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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창작이론

글쓰기의 어려움 / 오민석

작성자노정숙|작성시간21.09.23|조회수33 목록 댓글 5

글쓰기의 어려움

오민석

 

   모리스 블랑쇼의 말대로라면 글쓰기란 언어를 매혹’ 아래 두는 것이다언어가 매혹의 주술을 잃을 때 권태가 몰려온다껍데기들의 연속체반복낭비된 시간거짓말가식의 웃음 혹은 눈물글쓰기는 이런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는 것이다좋은 글은 함부로 소진되지 않는다그것은 퍼내도 자꾸 고이는 샘물처럼읽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드러낸다휴지처럼 버려질 운명모래 무덤의 문턱에 글자들이 다가갈 때글쓰기는 중단된다글쓰기는 정신의 소비이다계속 글을 써도 영혼의 잔고가 많이 남아 있으려면쓰는 만큼 혹은 그 이상 영혼의 금고에 많은 것을 쌓아놓아야 한다그래서 비단 글을 쓸 때만이 아니라즉 매혹의 글을 읽을 때 그는 이미 매혹의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그러니 글쓰기의 소리를 잘 계측해야 한다영혼의 이자가 채 붙기도 전에 (글쓰기의소비를 할 때정신은 위기를 겪는다그때남아 있는 영혼의 잔고는 그것이 채 없어지기도 전에 매혹의 색채를 잃는다.

   글쓰기의 매혹은 두 가지 방향으로 온다하나는 글쓰기가 진실을 건드릴 때이다개 같은 고통을 감수하며 글이 배리背理의 세계를 건드릴 때글은 만 가지 뿌리줄기 (리좀)을 가지며 그것을 읽는 정신의 세계로 스며들어간다글은 이렇게 혼란의 이름으로 영혼을 깨운다왜냐하면 세계는 그 자체 배리이며 모순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외날을 가진 글은 먼 구석기의 그림에 불과하다글은 만 개의 날을 가지고 만 개의 세계를 쑤신다글이 세계를 찌를 때세계는 만화경처럼 색깔을 바꾸며 자신을 드러낸다그것은 혼란이며 화려한 폭발이고대답 없는 진실이며대답을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 두 세계의 만남이다보라단수성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대로 모든 견고한 것들은 공중에 산산이 녹아내린다.” 견고한 것들단순한 것들뻔한 것들권태로운 것들은 모두 거짓이다글쓰기는 단순성이 만들어내는 거짓과 권태와 싸운다.

   매혹의 글쓰기는 두 번째 길을 가지고 있다글쓰기는 모든 사물에 오래도록 붙여진 이름들을 조롱한다세계는 낡아빠진녹이 슨먼지가 가득한혹은 빤질빤질한 관습으로 가득 차 있다글쓰기는 썩은 간판들지겹도록 봐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름들을 지우고바꾸고갈아치운다견딜 수 없는 권태란 없다모든 권태는 파괴되기 위해 존재하며글쓰기는 먼 아담의 시대에 신이 하사한 주권으로 권태의 집을 때려 부순다매혹의 글은 이 파괴의 먼지와 소음과 혼란과 번개의 빛으로 소란하다모든 이름은 그 자체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는오직 낡은 집의 완고한 소유자들뿐이다글쓰기의 외로운 전사들은 수많은 이름들의 창고 안에서 파괴를 꿈꾼다. ‘모든 견고한 것들은 낡은 이름의 소유자들이며그것들은 오로지 혐오와 파괴에 의해서만 공중에 산산이 녹아내린다.” 보라우리는 이름을 바꿔 친 빛나는 텍스트들의 집을 본다그것의 광채는 매혹 그 자체이며세계의 재구성이다.

   그러므로 배리의 심장을 건드리지 않을 때그리고 낡은 이름들을 파괴하지 않을 때글쓰기는 중단된다매혹을 잃은 게임은 무료함의 공수표들이다그것들은 아무리 쌓여봐야 영혼의 금고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개나 소나아무나 가져다 써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종잇조각들을 우리는 책이라 부르지 않는다그것들은 좀 먹은 영혼이며읽는 이들을 좀 먹게 하는 정신이다글쓰기는 책방에 넘치도록 쌓여 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존만한 정신들을 혐오한다누가 글을 쓰는가매혹의 개 같은 고통을 견디는 자들이 글을 쓴다블랑쇼의 책 제목대로 글쓰기는 오로지 도래할 책을 쓴다저기 책이 오고 있다옛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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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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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권현옥 | 작성시간 21.10.06 견고하고 단순하고 뻔하고 권태로운 것은 가짜다 라는 말이 쑤욱 들어옵니다.
    고통을 견디는 자가 글을 쓴다는 것도요.
    또 고통을 견뎌야겠지요. 잘 써질 때까지...낑낑
  • 답댓글 작성자노정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06 낑낑~ ~ 너무 힘주지 마세요. 지금 잘 쓰고 있습니다. '매혹'에 가깝게요. ^^
  • 작성자유정림 | 작성시간 21.10.26 글 감사합니다.
    영혼의 이자를 쌓고 개 같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글쓰기. 선배님들은 그 일을 참 잘도 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것들과는 거리가 먼 '수도의 길', 그 짧은 순간의 매혹을 위해.
  • 답댓글 작성자노정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0.26 짧은 순간의 매혹으로 끝나지 않고
    '퍼내도 자꾸 고이는 샘물처럼,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드러낸다' 니 대단하지요.
  • 작성자용선 | 작성시간 23.02.25 글 쓰는사람은 쓰는만큼 영혼의 금고에 많이 쌓아놓아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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