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윤희
yuni7412@naver.com
충북 충주 출생
평생학습관 수필 쓰기 강좌 참여
[수상 소감]
피윤희
에세이스트 등단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쁘다는 마음보다 먼저 조금 조용해졌습니다. 오래 마음속에만 두고 있던 이야기 하나가, 생각보다 먼 곳까지 닿았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한동안은 그 사실을 바로 꺼내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붙잡고만 있었습니다.
저는 글을 쓸 때마다, 쉽게 꺼내지 못한 마음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말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감정들, 설명되지 않은 채 지나가 버린 시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꾸만 맴도는 생각들. 그것들이 흩어지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했습니다. 글은 저에게 그런 자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안산시 평생학습관 수필 교실에 참여하면서부터였습니다. 함께한 문우들 그리고 지도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글을 어떻게 잘 쓸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겨 두고 무엇을 끝내 다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 질문이 제 글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습니다. 서둘러 설명하기보다, 머무르게 하는 문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그때 처음 또렷해졌습니다.
살아가면서 모든 마음을 다 드러내며 살 수는 없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보다, 조용히 남아 있는 쪽이 더 나은 순간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은 어딘가에 기대어 남게 됩니다. 저는 그 자리를 글 안에서 조심스럽게 마련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글을 쓰는 동안에도, 무엇을 더 잘 말할 수 있을지보다 무엇을 남겨 두어야 할지를 더 오래 고민했습니다. 다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 적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를 만드는 일에 가까웠습니다. 그 여백까지 함께 읽어주시고 의미를 건네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제 글을 읽어 주었던 몇몇 사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말을 건네지 않아도, 그저 읽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이어지는 그런 마음들이, 제가 계속 쓰게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마음들을 서둘러 밖으로 끌어내기보다, 그 곁에 오래 머무는 쪽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분명하게 설명하는 문장보다, 오래 남아 있다가 다시 떠오르는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잘 쓰는 것보다,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하게 됩니다.
이 상을 계기로 갑자기 달라지기보다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조용히 써 나가겠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마음들이 머물 수 있는 작은 자리를 지키면서, 그 안에서 제 몫의 문장을 찾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등단작]
구멍 하나만큼의 마음
피윤희
어떤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믿는다. 집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다.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도, 일상도 잠시 내려놓은 채 이야기 하나에만 몸을 맡기는 그 시간이 필요해서다. 마음이 여기저기로 새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힘이 극장에는 있다.
화양연화를 다시 극장에서 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집에서도 OTT로 볼 수 있었지만, 이번 재개봉은 특별판으로 극장에서만 상영된다는 말이 나를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였고, 몇 차례 본 영화이기도 했지만, 나는 다시 그 시간을 통과해 보고 싶었다. 알고 있음에도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는 것은, 그 영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요일 오전, 극장 안은 유난히 조용했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러 온 것은 아니었고, 소수의 관객만이 넓은 좌석을 나눠 쓰고 있었다. 관객들의 숨소리마저 낮아진 공간에서, 화면 속 인물들은 여전히 말을 아꼈다. 감정은 끝내 고백되지 않은 채 장면과 장면 사이에 머물렀다. 화양연화는 늘 그런 영화였다. 사랑을 말하지 않는 대신, 말하지 못한 마음의 무게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질문을 남긴다. 젊은 날의 사랑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유독 한 장면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남자 주인공이 친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옛날 사람들은 비밀을 나무에 새겼다고 했다. 나무에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의 구멍을 뚫고, 그곳에 입을 대어 비밀을 속삭인 뒤, 다시 흙으로 막아 두었다고. 그렇게 하면 비밀이 세상으로 퍼지지 않는다고 했다. 담담한 어조의 설명이었지만, 그 말에는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오래된 방식이 들어 있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키는 비밀이 아니라, 말한 뒤에야 비로소 묻을 수 있는 비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 들려주지 않아도, 세상에 흘리지 않아도, 말해졌다는 사실만으로 비밀은 한 번 숨을 쉰다.
영화 속에서 그는 실제로 그 일을 한다. 다만 나무가 아니라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이었다. 벽에 난 작은 구멍에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고, 다시 그 틈을 메운다. 이제 그 비밀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 자리에, 그 깊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직 자신과 벽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비밀이란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아무 데나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사람은 가끔 벽이 필요해진다.
극장을 나서면서도 그 말이 계속 따라왔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구멍이 있다면, 나는 어떤 말을 그 안에 넣고 싶을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 혹은 이미 여러 번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 무게를 잃지 않는 말들. 비밀은 대개 말하지 못해서 쌓이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해결되지 않아서 남는다. 그래서 더 쉽게 썩지 않고, 오래 마음속에 머문다. 꺼내 놓을수록 옅어지는 말이 있는가 하면, 꺼낼수록 더 선명해지는 말도 있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에 닿았다. 나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영화 제목처럼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 가장 찬란했던 순간은 과연 언제였는지. 흔히들 청춘을 떠올리지만, 나는 선뜻 그 시기를 가리킬 수 없었다. 눈부셨다고 말할 만한 장면도, 분명히 이때였다고 단정할 수 있는 시간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있었을 그 시간이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혹은 기억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현재를 통과하는 데 바빴다.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할 틈도 없이 다음 일을 향해 몸을 밀어 넣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시간이 화양연화일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날들은 그저 견뎌낸 하루로 남았고, 어떤 순간들은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 아마도 화양연화란, 그 한가운데 있을 때는 알아차릴 수 없고,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조심스럽게 이름 붙일 수 있는 시절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빛이 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
영화 속 인물들처럼, 나 역시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안고 살아왔다. 그 이야기들은 나무도, 벽도 없이 마음속을 떠돌았다. 어디에도 새기지 못한 채, 나 자신에게만 반복해서 들려주던 말들. 그래서인지 그 장면이 유난히 깊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상상, 그리고 그 말을 안전하게 묻어둘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보다 큰 위로였다. 모든 마음이 이해받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 또한.
극장 밖의 공기는 차분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흩어졌다. 나는 걸음을 조금 늦추며, 지금 이 시간이 언젠가의 화양연화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하루, 조용히 지나가는 이 밤이 훗날 돌아보았을 때 가장 좋았던 시절로 남을 가능성에 대해서. 비밀처럼 묻어 두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순간들에 대해서.
아마도 나의 화양연화는 아직 오지 않았거나, 이미 지나갔거나, 혹은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것을 서둘러 규정하려 애쓰기보다 조금 더 천천히 살아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을 억지로 꺼내지 않아도 되는 속도, 비밀을 품은 채로도 숨 쉴 수 있는 시간. 영화 속 벽에 난 작은 구멍처럼, 나에게도 그런 틈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수 이상은의 ‘언젠가는’이 계속 입속에서 맴돌았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는 그 문장이 오늘따라 유난히 또렷했다. 어쩌면 우리는 늘 화양연화의 한가운데를 지나면서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채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은 다만, 지나가는 이 시간을 너무 쉽게 흘려보내지 않으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본다.
[심사평]
피윤희의 ‘구멍 하나만큼의 마음’을 읽으며 매우 놀랐다. 하나는 논리적일 정도로 정리(정돈)된 문장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스러울 정도로 가지런한 사유의 전개다. 기성 작가에 못지않은 어떤 면에서는 기성 작가들이 오히려 배워야 할 정도로 담백한 글쓰기(사유 전개)는 유려하고 날렵하다. 응모작 세 편이 다 그러했다. 가끔 글의 연결에서 작은 흠집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나는 심사평을 다른 선생님에게 써 달라고 도움을 청했을 것이다. 그 작은 구멍이 그가 신인이라는 증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시치미 떼게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 혹은 이미 여러 번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 무게를 잃지 않는 말들. 비밀은 대개 말하지 못해서 쌓이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해결되지 않아서 남는다. 그래서 더 쉽게 썩지 않고, 오래 마음속에 머문다. 꺼내 놓을수록 옅어지는 말이 있는가 하면, 꺼낼수록 더 선명해지는 말도 있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에 닿았다. 나의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영화 제목처럼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 가장 찬란했던 순간은 과연 언제였는지. 흔히들 청춘을 떠올리지만, 나는 선뜻 그 시기를 가리킬 수 없었다. 눈부셨다고 말할 만한 장면도, 분명히 이때였다고 단정할 수 있는 시간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있었을 그 시간이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혹은 기억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에 닿았다.’라는 앞 문단과 연결시킨 문장은 작가가 가진 모든 것을 모두 보여주고 싶어 하는, 설명해 주고 싶어 하는 의욕이 앙금처럼 남은 모습일 것이다. 신인이 가진 작은 구멍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없었으면 좋았을 이 문장이 아니었다면 심사평을 쓸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가지런한 사유 전개에 불쑥 튀어나온 작가가 가진 서툰 조바심이 오히려 내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잘 정리된 문장에서 오지 않던 진정성이라거나 정직성이 오히려 서툰 조바심에서 다가온 셈이다.
문학이 요구하는 욕망은 호흡이 흐트러진 지점, 소진되어버린 지점에서 발화하는 작가의 감정을 원한다. 그 지점이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글과 동행시킨다. 말하자면 작가와 언행과 사유의 일체화가 감정을 움직인다는 증표 같은 것이다. 더군다나 수필은 매우 엄혹하다. 문학이라는 참으로 다양하고 다의적인 글쓰기에 무어라 토를 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창작은 다른 사람의 언어에 저항하는 짓이다. 문학에서 올바로 쓰고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앞사람들의 말과 글을 말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벗어난 자신만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글쓰기에서 문학만이 범할 수 있고 범해야 하는 반란이다. 봄날의 모습을 자신만이 발견한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것, 어느 봄날 나무뿌리와 돌 틈 사이에 날개 달린 수개미가 수도 없이 몰려 나와 날 준비를 하는, 여왕개미를 향한 마지막 비행을 기다리고 있는 정오의 햇살을 봄으로 헤집어 보는 일 같은 것이다.
나는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고 배우나 줄거리도 모른다. 그 영화의 제작년도나 제작 당시의 시대 분위기 혹은 감독이 지향하는 그 무엇도 알지 못한다. 대다수 영화나 음악, 미술을 바탕 삼은 글들은 짧게나마 거론하는 배경을 작가는 전혀 하지 않고 생략했다. 그런 글쓰기는 작품에 웬만큼 정통하거나 깊은 인문적 사유 체계를 갖추지 않으면, 바탕 삼지 않으면 하기 어렵다. 거두절미 자신의 사유로 글을 열어가는 것은 어지간하지 않으면 흉내조차 쉽지 않다. 피윤희는 충분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문장을 연다. 그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고 그의 사유 바탕이 어떻게 자라왔는가 저절로 궁금해질 정도로 자연스럽다.
언어는 인간이 가진 감정의 미로와 같다. 우리는 ‘사랑한다’라는 말에는 사랑뿐만이 아니고 미량의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원망이 함께하는 줄 안다. 그처럼 내가 말한 자연스럽다는 말에는 좋다는 긍정의 의미와 잘 정리된 답안지 같다는 부정적인 느낌도 없지 않다. 그의 글은 매우 자연스럽고 온유하고 고상하다. 한 가지 당부한다면 자연스럽되 치밀하고, 온유하되 인정물태가 생동하고, 고상하되 자신만의 목소리로 예민해지는 것을 기대한다. (2026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