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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창작이론

체험의 생략 / 유경환

작성자노정숙|작성시간21.10.20|조회수35 목록 댓글 3

체험의 생략

유경환

 

 

수필은 산문이므로 운문에서처럼 극도의 생략은 요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필에서도 체험의 재생이나 상기(想起)에서 적절한 절제를 요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은 때때로 단지 넉 자의 글자를 놓고도 그 뜻을 40자나 400자로 확대해석하는 능력을 발휘하는데, 수필 읽기에서도 이를 곧잘 원용하고 있다. 수필을 문학작품으로 읽는 사람이라면, 그 내면에 상당한 수준에 이른 동질의 체험이나 유사한 내용의 체험을 이미 지니고 있음직하다.

독자 나름의 상상이나 연상을 위해 여백을 남겨가며 쓸수록, 작품의 매력은 커지고

글은 담백해진다. 이런 여백을 남기지 않는 글-곧 설명이 장황한 글은 읽어도 정서의 갈증을 계속 느끼게 한다. 독자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체험을 이끌어내지 못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만다.

글을 쓰는 사람은 흔히 자기 체험을 완벽하게 전달하려고 애쓴다. 완벽한 전달을 위해 생략할 것을 생략하지 못하고 구차스레 놔둔다. 또한 필요 이상의 형용사 부사를 구사한다. 이런 경우 독자는 형용사 부사에 끌려다니게 되므로 줄거리를 놓치거나 주제에서 이탈하여 작품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기 쉽다. 형용사 부사는 글의 초점을 흐리게 하거나 혼미로 유도하므로, 생략되어야 할 우선 대상이다.

체험 내용과 필자의 인격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수필에서는, 체험의 수준과 인격의 준거가 되는 것이 별 수 없이 문장 그 자체이다. 동원하는 단어와 단어들의 조합이며, 구사하는 단어와 단어들의 배열이 바로 문장일 수밖에 없다. 글을 쓴 사람의 정서가 고스란히 글에 전이되는 것은, 단어들이 정서논리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서툰 사진사는 피사체의 전경(全景)을 빠짐없이 담아내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전문가인 사진작가는 강조하고픈 대상에 초점을 맞춰서 사진을 찍는다. 그 외 피사체는 흐린 영상으로 담아낸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담아내지 않고, 선별적으로 초점을 맞춰서 찍어내는 영상의 아름다움. 이런 생략과 초점두기-곧, 집중 조명의 기법은 수필 쓰기에서도 그대로 필수 요건이다. 수필에서의 생략도 이와 똑같다. 선택도 역량의 문제이고, 생략도 역량의 문제이다.

생각이 미처 덜 여문 사람은 자신의 성숙도나 사유의 깊이를 재는 일은 미뤄놓고 미문을 쓰려는 욕심으로 미사여구를 빌어다 쓰거나, 화려한 문체를 위해 수사력을 발휘하려고 고집하거나, 또는 외국어 문체처럼 써서 신선한 충격을 기대하는 음모를 깔아놓기 일쑤다.

수필에서는 글이 곧 그 사람이므로, 그런 수사나 시도가 오히려 그 사람을 천박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말은 진실을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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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산옥 | 작성시간 21.12.03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글이네요.
    좋은 글 올려주신 선배님 덕분에 돈 한 푼 안 들이고 너무 많이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용선 | 작성시간 23.02.24 설명이나 미사여구는 언제나 수필을 녹슬게 하지요 . 간단하며 담백하게~
    늘어지지 말도록 말이예요;
  • 작성자모리조 | 작성시간 23.08.20 글쓰기의 핵심을 가슴에 새깁니다.
    군더더기를 걷어낸 글을 위하여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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