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박향희

버킷리스트

작성자박항|작성시간26.06.17|조회수14 목록 댓글 0

“이렇게 죽을 수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지…”
청룡 영화제 축하 무대 위, 한 젊은 가수가 화려한 조명과 환호 속에서 샴페인 잔을 높이 들고 절규하듯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러고는 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졌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한 파격적인 퍼포먼스였다. 우리 모두에게 죽기 전에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듯했다. 며칠 동안 나는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지’를 흥얼거리며 다녔고, 무대의 잔상은 내게도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인가요?”

가보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예전에 보았던 영화가 떠올랐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 남자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진짜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그들은 스카이다이빙이나 피라미드 여행 같은 화려한 모험을 즐기지만, 결국 마주한 본질적인 질문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였다. 진정으로 값진 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바쁘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가족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하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멀어졌던 가족을 찾아가 손을 잡으며 인생의 리스트를 마무리하는 장면은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나는 방문교사 일을 한다. 얼마 전 보강 수업을 마치고 한 학생과 점심을 먹었다. 온몸으로 사춘기를 뿜어내는 중2 남학생이라 말 한마디 건네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아이는 식탁에 수저를 정갈하게 놓아주고, 컵에 물을 따라주며 부족한 반찬까지 챙겨주었다. 교재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아이의 다정하고 깊은 속내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평소 같으면 잔소리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을 텐데, 이날은 내 이야기를 고개 끄덕이며 귀담아들어 주었다. 내 말이 아이의 마음에 작은 씨앗처럼 심어지는 듯해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저 밥 한 끼 같이 나누었을 뿐인데, 식당을 나오면서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된 듯했다.


그동안 “식사 한번 하자”는 지인들의 말은 내게 종종 부담으로 다가왔다. 인사치레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고, 밥을 얻어먹으면 곧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제자와의 식사에서 ‘입이 열리면 마음도 열린다’라는 말 경험하고 난 뒤, 둘이 밥을 같이 먹는다는 의미가 나에게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신호들을 ‘부담’이라는 잣대로 재단하며 놓쳐왔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도 ‘형편이 여의치 않다’라는 핑계와 ‘다들 나보다 여유 있는데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라는 생각으로 외면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이제라도 고마운 인연들에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것을 나의 버킷리스트로 삼아야겠다. 거창한 밥상이 아니어도 좋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서로 마주 앉아 조촐한 밥상을 나누는 일. 그것은 밥상(床)나눔 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따뜻한 마음의 상(賞)도 될  것이다. 고단한 삶을 묵묵히 살아낸 지인들에게 마음을 담아 대접하는 밥상은, 내 남은 삶을 가장 풍성하게 채워줄 최고의 버킷리스트 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