선진학문을 배운다고 20 만불의 거액을 불법으로 예치하는 일도 법으로 다스려야 하고, 도피성 유학도 철저히 규제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는 땀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음을 증거한다. 철저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남이 겪는 아픔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좋으면 된다는 보신주의(補身主義)를 잉태시켰다. (중략) 이 일은 줄기가 바로 잡히고, 가지치기가 잘 된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척박한 땅에 거름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주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런 때 언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은 단순한 폭로가 아닌 치유의 의지를 심어 주는데 이어져야 한다. 「형평의 시대」 윤재천, 「구름카페」, 앞의 책, p.208.

수필의 소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포함 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깊은 사색과 관심을 배제한 수필의 소재는 표피적인 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작가가 수집한 소재를 깊은 사유로써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나갈 때 양질의 수필을 건져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 글에서는 윤재천의 예리한 정신 세계가 감지된다. 또한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들과는 따스한 온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인간미도 내포되어 있다. 윤재천의 수필에는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소재로 하여 그것에 대한 의견을 진술하는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또 윤재천이 수필의 소재로 취택되는 것은 자신과 함께 뒹굴고 부대끼는 친구․ 나․ 스승․ 제자․ 아내․ 자식 등의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자연․ 수필․ 사회․ 문화․ 역사․ 여자 등의 객관적 대상을 소재로 취하여 평소 독자가 발견하지 못하던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의견 진술을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것은 신변잡기적인 수필을 소재 취택에서부터 배제하고, 보다 격조 있는 수필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또 윤재천이 제시한 ‘수필 문학적 과제’ 윤재천이 제기한 수필 문학적 과제를 정리하면, 첫째, 한 작품 안에서 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고찰 해야한다. 한 개인의 감성이 모든 이의 공통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광수나 최남선의 계몽적, 교시적 수필은 작가 나름의 나르시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는 호응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요즈음 유행되고 있는 감성위주의 가벼운 글감으로 언어 나열에 불과한 작품도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없기에 극단적인 면은 재고되어야 한다. 둘째, 수필이 이 시대의 현장에서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셋째, 무엇이 진실에 도달하는 첩경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는 창작의 방법적 문제인데, 사소설(私小說)과의 한계를 분명히 하여 수필의 독자적인 면모를 갖추어야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변모의 기도가 성공 할 수 있다.( 이상, 윤재천, ꡔ수필이야기ꡕ, 앞의 책, pp.11 ~ 12 참조)
의 실천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자연․수필․ 사회․ 문화․ 역사․ 여자 등 인간의 내면을 소재로 도입하는 윤재천의 수필은 어렵게 써서 쉽게 읽히는 수필이다. 미국의 비평가인 윈체스터(C.T.winchester)는 문학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항구성(peranence)과 보편성(unrversality), 개성(individiallity)"을 들었다. C.T. Winchster, 『Some Principles of Literary Criticism』, 신상철, 『수필문학의 이론』, 삼영사, 1996, p.95 재인용.
여기에서 항구성이란, 시간적으로 영속함을 뜻하는 것이요, 보편성이란 공간적으로 형통함을 의미하며 개성이란 개성적, 독창성을 말한다.
윤재천 수필의 소재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同時的 소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윈체스터가 말하는 보편성, 항구성, 개성도 다분하게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서 소재를 찾되, 수필 작품에서 흔히 도입되고 있는 개인사적인 ‘나’의 주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보편적 정서에 닿아 있는 ‘우리’ 의 주변을 소재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소재를 바탕으로 하여, 작가의식이 담긴 주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필자가 연구 대상으로 삼은 윤재천의 수필 149편 중에서 나타나는 주제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분석해 보면, 명상적․사색적 수필(34편), 현실 비판적 수필(36편), 삶의 철학적 수필(54편), 자연 관조적 수필(25편)로 분류된다. 그의 수필 작품에 나타나는 주제를 분석해 봄으로써 윤재천이 나타내려고 하는 주제의 모색, 자기 목소리, 자연의 관조, 인생의 철학은 무엇이었나를 파악해 보고자한다.

1. 명상적․사색적 수필

대상으로 삼은 149편의 수필 중 명상적, 사색적 특질인 작품은 34편으로 나타났다. 「구름까페」, 「촛불」, 「들꽃을 좋아하는 사람」, 「행복의 기준」, 「영원히 살아가는 길」, 「정관(靜觀)의 세계」, 「찬란한 설봉(雪峰)을 향하여」, 「사랑의 묘목(苗木)」, 「인연의 늪」, 「사랑은 고귀한 생명체」, 「서울의 불빛」, 「판소리」, 「더위를 잊는 생활」, 「모순을 넘을 때」, 「담 안과 담 밖」, 「와류(渦流)와 역류(逆流)」 「다목적 웃음」, 「값진 여정(女情)」, 「다방」, 「종로(鐘路)」, 「위선자」, 「눈물의 미학(美學)」, 「사랑과 미움」, 「멋진 의미의 멋」, 「나를 만나는 시간에」, 「심미(審美)」, 「바둑을 두듯이」, 「대화의 시대」, 「멋있는 여성」, 「명상」, 「아름다운 사랑」, 「사랑의 꽃」, 「책임을 지는 나이」 등의 작품에서 육안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심안의 세계로 침잠 시켜 정관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세계를 보여준다. 무의미하고, 고독해 보이는 현실의 세계를 무한한 현상계로 데려가 그 안에 내재 된 의미와 질서를 추출해 내어 그것의 존재성과 가치를 부여하고 세계를 탐구하게 한다. 또한 명상적․사색적 특질을 지니면서도 자연을 소재로 다룬 작품은, ‘자연의 관조’ 라 명명하여 따로 분류했음을 밝힌다.

겨울 저녁 한 줄기 버스 창 틈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외롭고 가는 햇살은 시야를 밝게 해주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피곤에 흐려졌던 동공에 긴축감을 준다. 생생한 생명감을 준다. 한 줄기 햇살은 무럭무럭 잘 자라 주는 자식과 나무와 같다.
이 햇살 덕택에 속눈썹 위에 올라앉아 있는 한 점의 먼지를 잡을 수 있다. 가만히 관찰 해 보면, 속눈썹 위에 앉아 있는 한 점 먼지는 크게 크게 확대되어 온다. 회색 빛이기도 하고, 크림 빛이기도 하며, 어떻게 보면 바이올렛 빛이다.
자세히 보면 햇살의 칠색 무지개는 ‘살로메’의 일곱 가지 너울 같기도 하다. 여기에는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있고, 보고 싶은 얼굴이 그려져 있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참회록을 집필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이고, 딸에게 글을 받아쓰게 하는 눈 먼 ‘밀턴’이 보인다. 나는 여기서 우주를 보며 만물을 본다. 섭리도 깨닫고 진리도 깨우친다. 「정관의 세계」 윤재천, ꡔ구름카페ꡕ, 문학관, 1998. 10, pp 92~93.

인식론적 다원주의 전통적 관점은 아마도 성 보나벤투라(st. boventure)와 성 빅토르의후고(Hugh of st.victor)같은 기독교 신비가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가장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모든 인간은 육신의 눈, 마음의 눈, 관조, 靜觀의 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켄 윌버(Ken Wilber), ꡔ감각과 영혼의 만남ꡕ, 범양사, 2000, p.43.
여기에서 켄 윌버는 ‘육신의 눈은 독백적이고, 마음의 눈은 대화적이며 정관의 눈은 초논리적이다.라고 했다. 또 초논리란 논리적인 것, 합리적인 것, 또는 이지적인 것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조의 눈에 의해 드러나는 형상없는 세계에 대한(무색의 세계에 대한) 신비주의는 초논리적이다.’ 라고 하였다.

퇴근길, 차 속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 그 햇살에 비친 한 점 먼지를 따라 그만이 구축해 놓은 깊고 넓은 사색의 길로 들어간다. 우주의 테두리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은 한 점 먼지에 불과 하지만, 내면의 세계는 우주를 지배할 수도 있다. 그것을 비추는 햇살은 윤재천에게, 돌아가신 어머니, 아우구스티누스, 눈먼 밀턴의 모습을 상상하는 ‘정관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로써 독자는 작은 것에서 의미를 추출하여 점차적인 확장으로, 무한한 삶을 탐구하고,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작가에게 그것의 귀결점은 수필의 세계이다. 한 점 먼지는 수필의 세계요, 한편의 수필이 착상되는 실마리인 것이다. 그가 구축해 놓은 수필의 세계는 먼지처럼 작은 듯하나 무한한 철학의 경지다. 그가 말하는 수필의 의미는 고요에로의 침잠이다. 그는 고요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또 그것을 채우는 작업에서 문학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그가 수필을 쓰는 이유는, ‘진지함에의 도달’이고, 그 인생관은, ‘진지하게 살고자 함’이며, ‘성실하게 살고자 함’이라고 했다. 이러한 진지함과 성실함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는 그의 작품 전편에 내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수필은 1982년의 수필집 ꡔ요즈음 사람들ꡕ에 발표되었던 글을 개작한 작품이다. 당시의 ‘이렇듯’, ‘아무튼’, ‘그런데’, ‘또’ …… 등의 접속사와 부사어를 삭제하였으며, ‘깨달아지고’, ‘깨달아진다’를 ‘깨닫고’, ‘깨우친다’ 등으로 간략하게 변형하였다. 윤재천의 수필에서 부사어와 접속어가 점점 줄어듦으로써 문체상의 간결함과 주제 전달의 적확함은 인정되지만 어휘를 과다하게 생략함으로써, 문장상의 인색함과 공소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구름을 좇는 몽상가들이 모여들어도 좋고, 구름을 따라 떠도는 역마살 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도 좋다. 구름 낀 가슴으로 찾아들어 차 한잔에 마음을 씻고, 먹구름뿐인 현실을 잠시 비껴 앉아 머리를 식혀도 좋다.
꿈에 부푼 사람은 옆자리의 모르는 이에게 희망을 풀어주기도 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런 사람을 보며 꿈을 되찾을 수 있는 곳, ‘구름카페’는 상상 속에서 늘 나에게 따뜻한 풍경으로 다가오곤 한다. 「구름카페」 윤재천, ꡔ구름카페ꡕ, 앞의 책, p.19.

프로이드는 “대개 사람은 꿈속에서 자기가 착상하고 있는 것이나, 자기의 마음을 가끔 괴롭히는 것이나, 자기의 마음을 만족시켜주지 않는 것을 꿈꾼다” 프로이드저, 이영복(李英福)역, ꡔ꿈의 해석(解釋)ꡕ, 신문출판사, 1979, p.18.
고 했다. 이 글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소망을 회화적으로 그린 수필이다. 타인에 의해서, 스스로에 의해서 명명된 로맨티스트 윤재천, 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상․하권, 문학관, 2001, 머리말.
- 그가 로맨티스트라는 것을 감지 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구름카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에 펼쳐질 희망이요, 그리움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구름 카페에는 더욱 절실한 그리움이 내재되어 있다. 작가가 추구하는 현실은 소박함과 진실의 결집체가 구름처럼 모여드는 참다운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일 수 있다. 문명생활에서 마모된 인간미를 회복하고 상실의 위기에 처한 삶의 진실성과 소박성을 희구하고 있다.

만약 내가 한 묶음의 장미꽃을 상품으로 수여하는 상을 만들 수 있다면 시상식은 ‘구름카페’가 제격일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이 꽃 한 송이씩 들고 와 수상자에게 마음과 함께 전함으로써 상금을 대신하는 ‘구름카페 문학상’을 만들어 상을 받는 사람과 시상하는 주최측이 자랑스러움에 벅찰 수 있는 문학상을 서초동 꽃마을에 뿌리내리고 싶다.
‘구름카페’ 천장과 벽에는 여러 나라의 풍물이 담긴 종을 매달아 문이 열리거나 바람이 불 때마다 들리는 신비한 소리가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고, 다른 한편에는 세계의 파이프와 민속품을 진열해 놓아 구름처럼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가야 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고 싶다. 그 장소가 마련되면 한 시대를 함께 지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원히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향기 짙은 차를 마시며 비 내리는 날은 비를, 눈 내리는 날은 눈발에 마음을 함께 보내고 싶다. 「구름카페」 윤재천, ꡔ구름카페ꡕ, 앞의 책, p.21.

윤재천의 호는 雲亭이다. 여유로운 현실과 꿈을 좇는 ‘구름카페’이다. 그의 내면 의식, 경험, 독백, 정신, 가치, 도덕, 예술을 구름이라는 꿈의 카페, 자연물에 담고 있다. 그는 일상을 초월하여 허공에 떠가는 구름이 된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먹구름의 꿈을 깨고, 구름카페를 갖는 꿈이 실현되더라도 마음은 소박하고 진실한 그대로이고 싶어한다. 그것은 그가 꿈꾸는 ‘구름카페 문학상’의 상품이 ‘장미꽃 한 다발’이라는 표현에서 우러나온다. 또 ‘비 내리는 날은 비를, 눈 내리는 날은 눈발에 마음을 보내고 싶다’라는 구절에서는, 그가 욕심 없는, 청랑한 현실적 심경을 소망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주변의 시선에 급급해 있는 우리의 문학상과 프랑스의 ‘두마고카페문학상’을 비교하고 있다. 큰 상품도 없이 상장과 메달만 수여하여도 작가들이 창작에만 열중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두마고카페문학상’은 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구름카페 문학상’의 시상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장미꽃 한 송이씩을 들고 오기를 희구하고 있다. 이에 그가 원하고 있는 문학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우리 문단의 풍토를 깊이 반성하고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심중에 심어 놓은 꽃을 가꾸며 산다. 형체는 없이 향기와 이름만 남아 있는 꽃, 이름조차 희미해진 채 체온만 남아 있는 꽃,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어 늘 심중은 보물로 그득하다. 남의 눈에는 한낱 덧없는 것인지 모르지만, 자기에게는 이 세상의 어느 것과 견줄 수 없는 보물섬 그것이 인연의 늪이다.
‘그리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며 이제는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처럼 연륜을 바라보기만 할 뿐, 가지 않은 길을 향한 미련의 흔적이다. 그것은 형벌일 수도 있다. 그리움과 아쉬움은 일종의 형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면서도 사랑을 놓지 않고 산다.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가슴을 달구었던 사랑을 흔적도 없이 망각하는 잔인함이다. 가슴의 꽃밭을 짓밟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인연의 늪이다. 「인연의 늪」 위의 책, p.127.

윤재천은 깊은 명상과 사색으로, 무형을 유형으로 만들고 무생물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그가 갖는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 의미를 도출한다. 맹목적으로 만나고, 맹목적으로 조우를 반복하던 인연도 윤재천에게 다가가면 약동하는 생명감을 느끼고 인생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는 자연물을 바라볼 때 깊은 명상과 사색을 통하여 사유를 끌어들이는, 그가 지닌 깊은 내면에서 연유한다. 또 그가 머리로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가슴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움과 아쉬움, 사랑과 잔인함의 존재를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우리 인간이 가슴에 품고 소중하게 가꾸어 오던 것을, 한 순간에 없었던 것이라고 망각해 버리는 행위를 잔인함으로 명명한 대목에서, 깊은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그것을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가시가 장미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참다운 사랑엔 그만한 무게와 부피의 아픔이 따르고 눈물이 배어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사랑은 완전한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뒤척이게 하는 간절함을 통해 움트는 것이며, 그 아픔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사랑은 고귀한 생명체」 위의 책, pp.138~139.

이 글에서 작가가 나타내고자하는 장미의 아름다움이란 화려한 꽃송이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픔인 가시도 그 몫을 담당한다. 윤재천이 나타내는 장미의 꽃은 외형이며 가시는 아픔을 동반하고 눈물이 배어 있는 내면으로 보인다. 장미처럼, 사랑도 아픔을 동반하면서 더 고귀한 생명체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진지한 생활이 바로 윤재천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이로운 것을 변별적으로 흡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아픔과 기쁨, 환희와 절망을 용액처럼 느끼며 그것을 자신의 정신세계에 용해한다. 사랑에 있어서도, 결코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은 내면의 견고하지 못함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육안의 눈으로만 계측 될 수 있는 좁고 얕은 현상계를 수필을 통하여 깊고 넓은 심안의 세계로 안내하려고 한다.

멋은 때로는 못 생긴 것에서 발견되기도 하며, 투박하고 꺼끌꺼끌한 것이 멋이기도 하다. 어떤 원칙이나 기본적인 유형에서 일탈된 파격적인 것이 멋이기도 하다.
멋은 작위적인 것이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것이 제격이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것 같은 제 멋도 있다. 한 마디로 멋은 매력이고, 사람을 끄는 힘이다. (중략) 멋은 여유를 필요로 한다. (중략) 여성이 자기 일에 열중해 있는 모습에서 멋을 발견할 수 있다. (중략) 내적인 멋과 외적인 멋이 조화를 이룰 때 안으로부터 우러나는 멋은 사람을 지루하지 않게 하고, 살아갈수록 서로를 친밀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닌다. (중략) 지나치게 다듬어진 것만을 좋아하는 여자보다는 살아가는 일, 인생살이가 조금은 험한 것이라는 사실를 알고, 뒤척이는 여인이 더더욱 아름답고 멋있다. 「멋있는 여성」 윤재천, 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 하권, 문학관, 2001, pp.85~88.

어떤 여자가, 어느 때, 어떻게 울고 웃는가는, 그녀의 교양의 정도를 나타내는 표적이 된다. “많은 교양을 쌓은 여자들의 웃음 속에는 그 여자의 본성도 나타난다. 그녀의 본성이 녹아 흐르고 남은(즉, 교양이 순화되고 남은) 잔재까지도 나타난다” F.W.니체/M.하이데거 지음, ꡔ신은 죽었다ꡕ, 책향기, 2000. 8, p. 75
고 하이데거는 말했다. 위 작품에서 윤재천이 말하는 여성의 멋은, 다소 유교적인데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기본적인 유형에서 일탈된 파격적인, 현대 여성에게도 있다. 현대와 유교적인 여성의 멋을 선별하여 선택하고 있는 태도에서, 윤재천은 자신과 맞지 않는 것을 반사적으로 내치지 않고 우선 수용해 나가다가 상호간의 장단점을 보완 해 나가려는 생활 방식이 엿보인다. 외양의 치장보다, 내면의 도달을 위해 뒤척이는 여성, 사고하며 순수하게 정열을 불태우면서 사는 여성, 한마디로 열정과 인간미를 지닌 여성이 윤재천이 보는 멋있는 여성이다.

인간이 가장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인간의 모든 고통은 자신의 지나친 과욕에서 비롯된다. 과잉된 욕심 없이 자신을 지탱시키고 받쳐 주는 균형과 조화는 스스로 평화경을 이룰 수 있는 길이다.
명상을 통해 자신에게 부수된 여러 가지 삶의 문제를 직시하고, 바로잡는 일을 우리는 버릇처럼 행해야 한다.
삶에 있어 최선의 방책이 도피는 아니다. 모두 넘어야 할 문제이며, 해결해야 할 일이다.
동적(動的)인 생성 양식보다 내적인 존재 양식에서 오히려 더 큰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생활 속을 떠돌던 시선의 방향을 자기 자신만의 내면 세계로 돌릴 때, 우리는 우리들의 영혼의 목소리를 듣게 되며 모든 일상사의 불만과 금전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너나 없이 외로운 존재임을 긍정할 때, 명상의 훈련을 통해 고독의 깊은 의미와 그에 대한 해답을 얻어 낼 수 있다. 「명상」 윤재천, 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 하권, 앞의 책, p.136.

캔 윌버는 “세계 도처에 있는 체험적 신비가의 가르침에 의해서 冥想․靜觀의 눈으로만 정신이 보여질 수 있고, 관조의 눈(영안)에 의해 위대한 내면 세계가 찬란하게 전개된다” 캔 윌버, 앞의 책, p.289
고 하였다. 또 일본의 대표적인 철학자 三木淸은, “명상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사색의 엄격함이다. 명상에 대한 준비라는 것은, 사색의 방법적 훈련을 갖추는 것이다. 명상은 결코 습관이 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습관이 된 명상은 결코 명상이 아니며 몽상이나 공상이다” 三木淸, ꡔ어느 철학자가 보낸 편지ꡕ, 사회 평론, 1999. 6, p.99
주. 三木淸 : 일본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평론가. 독일유학 시 마르틴 하이데거, 하인리이 리케르트 밑에서 수학함.
고 하였다. 윤재천이 명상을 통해 걸러 내는 것은 삶의 형평성이며, 그것은 평화경을 낳는다. 윤재천에게 있어, 고독의 의미는 삶의 허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명상을 통하여 삶의 오묘한 의미를 추출하는 것이다. 그의 평화경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명상의 세계에 도달할 때에 그 정신과 연결된다. 그에 따르면 불만과 과욕은 물질에서 비롯된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다 같이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긍정 할 때, 고독의 깊은 의미가 추출되며 이것은, 명상을 통하여 이해의 길로 이끌어 준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글에서 말하는 윤재천의 고독은 현실에서 소외되거나 낙오되어 가는 고독이 아니라 마치 ‘고독’의 벗이거나 스승이 된 듯, 명상을 통하여 자신에게 처한 고독의 미적 승화에 의하여 의미를 재창출 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고독이라고 보겠다.

‘젊은 베르테르’는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사랑의 연정을 가눌 수 없어 권총자살에 이르며, ‘제로움’의 사랑은 ‘알리사’를 신의 세계로까지 향하게 하고, ‘카추샤’가 ‘네프류도프’의 인생을 전환시키는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이 쌓은 모든 역사는 그 발전이 더디고 메말랐을 것이다.
사랑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이론도 성립되고,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가 헤어져 괴로워한다는 궤변도 생기리 만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맹목이 되는 순수와 열정은 값진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랑」 윤재천, 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 하권, 앞의 책, p.156.

윤재천은 같은 작품에서 “많이 충돌하고, 많이 아파하며, 무수히 흔들리며 이겨나가는 강인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며 진실한 삶이다” 위의 책, p.160.
고 했으며, “사랑은 삶의 존재 가치에 대한 척도 일 수도 있다. 머리로 계산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위의 책, p.244.
고 했다. 또 같은 글에서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아름다운 삶을 가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전게한 바와 같이 윤재천의 수필을 쓰는 이유가 ‘진지함과 성실함에의 도달’이라고 했다. 이 글에서 나타나는, 애정 문제로 빚어진 갈등, 혼란, 시련, 고뇌를 겪고 성숙해지는 사람은, 그가 추구하는 수필의 세계와 정신이 연결되고 있다. 위 인용문의 끝 구절,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맹목이 되는 순수와 열정은 값진 사랑이라 할 수 있다”는 구절에서 진지함과 성실함이 배어있다. 이로 볼 때 윤재천에게 있어 인생의 출발점과 귀결점도 수필을 쓰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진지함과 성실함’이라 할 수 있다.

아침에 면도를 하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거나, 거리를 지나다 쇼윈도우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에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는 불혹의 나이. 지난 시간들이 우수(憂愁)로 몰려들 때는 어느 구석이라도 찾아 들어가 담배라도 한 모금 피워야겠다는 묘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40대는 절망감에 휩싸여야 할 연륜은 아니다. 공자는 이를 가리켜 불혹지년(不惑之年)이라 했고, 루소는 야심의 시기라고 했다. 미당(未堂)의 「국화 옆에서」는 20대를 그리움과 방황의 시기로 보고, 30대는 좌절과 역경 극복의 시기로 보았으며, 40대에 이르러서 안정과 원숙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안정과 원숙 - 이 관념적인 범주에 지금의 상황을 포갤 때 둘은 일치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40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책임을 지는 나이」 위의 책, pp.243~244.

수필은 인생을 관조하고 자신을 반추하며 참다운 삶의 진면목을 형성해 나가는 문학이다. 성숙은 미숙함보다 인생을 달관하고 자연의 질서를 한 걸음 앞서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40대에 들어선 작가는 지나온 삶의 연원을 되짚어 본다. 성현이나 시인이 설정해 놓은 관념적인 범주에 자신의 상황을 반추하고 있다. 인간은 끓임 없이 자아성찰을 반복하면서 자기를 다독이는 태도로써 삶의 진지함에 도달하는 것이다. 윤재천 수필의 특징은, 일상에서 지나치는 작은 것에 시선을 집중하여, 명상과 사색으로써 의미를 재창출하는 것이다.

촛불을 바라본다.
밤이 깊어가거나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기존의 상념들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털어 버린다.
촛불만을 바라보며 녹아 내리는 촛불과 열렬한 생의 의욕 같은 불꽃만을 바라볼 뿐이다.
이제부터는 자기답게 살고 싶다. 높은 학문이나 모든 사람의 갈채를 위해서 살지 말고 나다운, 나일 수밖에 없는 것에 나를 태우고 싶다. 남과 어둠을 위해서가 아닌, 공연한 허장성세가 아닌, 초로(草露)처럼 비쳤던 나, 언젠가는 옛사람이 되어버릴 나를 위해 이 밤도 나는 촛불이 되고 싶다. 「촛불」 윤재천, 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상권, 앞의 책, p.88.

윤재천의 작품에서 인생관조는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에 더 치중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이제 부터는 자기답게 살고 싶다’ 라는 구절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촛불 앞에서, 인생의 허장성세를 떠난 ‘진지한 삶’의 관조로써 미래를 열고 있다. 이것은 그의 수필 문학이나 삶의 노정에 있어, 고향 같은 것이다. 촛불을 맞이하며 대상을 바라보는 겸허한 자세, 촛불은 내면에 또 하나의 자아를 심어준다. 촛불이 매개가 되어 명상에 잠긴다. 겸허한 촛불이 되고 싶어한다. 인간적인 체취와 삶에 대한 진지하고 경건한 자세 - 이는 곧 그의 내면이다.

이 종로 거리는 까닭 모를 연민을 불러주고 애착이 간다.
퇴근 후, 거리의 수많은 인총에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고, 발등을 밟히기 일쑤다. 짜증스럽기보다는 이 모두가 전생의 억겁인 인연이려니 하고만 느껴진다.
종로는 역사가 많다. 육주비전(六注比廛)의 거리, 보신각 인경이 울던 거리, 어느 거리에 애환이 없고 역사가 없을까마는 종로는 특히 더한 것 같다.
철시가 된 종로를 걸어 보면 온통 비어 비린 도시로 엄습되어 오는 고적감이 있다. 새벽, 상가의 셔터가 올려지기 전, 이른 시간이나 통금이 가까워 차량 소리만 박진하는 늦은 시각이나 설날 종로가 주는 이미지는 사뭇 애틋하다. (중략) 종로가 새 옷 입고 단장을 하는 것은, 혼자된 며느리가 개가하는 것 같아 일견 야속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변화다.
낯익은 건물이 밀려가는 종로는 오랫동안 내게 생소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며칠만 지나면 친숙해지고, 꿈에 보이는 거리로 내게 다시 다가올 것이다. 「종로(鐘路)」 위의 책, pp.134~135.

윤재천론에서 김우종은, “윤재천 수필의 소재는 현대인의 생활주변에서 꽤 광범위하게 얻어지고 그것이 사색의 계기로써 등장한다. (중략)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소재들로 나타나고 있다” 김우종, 「윤재천론」, 윤재천, ꡔ요즈음 사람들ꡕ, 앞의 책, p.19.
고 했다. 이 작품은 소박한 종로의 생활 양식이 육주비전(六注比廛)거리, 보신각의 종소리가 울던 거리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고 혼자 된 며느리가 개가하는 것 같은 고적감을 느끼며 쓴 글이다. 새로운 도회적 분위기로 탈바꿈하는 가정의 술렁임과 생소함을 야속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는 글에서, 질박하고, 원활하며 여유 있는 작가의 품성이 읽혀진다.

책 속에는 광활한 대지가 있다.
아름드리 나무가 있고, 은빛 시냇물이 있으며, 영원히 아프지 않을 사랑이 있다. 식구들이 모두 외출한 후 집을 지키며 책을 보고 있으면 한평생을 이처럼 덩그러니 놓여져 산다고 해도 외롭지 않을 것 같은 가득 채워진 곳에 나 자신도 한 부분이 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나를 만나는 시간에」 윤재천, 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 상권, 앞의 책, p.204.

광활한 대지의 일부분처럼, 드넓은 지식의 일부분이 책을 통하여 취득된다. 실물이 우리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진정한 나를 만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존재로 형상화된다. “딱딱하고 흥미 없어 보이는 책도 바른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정신의 맑고 밝은 빛이 아른거리는 참다운 영혼의 위안처럼 보는 것” 캔 윌버, 앞의 책, p.318.
이라고 캔 윌버는 말했다. 그의 명상과 사색은 책에서 획득되는 새로운 인식의 도달일 수 있다. 그는 책을 통하여 ‘정관의 세계’, ‘명상의 세계’에 인도되어 생의 깊이와 자연의 섭리에 대한 일깨움을 받고 그것을 독자에게 전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둑알을 놓는 기분으로, 물러서서는 안 되는 마음가짐으로 오늘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삶은 간단히 처리될 성격도 아니고, 누구에 의해 대신 영위될 수 도 없다.「바둑을 두듯이」 윤재천, ꡔ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ꡕ상권, 앞의 책, p.250.

삶은 그저 얻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바둑판을 채우듯이 한 점 한 점 채워 가는 것이다. 즉, 우리 삶은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이상, 윤재천의 명상적 사색적 특질을 지닌 수필 중 13편을 추출하여 고찰해 보았다. 여기에서 나타난 주제는 결국, ‘성실하고 진실한 삶으로의 도달’이다. 그는 사적인 주변을,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세계로 환원하기도 하면서 명상과 사색을 통해 획득된 내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한 점 먼지, 햇살, 촛불,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책, 변모한 주위 환경, 꽃, 구름, 사랑 … 을 초점으로 하여 이를 명상과 사색의 경지로 데려가서 새로운 의미를 건져 올리고 있다. 감성에 의하여 빚어진 의미를 그대로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유와 상상력에 의한 미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는 윤재천이 취하는 수필 문학적 수법으로 보이며, 명상과 사색을 통해 획득된 내면적 특성이며 장점이라 여겨진다. “예술은 정신이 그 특유의 顯現에 있어서 각각의 모든 수준에서 그 스스로를 독특하게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정신의 미(the Beauty of Spirit)이다. 예술은 주시자의 눈 속에 있고, 주시자의 나 속에 있다. 예술이란 바로 정신의 나” F.W. 니체 / M.하이데거 지음, 앞의 책, 2000, p.32.
라고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예술인 수필도 정신의 소산이다. 위 분석해 본 13편의 작품 속에 스며든 공통적인 주제는 ‘진지함’이라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소재로써 주제가 한 쪽으로 쏠리고 있음은 작가가 나타내려고 하는 개성적인 메시지가 반영되지만, 위트와 해학이 결여되고, 독자가 신비에 젖거나 재미있어하는 수필은 될 수 없다. 특히 윤재천의 수필은 생활의 구체성이 여과된 추상적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것의 한계가 느껴진다.



윤재천의 수필문학 연구 - 남홍숙(수필가) 석사학위 논문임.

 

이 글은 '에세이코리아'카페에서 퍼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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