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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화대혁명 1

작성자가을달|작성시간24.03.29|조회수28 목록 댓글 0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603

ㅡ 중국문화대혁명 1 ㅡ
(중국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에 들어가기 전 중국현대사를 간략히 살펴 보자.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모택동)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루어진 국공내전, 이른바 제3차 혁명내전 에서 승리하고 국민당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낸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베이징 톈안먼 광장 단상에서 운집한 많은 인민들을 향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알렸다. 

지금 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중국인 대상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1위는 항상 마오쩌둥이 차지하고 있다. 아마 지금이 공산당 치하라 더 그러리라 본다. 어쨌든 마오쩌둥은 우리 기억 속에 가장 깊이 남아있는 삼국지의 조조 유비 관우처럼 중국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마오쩌둥으로 부터 두 번이나 실각을 당한 바 있었던 '덩샤오핑(등소평)'은 '마오쩌둥'을 '공칠과삼'을 가진 인물이라 평했다.

덩샤오핑이 '과삼'으로 꼽은 것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다.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친위쿠데타 형식으로 발생했다.

그럼 '대약진운동'이 무엇인지 부터 살펴 보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은 처음에는 공산당 종주국인 소련식 모델을 중국에 적용했다. 사실, 대약진운동 배경에는 스탈린 생전에는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두려워하며 소련을 경쟁상대가 아니라 공산당 종주국으로 생각하며 소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며 소련 따라하기에 힘 썼다.

그러나 마오쩌퉁은 스탈린이 죽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흐루시쇼프'가 나약한 지도자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스탈린 때와는 달리 소련과 공산주의 영도권을 놔두고 경쟁에 들어 간다.

1958년 시작되어 곧 전국적으로 확대된 대약진운동 그 시작은 소련 서기장 '흐루시쇼프'가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일대에 대규모 농지를 조성하며 "미국의 경제력을 능가하겠다."고 도발하자, 마오쩌둥이 이에 경쟁심을 느끼며 소련과 마찬가지로 농공업 대증산 계획정책을 내놓으면서 자기는
영국을 능가하겠다 맞불 놓으며 시작됐다.

<七年超英 十五年赶美>
칠년초영 십오년간미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는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혁명과 대약진운동을 최초로 '농촌이 주체가 된'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혁명주체는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촌농민들이며, 산업혁명을 비롯한 여태까지 혁명은 모두 도시에서 주도했으니, 이번엔 농촌에서 혁명을 해보자"는 게 마오쩌둥 대약진운동 핵심이었다.

그리고 중국인민들에게 신같은 마오쩌둥 말 한 마디 한 마디 마다 삽질이 시작된다.

마오쩌둥은도시에서만 제철소와 자동차 공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 농민들이 '토법고로' (전통적인 기술로 만든 작은 용광로)에서 농민들이 철을 만들고 농촌에서 트랙터를 조립해 '우리식' 혁명을 해보자고 말한다.

이에 농촌 각 집 뒤뜰에 토법고로를 지어서 각 지역마다 철 증산 경쟁이 벌어졌고, 지방에서는 허위보고와 임시변통, 예를 들면 멀쩡한 물건을 녹여 고철로 만든, 엉터리 생산량을 중앙에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토법고로에 쓸 연료를 구한답시고, 주변 삼림을 모두 벌목해 버려 삼림이 황폐화 되어 홍수등 자연재해를 일으켜 대기근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당시 중국농민은 강철생산 기술은 커녕 열처리나 단조가 뭔지조차도 몰랐다.

정작 만든 건 기술부족으로 인한 조악한 품질 똥철이었다. 덕분에 농기구들은 모두 잡철이 되었고, 이는 다시 농업생산량을 반감시켰다.

당연히 이런 똥철은 철강 등 유용한 재료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제대로 사용하려면 다시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에 연료비와 시설 투자가 더 필요하게 되었고 이렇게 해도 애초부터 대형 제철소를 통해 제대로 된 철강을 생산한 것보다 품질이 떨어지게 되었다.

철 제조기술은 보기보다는 첨단 기술이어서 잘 배운 전문 대학 졸업생을 데려와도 이론과 현실 벽 앞에서 애로사항이 넘쳐날텐데, 농민들에게 다짜고짜 강철을 만들라 시켰으니 당연히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대약진운동 기간에 '제사해운동'도 벌어졌다.

'제사해운동'이란 '사해'를 참새, 쥐, 모기, 파리를 뜻하고 전반적인 위생개선운동을 일컷는다.

"참새는 해로운 새[害鳥]다."

마오쩌둥은 농촌 현지지도 중 지나가던 참새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참새는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은 아니었지만 마오쩌둥 말 한마디에 중국에서 참새잡기대운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농촌에서 참새를 보기 힘들 정도로 참새 씨가 말라 버렸다. 참새가 사라지자 병충해가 기승을 부렸다. 그러자 또 농약을 강하게 쓰면서 토질은 악화되고 농촌환경도 핍폐화 되어 간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기간에 농민을 대규모 '농촌인민공사'로 조직화하여 중국이 직면한 공업과 농업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농촌인구 이동을 법적으로 금했고, 자택에 재산을 쌓아두거나 음식을 저장하는 것은 반동분자의 행위로 몰아 강력하게 처벌했다. 기존 식당과 객잔은 물론이고 사원, 도관 같은 곳도 모두 폐쇄시켜버린 다음 공용급식소로 개편했고, 일반 가정집들도 공산당원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곡식과 소금, 조미료, 솥과 그릇, 심지어 수저까지 모두 수거해갔다. 모든 인민들은 일체의 개인 취사를 금지당했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엄한 벌을 받았다. 식사는 오직 공용급식소에서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한 이유는 "농민이든 공장에 다니는 공민이든 간에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과, "개인취사를 하면 잉여식량을 비축하게 되고, 이는 곧 계급이 된다"고 보는 공산주의 원칙 이 명분이었다.

농촌인민공사 조직하에서 농업생산 및 정치적 문제에 관한 결정은 지방자치로 처리되었다.

이 당시는 전문기술보다 이념적 순수성이 강조되었다.

농민들은 '생산대'로 편제되었고, 공동취사를 실시하여 가사노동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켜 생산활동에 동원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적 생산체제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외에도 대약진운동 기간에 벌어진 마오쩌둥 한 마디에 벌어진 삽질은 많다.

마오쩌둥의 즉물적인 말 한마디에 인간은 물론 죄없는 참새 또는 자연까지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대약진운동 결과는 인간이 만든 인재로 인한 자연재해까지 겹쳐 기근이 겉잡을 수 없이 번졌다.

대약진운동 기간 중국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해 3천만~5천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는 일제가 작정하고 중국인을 죽인 난징 대학살과 최소 30배 이상 차이가 나는 수치이다.

자연순리를 인간 힘으로 거역한 댓가치곤 너무 컸다.

대약진운동은 지도자 잘못된 정책과 무능함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어떻게 보면 대약진운동이
"할수있다"라는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새마을운동은 박정희의 가장 큰 치적의 하나일 정도로 성공한 케이스라 다행이다.

1960년 경제가 악화됨에 따라 대약진운동을 철회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도 그제서야 현실을 깨닫고 해외로부터 식량을 수입해서 긴급구제에 나서는 한편 할당생산량 현실화 및 텃밭 허용, 대약진운동을 반대한 인물 재기용, 사유지와 농기구가 농민들에게 되돌려지고, 농촌인민공사 조직도 폐지했다.

그러나 이미 농민 수천만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대약진운동은 중국문화대혁명과 함께 중국 전체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수준을 20년 이상 퇴보시킨 대실책으로 평가 받는다.

때문에 중국에서 사회비판적인 요소가 들어간 영화와 소설을 만들 때 문화대혁명과 함께 대약진운동도 단골로 쓰이는 소재이기도 하다.

사실 중국은 유명할 정도로 문화의 검열이 심각해서 사회 비판작품을 만들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그나마 공산당도 인정한 실책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현재사회를 비판하는 방법밖에 없어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자주 써 먹는 주된 이유이다.

이러한 대약진운동의 대실패는 중국공산당 당내 분열을 초래했다.

당내외 반대파벌은 대약진 실패 원인을 정책추진과정에서 지나치게 열광적이었던 당간부들에게 돌리고 그들을 비난했다. 반면 당권파는 대약진 실패로 미루어볼 때 중국 경제발전에는 더 많은 전문기술과 물질적인 자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뚱이 1966년초에 시작한 문화대혁명은 이들 당권파와 대립의 소산이었다.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은 일선에서 물러나고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힘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마오쩌둥이 다시 일선에 나올 명분이 필요했다.

이럴 때 마오쩌퉁 최측근 실세 4인방이 (아래 마지막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순) 등장해 문화대혁명을 추진한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실책을 가리기위해 중국문화대혁명 주체를 4인방으로만 돌리려 하지만 마오쩌둥이 뒤에서 지지해주지 않았음 있을 수 없는 혁명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탓에 겪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다. 대약진운동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국문화대혁명 고작 10년 만에 찬란했던 4천년 중국사와 중국 전통 문화 기반이 통째로 무너졌으며 한족뿐만아니라 소수민족과 고구려, 발해 등의 유적들이 대규모로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또한 중국 역사상 어떤 침략이나 전란도 문화대혁명만큼 중국문화를 파괴하지 못했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 자세한 이야기가 다음 편에서 이어진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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