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615
ㅡ 여순사건 4
(아무 것도 이닌 '하지'의 문고리 권력자들 )
해방전후사를 쓰면서 여순사건 원인이 된 해방직전 국제상황을 쓰니라 여순사건 본질로는 아직까지 들어 가지 못 하고 있다.
내가 해방전후사 시리즈에서 해방직후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정리했으나 해방직전 국제상황이나 해방직후 국내상황 이야기 중 빠진 게 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 한다.
오늘 이야기도 여순사건 본질로 들어가기 전 상당히 중요하다.
앞 편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해방되고 채 한달이 못 된 1945년 9.8일 인천으로 진주한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지금의 대통령보다 더 한 권한을 가진 남한 총책임자가 되었다.
해방전후사에 남쪽 인사로 여운형, 김구, 이승만, 김규식등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사실은 이들보다 훨씬 더 큰 실권을 행사한 자들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문고리 권력을 가진 사람들 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해방직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들 원초를 제공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아래 글들은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펴낸 <1945년 해방 직후사>라는 책에서 해방공간을 왜곡한 ‘아무 것도 아닌’ 미군정 문고리 권력자들을 밝혀낸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정교수는 해방직후 미군정하에 이뤄진 “중대한 결정”이 현대 한국의 원형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9월부터 그해 말까지 미군정이 친미·반공·기독교·서북 출신·연희전문학교등 기준으로 선별한 우익인사들에게 불하한 ‘벼락권력’이 그 핵심이다.
권력이 대의성이나 합법성, 민주주의 원칙이 아니라 미군정 사령관에 의해 불하됐고, 이에 따라 구축된 미군정-이승만-한민당 동맹이 우리나라의 앞 날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정병준교수는 당시 미국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미국이 당시 해방된 조선에 대해 백지나 다름없었지만 일정한 판단은 갖고 있었죠. ‘우리는 호의를 갖고 있고, 한국인들은 자치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우리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선의에 입각했지만 인종차별적 관점이었어요. 미군정은 일본을 미숙한 청소년으로 봤으니 조선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겠죠. 문제는 점령군사령관 존 하지가 일본·독일·이탈리아에 파견된 다른 사령관들과 달리 현지사정을 모르고 영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거죠. 그는 맥아더 밑의 여러 장군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적절한 정치고문을 붙이거나 본국 지침을 자세히 줘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어요. 미국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봤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하지 문고리 권력' 이라는 것이다.
이 문고리권력들이 하지에게 가스라이팅 한 내용은 "미군정이 신뢰할 만하다고 보수적이고 좋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은 '한민당'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한민당은 건준·인공을 만든 여운형에 대해 온갖 모함을 할 준비가 돼 있었어요. 마침 등장한 미군이 놀랍게도 이 사람들 말을 다 들어준 거죠. 주목할 인물은 하지의 통역관이자 고문인 '윌리엄스'와 통역관 '이문묙'입니다."
윌리엄스는 조선에 온 선교사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났다. 15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 한국어에 능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 군의관 출신으로 미국 내에서는 ‘아무도 아닌 자’였다. 그러나 해방 후 조선으로 와서 하지의 문고리 권력으로 사실상 정책결정자 역할을 했다.
정교수는 말한다.
"윌리엄스가 1946년 1월 미국 감리교 선교단 앞에서 했던 연설문을 보고는 미군정 초기 벌어진 많은 비밀들이 해결 됐습니다. 대표적으로 그는 친일 경찰을 비호한 조병옥이 입에 달고 살던 ‘한국인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지 친일은 없었다’는 말을 그대로 해요. 모든 한국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본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국민공범론’을 되풀이했어요.”
이처럼 윌리엄스는 친일을 무마시키려 했다.
또한 윌리엄스는 파괴적 공산주의 집단인 여운형 '인공'이 대중적 지지도 없이 총독부로부터 권력을 건네 받았고,보수주의적·친미적이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착한 편’ 한민당이 여기에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생각을 하지에게 지속적으로 가스라이팅 했다. (한민당 초기에는 임정을 강력지지했음)
그리고 정교수가 또 한 사람 문고리권력으로 지명한 자는 하지 통역관 '이묘묵'이다.
이묘묵!
나도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이묘묵'은 미국유학, 영국유학을 거친 엘리트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시기 192~3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이광수'와 같은 민족개량주의자 입장에서 독립운동도 하고 사회운동도 한 조선의 젋은지식인 엘리트인사였으나 1930년대 후반 '수양동우회사건' 전후로 수감 되었다. 수감 중에 총독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풀려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고,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적극 활동한다.
'수양동우회'는 1926년 1월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의 국내 조직 격으로 통합해 운영되었던 단체였다. 주로 안창호를 따르는 서북지역
(평안남도 일대)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지도이념은 안창호 '무실역행'이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1937년에 일제가 수양동우회와 관련된 이광수, 이묘묵등 180여 명의 지식인을 검거한 사건이다. 41명이 기소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이광수, 이묘묵등 지식인 다수가 친일로 돌아 섰다.이
그래도 어느 정도 개념이 있었던 이광수, 이묘묵과 같은 존경받던 젋은 조선지식인들이 식민지의 슬픈 나약한지식인들로 변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때 '조병옥'도 같이 수감되어 2년 정도 징역을 살다 전향서를 쓰고 출옥했다. 이후 일제로부터 광업회사 이사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눈에 띄는 친일행적은 없다.
'조병옥'은 해방 전 친일행적이 문제라기 보다는 해방직후 경찰총수 경무부장으로서 행한 일이 더 큰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조병옥은 제주 4.3항쟁 민간인 학살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
조병옥은 제주 4.3항쟁 때 경찰총수로서 서북청년단을 보내 군ㆍ민을 가리지 않는 강경진압을 하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고도 했다.
또한 진압 온건파인, '김익렬' 9연대장이 최대한 유혈 사태를 줄이고자 '무장대봉기군'과 평화협상을 교섭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조병옥 휘하 경찰과 서청이 소위 '오라리 방화 사건'을 조작하여 평화 협상을 깨뜨렸으며 조병옥은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축출시켰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송건호는 '조병옥을 비롯한 한국민주당 세력은전형적인 기회주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역사 왜곡을 주도한 집단'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묘묵'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주의를 아주 싫어했다. 그의
눈에는 중도좌파라고는 하지만 여운형 활동이 크게 거슬렸다.
그리고 좌파들이 끝까지 독립운동에 나서고 자기는 친일에 나섰다는 열등감과 좌파들이 힘을 가지게되면 친일파 척결에 나설 것이고 그러면 자기 설 곳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신뢰하는 하지를 계속 가스라이팅하여 하지 생각을 편협하게 만드는데 윌리엄스와 1.2등 공을 다툰다.
특히 '이묘묵'은 여운형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지에게 지속적으로 전한다. 그래서 하지가 여운형을 처음 만났을 때 대놓고 "여운형이 일본총독부에게 돈을 받은 나쁜 놈"
이라고 몰아 세우기까지 한다.
내가 해방전후사 시리즈 '버치보고서 편' 에서 여운형 이야기를 하면서 '버치'가 여운형이 총독부에서 돈을 받아 먹었는지에 대해 미군정관리가 일본까지 조사를 나갔으나 일본관리들이 "여운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진정한 애국자였으며 우리와 뜻은 달랐었도 존경할만한 사람" 이라는 말을 듣고 미군정관리들도 여운형을 좋게 보기 식작했다고 썼다. 그걸 쓸 당시는 이묘묵이라는 인물을 몰랐지만 여운형이 총독부 돈 받아 먹었다는 이야기가 이묘묵에게서 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묘묵은 친일파와 대지주,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민당"을 주목했다
그리고 한민당 내 영.미 유학파 출신 인물들을 윌리엄스와 함께 '하지' 에게 추천한다. 당시 한민당 내에서 영어만 조금할 줄 알면 벼락출세를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병옥'과 '장택상'이다. 둘 다 영미유학파로 영어를 잘했다.
특히 이 두 사람은 조병옥은 경찰총수 경무부장, 장택상은 초대수도경찰청장으로 임명되어
경찰을 장악하고 친일파 출신들로 경찰조직을 채웠다.
바로 하지 문고리권력에 의한 기회주의자 친일파들의 벼락출세가 해방직후 벌어진 민간인 대학살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당시 악질친일경찰 출신들 행태에 대해 예를 하나 들겠다.
'김원봉'과 '노덕술'이야기이다.
김원봉은 요즘 와서야 재평가 되고 영화 암살에서, 그리고 전에 방영한 mbcTV 티브 드라마 '이몽'의 주인공 역할로도 나왔었다.
노덕술은 우리 독립투사를 잡았다가 혹독하게 고문하던 말 그대로 대표적인 악질친일경찰이었다.
그러나 해방후 숨 죽으며 숨어있던 노덕술이 조병옥 장택상이 친일경찰들을 다시 불러들이면서 노덕술은 '치안기술자' 고위경찰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해방 후 들뜬 마음으로 귀국해 있던 김원봉을 잡아 들인다.
노덕술은 김원봉을 잡아들여 김원봉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독립투쟁한 것을 조롱한다.
일본이 김구보다 더 높은 현상금을 걸고도 잡지못한 의열단 대장 김원봉을 잡고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 그런 짓을 했으니....
이에 김원봉은 풀려 난 후 침식도 물리친 체 3일동안 대성통곡 하다가 북으로 간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슬픔과 분노로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노덕술은 50년대 까지 대한민국 고위경찰로 있다가 고향에서 국회의원까지 출마한다. 다행히 낙선은 했으나 천수를 누리고 죽는다.
이완용, 송병준, 노덕술등 악질 친일민족반역자 대부분은 평생 호의호식하다 천수를 누리고 죽는다. 그 후손들은 요즘 말하는 토착왜구가되어 잘 살아가고 있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처음에는 대접을 받았으나 6.25전쟁 이후 숙청 당하고 만다. 남한에서는 빨갱이 꼬리표가 붙어 후손들까지 연좌법에 걸려 아무 것도 못 한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ㅠㅠ
참으로 슬픈 우리나라 현대사 이야기이다.
김원봉과 노덕술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역사에서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극히 일부분이다.
이러한 것이 연결되고 연결된게 '제주4.3항쟁"이고 '여순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친일경찰들이 아무런 벌도 받지않고 아무런 반성도 없이 다시 재기용되어 일반 민간인들에게 일제강점기보다 더한 오만함으로 가득찬 강압적인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왜곡된 지식인 몇 사람의 편협된 시각이 당시 최고권력자 무능하기 짝이 없는 하지에게 전달되었고 하지는 그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한지도 모른 체 그들이 하란대로 한 것이었다.
이처럼 역사 속에 항상 등장하는 문고리권력의 무서움이다.
최고권력자들 문고리권력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 의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행하여지기 때문에 그 결과가 정말 처참하고도 무서운 것이다
정교수는 이에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윌리엄스와 이묘묵 같은 문고리 권력들은 미군정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만 해줌으로써, 작은 실수와 큰 실수 사이에서 그것을 큰 실수로 몰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사실 해방직후 공간이 그렇게까지 어긋나서 엉망진창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가령 지방에서는 인공이나 인민위원회에 대해 우호적인 곳들이 꽤 있었어요. 전남 같은 곳에서는 행정이나 치안도 잘 유지되고 민심도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지가 인공 부정 성명을 낸 뒤로 분위기가 싹 바뀌어서 경찰이 폭력 진압을 시작한 거죠. 틈이 갈라지는 순간엔 각도가 미묘했지만,
1946~1948년이 되면 현저한 격차가 생기게 된 거죠. 결국 그게 친일군경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고 분단과 냉전을 촉진했다고 봐야 됩니다."
정교수는 또 말을 합니다.
“해방직후 그 당시는 아직 냉전이 정책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하지가 행한 일이 1946년 한국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결국 1947년 이후 전지구적 냉전이 본격화하는 데도 영향을 줬습니다. 브루스 커밍스가 하지를 ‘미숙한 냉전용사’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런 차원입니다."
오늘의 결론은 우리나라에 아무 것도 모르는 미군정사령관 하지를 윌리엄스 이묘문 문고리권력들이 한 쪽으로 편협된 생각을 가지게 했고 그가 추천한 인물들도 대부분 친일적이고 이념적으로도 편협된 생각을 가진 자들 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미국 국무부 고위급 정책과도 배치된다는 것이 김태균교수가 발굴한 버치보고서에 의해 밝혀졌다.
어쨌든, 하지의 한반도 군정 통치는 정치를 모르는 야전 군인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떤 사단이 나는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 준 일종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본격적인 여순사건 속으로 들어 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사진 인물은 순서대로 하지, 이묘문, 조병옥, 장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