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잔에 비가 내리고, 오베르쉬르우아즈
이영옥
고흐마을, 프랑스 파리 외곽 오베르쉬르우아즈에 비가 내린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 그의 체취를 찾아서 온 길이다. 작은 기차역, 아담한 시청, 조그만 빵집이 있는 고즈넉한 거리에 서서 맑은 공기를 만끽한다. 북적이던 파리의 화려함보다 이방인에게도 눈인사가 친절한 이 마을이 벌써부터 편안해진다. 반 고흐도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머문 이곳에서 80여 점의 그림을 그렸으니 말이다.
노란 우비에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방울이 음악소리처럼 들린다. 문득 떠오르는 돈 맥클린의 「Vincent」에 음을 맞추며, 남편과 나란히 안내소로 향했다.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ay,,,,,,.”
구름 낀 하늘이 노래 가사 그대로 ‘blue and gray’ 다.
관광안내소에서 마을지도를 받았다. 한글판이 반가운 지도를 펼쳐들고 라부 여인숙으로 향했다. 반 고흐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기거했던 곳이다. 여인숙은 시청 앞 도로변 라부 카페 뒤편에 있다고 한다. 두리번거리며 카페 앞을 지나다가 한 순간 숨이 멎었다. 문 옆의 갈색 철제 테이블에 와인 병과 두 개의 유리잔이 놓인 것이다. 고흐를 기리는 마을 사람들이 날마다 채워 놓는 잔이란다. 나머지 하나는 누구를 위한 잔일까. 테오일까, 고갱일까.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잔에 담긴 붉은 와인에 비가 내린다. 압생트를 즐기던 그였지만, 이 빗속에서라면 와인도 좋아할 것 같다.
카페 뒤편 라부 여인숙, 고흐의 방에 들어섰다. 작은 창문이 하나뿐인 좁고 어두운 텅 빈 다락방에, 나무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벽에는 고흐가 쓰던 것으로 보이는 낡은 액자가 뒤집혀 걸려 있다. 왜일까?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서자, 그곳엔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필사본이 붙어 있다.
“언젠가 나도 카페에서 내 전시회를 가지리라 믿는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소망이 생전에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읽고 또 읽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문득 나무 바닥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눈을 떠보니 순간, 테오부부가 백일이 막 지난 아기 빈센트를 안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두 팔을 벌린 고흐가 함박웃음으로 그들을 반긴다. 내 눈에 따스한 눈물이 고인다. 고흐의 방은 이렇듯 기쁨으로 넘쳤던 그들의 마지막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아쉽지만 이곳은 촬영 금지 구역이다. 고흐의 숨결을 가슴에 깊이 담고 여인숙을 나섰다.
고흐와 테오가 잠들어 있는 묘를 찾아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언덕길 끝에서, 고흐 작품에서 보았던 오베르의 계단을 만났다. 차오르는 감동을 안고, 나도 마을 아낙이 되어 계단을 올랐다. 오베르 교회는 화면 밖에서도, 사각형 시계탑과 주황색 지붕이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교회 앞 잔디밭에 그림에서처럼 두 갈래 길이 나있다. 마을 쪽과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다. 뒷산 길로 접어들자, 눈앞에 오베르의 들판이 펼쳐졌다. 130여 년 전, 고흐가 이곳에 도착한 때는 5월 말이었다. 그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는 초여름의 들판이 싱그럽게 넘실거렸다.
“언덕까지 밀밭이 있는 광활한 평야, 바다처럼 끝이 없고 섬세한 노란색, 부드러운 초록색,,,,,,.”
하지만 지금은 추수를 끝낸 9월, 건초더미에 덮인 언덕은 누런색이다. 까마귀 앉은 황량한 밀밭에 쓸쓸히 젖어들던 순간이다. 언덕을 둘러싼 초록빛 가을 작물이 가랑비 속에 보드라운 윤기를 발하며, 눈길을 붙잡는다. 신비할 만큼 조화로운 경관이다. 고흐가 이 경이로운 풍경을 보았다면 그의 화폭에는 또 어떤 그림이 담겼을까. 안타깝게도 고흐는 7월의 끝자락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흙길을 밟으며 올라가자 무덤 입구가 보였다. 발걸음을 재촉하려다 문득 멈춰 섰다. 밭길 공터에 세워진 철제 판에 <까마귀 나는 밀밭> 모사품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고흐가 이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 속 7월의 밀밭은 황금빛으로 물결치고 있다.
밭길을 가로질러 아치형 철제문이 달린 무덤 입구로 들어섰다. 수십 기의 석묘가 나란히 늘어서 있지만, 고흐와 테오의 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노란 해바라기가 심어진 곳에 많은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그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살며시 다가가자, 누구라 할 것 없이 물러서며 공간을 내주었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마주치는 눈빛에서 이심전심의 온기를 느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꿈꿨던 화가와 그런 형을 정성껏 뒷바라지했던 테오를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고흐와 테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살피다가 헤어질 때였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내게, 은발의 머리카락이 빛나는 어르신이 내 어깨를 안아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인사에 깜짝 놀랐지만 웬일인지 낯설지 않았다. 나도 두 팔로 그를 안았다. 푸근했다. 선물 같은 행복을 안고 돌아다보니, 고흐가 환하게 웃고 있다.
비 갠 언덕을 내려오는데, 맛있는 냄새가 마을에 차고 넘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비큐 치킨 냄새다. 마을 입구 공원에서 이젤을 맨 고흐 동상이 발길을 잡았지만, 나중을 약속하고 허둥지둥 지나치고 말았다. 점점 진해지는 냄새를 따라 가니, 라부 여인숙 옆 작은 광장에 장이 섰다. 일요일이면 열린다는 7일장이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철통 속, 쇠창살에 나란히 꿰인 닭들이 돌아가고 있다. 내가 손가락까지 세우며 두 마리! 하자 남편이 당황하며 말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이 먹어도 남을 정도로 커다란 바비큐다. 곁들일 사과와 납작 복숭아를 사, 장터 한 쪽에 설치된 가설 수도에서 씻었다. 바비큐를 품에 안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그 기막힌 맛에 욕심껏 먹었지만, 남편의 예측대로 남았다. 숙소에 돌아가 마저 먹으려고 가방에 넣다가 깨닫는다. 여행의 백미는 먹거리라는 것을. 그리고 다짐한다. 오베르쉬르우아즈를 재방문할 때는, 꼭 일요일에 오리라. 내 다짐을 들은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내비게이션에 파리 숙소를 입력한다.
오베르쉬르우아즈.
아직 바비큐 냄새가 거리를 메운 소박한 마을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손을 흔든다. 공원에 선 고흐가 이젤을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흐와 테오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