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605
ㅡ 중국문화대혁명 3 ㅡ
(중국문화대혁명 과정)
'중국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하 마오)이 중국공산당 혁명정신 재건을 위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추진한 대격변이었다.
스탈린 사후 소련혁명이 잘못된 길로 접어 들었음을 확신한 마오는 중국이 소련식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따라가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대약진운동 대실패로 본인 권력 상실에 대한 우려로 역사흐름을 역류시키고자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중국을 대혼란 상태로 몰아 넣었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대학교를 폐쇄하고,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만들어 이들에 의해 전통적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게 했다. 심지어 고위 당 관료들까지 공개 비판함으로써 그들 혁명성을 점검했다.
홍위병들에 의한 이런 운동은 전국적으로 신속히 확대 되었다. 홍위병들에 의해 수많은 노인들과 지식인들이 학대받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또한 기존관습과 문화를 모조리 부정하였다. 의사, 교수, 기술자 등 사회 높은지위에 올라간 이들을 지식인, 자본가라 폄하하며 이들을 포함 수천만명을 학살하게 된다.
전통문화, 문학, 예술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홍위병들은 '공자 묘'를 헐어버리는 한편, 전통 예술품, 서적 등 수많은 문화재도 싸그리 불태워 버린다.
자국민이 자국의 전통문화를 모조리 말살시켜 버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짓을 벌인 것이다.
정말 좀 과장하면 그 당시는 홍위병과 마오를 제외한 모든 것 들을 태우고 지워 버렸다.
문화대혁명 광기 희생자들에는 중국 공산당 내 높으신 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피해자로는 당시 공산당주석 '류사오치'(유소기)와 '덩샤오핑'(등소평)을 들 수 있다. 또한 당시 당 고위간부 시진핑 아버지 '시중쉰'도 이 때 몰락했다. 그래서 '시진핑' 자신도 '량자허촌'으로 하방(농촌으로 가서 하는 운동)되어 토굴집에서 살면서 힘든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마오는 문화대혁명 초기부터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는 내용의 교시를 하달하여 홍위병들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 주었다.
마오는 당 중앙 실권파를 제거하는 데 '린뱌오'(임호)가 지휘하는 인민해방군을 동원하는 것만큼은 피하려 했다.
마오가 보기에 이 운동은 정부와 당 조직을 넘어서 기층인민으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가장 먼저 마오 뜻에 호응한 것은 젊은 대학생들이었다. 마오는 이 학생들을 '홍위병'으로 부르며 자기 사병화 해서 자기 권력 유지에 이용했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때, 홍위병이 하는 일을 막으려는 자, 그 누구라도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숙청 대상이 될 정도였다. 이때는 린뱌오가 버티고 있던 중국군부마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홍위병들에게 별을 단 장군들도 벌벌 떨었다.
이처럼 중국 전국각지로 퍼져나간 홍위병들은 중국 말단지역까지 '마오사상'을 주입시키고 다녔다. 결혼식 예물이 마오사진과 말이 담긴 어록 책이었으니 더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유일무이한 집권세력이 된 홍위병은 역사상 어떠한 조직들이 예외없이 보여주었듯 분열하게 된다. 보수파, 조반파 등 여러 파벌로 나뉜다.
권력자의 자녀로 이루어진 '보수파 홍위병'과 달리 '조반파홍위병'은 부모 출신성분에 연좌되어 당간부와 지식인들에게 공산당 초기 '혁명'을 당하며 핍박받던 집단이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보수파홍위병 중심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 졌으나 차츰 조반파홍위병들이 힘을 잡아 갔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반파와 보수파홍위병은 절대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반파 홍위병이 행한 살육은 상당부분 자기들 생존을 위한 투쟁이자 정당한 복수로서 참작할 부분이 있다.
만일 조반파홍위병이 문화대혁명에 참여하여 자신들을 향해 '혁명' 하려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끊임없는 핍박 속에서 억울하게 쓰러지는 수밖에 없었다.
현재에도 문화대혁명을 평가하는 중국 공산당과 지식인들은 계급적 이기심에 의해 문화대혁명 이전, 즉 중국 전체가 공산화 되면서 공산당 당간부들과 지식인계급이 자본주의 '반동'에게 퍼붓던 공산당초기 '혁명' 부조리함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은폐하기위해 조반파홍위병들에게 문화대혁명에 대한 부조리함을 최대한 많이 밝혀 자기들 당시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도 '중국문화대혁명'과 같은 비슷한 행태가 있었다.
10년 문화대혁명에 비해 기간은 3개월 정도로 아주 짧았다.
6.25 전쟁 중 북한 인민군이 남한 대부분을 점령해 '인공시대'라고 부르던 시기이다. 사실 이 시기에 점령한 인민군들에 의해 민간인들이 살상 당한 것보다는 인민군을 등에 없고 설치던 소위 완장찬 좌익 쪽 사람들 행위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했다. 완장 찬 이들 대부분은 좌우 이념이 뭔지도 모른체 그 동안 겪었던 사회적 약자 설움을 분풀이 하는 경향이 컸었다. 완장찬 이들에 의해 벌어졌던 개인감정들을 실은 공개 여론재판과 공개 처형등이 중국문화대혁명 때
조반파홍위병들과 비슷했다.
또 반대로 국군이 다시 영토를 회복하고 난 후 우익 쪽에서는 인공시대 때 북한에 협조했다며 '보도연맹 사건'을 일으켜 수십만 민간인을 또 학살했다. 이래저래 죽어난 것은 아무 죄없는 민간인들 이었다.
중국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처럼 그들만의 논리와 명분으로 수십만 민간인들을 서로 돌아가면서 살해한 것이었다.
인류역사상 이런 집단광기 시대는 많았다.
독일 히틀러 유태인 집단학살이 대표적이다. 당시 히틀러 나치당은 독일국민들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압도적인 표차로 직접 뽑은 정권 이었다.
중국문화대혁명이 10년 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중국인민들이 마오를 신처럼 여겼고 마오 말이라면 무조건 맹종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나 마오처럼 한 사람 잘못된 지도자를 선택해 그들 오도된 신념을 신처럼 떠 받칠 경우 벌어지는 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이처럼 인간 집단광기는 너무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 낸다.
분명한 것은 마오나 히틀러 둘 다
당시 집단광기에 빠진 국민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여기서 '중우'란 말 그대로 '어리석은 대중'이다.
이처럼 근대 민주주의는 피흘린 소수의 각성된 시민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중이 그에 따르면서 발전도 해왔지만 다수의 중우에 의해 훼손되기도 해왔던 것이다.
중국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정부는 대외적으로는 문화대혁명을 프랑스혁명 동양판 쯤으로 선전했다. 서구 일부 지식인들도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진짜로 이렇게 믿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보적 지식인들로 부터 가장 존경받는 리영희 선생도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 인과의 대화'에서 중국문화대혁명을
"인간의 이기심은 극복하고 이상 세계를 만들기위한 인류최초 위대한 실험이다"라며 칭송했었다.
리영희는 나중에 이를 두고, "당시에는 문혁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었다"며 후회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분명 존재한다.
이어서 중국문화대혁명 4편, 마지막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세 번째 사진 마오와 린뱌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