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620
ㅡ극과극 평가 속 인물, 이승만 1ㅡ
(이승만 성장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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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해방전후사 시리즈를 쓰면서 그 당시 가장 주요 인물인 이승만 전 대통령 (이하 이승만)에 대해서 여러 글을 써 왔습니다.
대부분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글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이승만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과 함께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보수 쪽 사람들은 제 글에 댓글로 많은 불만을 표합니다.
저에게 지나치게 진보적 입장에서만 이승만을 보고 이승만 비난 글을 쓴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나를 진보라고 말 하기가 조금 꺼려집니다.
진짜 진보라고 할 수 있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인 '홍세화' 작가가 몇 일 전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나라 진보를 지적한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진보를 말하면서 삶은 온통 소유의 욕망에 빠져있는 세태>
홍세화 작가가 지적하신 말씀이 저에게도 뼈아프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좌우개념이나 진보 보수 논리는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정확한 이념문제로 좌우로 나누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역, 학연, 세대, 자기가 속한 조직및 단체등 여러가지가 혼합되어 복잡합니다.
그리고 한 번 자기 생각이 정해지면
어떤 문제던 사안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조건 흑백논리로 갑니다.
한 인물평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한 인물 '공ㆍ과'에 대해 이승만처럼 극과극으로 심하게 받고있는 인물이 있을까요?
현재 오늘 날도 이승만은 '건국전쟁'이라는 다큐영화를 통해 다시 우리민족 영웅으로 부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건국전쟁"에서 <이승만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후 치열한 좌우이념 싸움에서 공산주의를 막아내고, 자유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지금의 대한민국 번영을 이끌어 준 위대한영도자>로 추앙 받습니다.
한편으로 또 다른 역사전문가는 <이승만을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악인 5인' 중 한 명으로 꼽는다.
또한 이승만은 독립운동 기간에도 독립운동가들 갈등과 분열의 근본 원인으로 본다. 그리고 이승만은 명예와 권력만 탐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해방 후에도 한반도 남북분단 직접적 원흉이며, 본인이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수십만 민간인들을 학살한 잔인한 독재자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승만 진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승만도 '공ㆍ과'는 있습니다. 한데 이승만 '공ㆍ과'는 이념이나 보는 시각에 따라 공과가 혼재되어 아주 복잡합니다.
예를 들면 이승만정부 시절에 벌어진 민간인대학살도 이승만을 추앙하는 쪽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내기 위한 어쩔 수없는 선택 이었으며 이승만이 그렇게 했기에 지금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며 이승만 큰 공으로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 편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공ㆍ과'를 어느 정도로 해야할 지 참말로 어렵습니다.
<흑백논리 지배하던 한국사회에 '관용'을 일깨우다>
홍세화 작가 부고에 나온 경향신문 기사 제목입니다.
홍세화 작가가 말한 톨레랑스(관용) 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저는 학술적 이념척도로 본다면 사실 진보라기 보다는 좌우도 아닌 중도 정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 입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사람 절반 정도가 이승만을 건국아버지로 인정하고 추앙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객관적 시각에서 많은 자료를 취합해서 이승만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쓴 일제강점기나 해방전후사 시리즈에서 이승만 정치척 행태에 대해서는 여러차례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리즈는 가능한 이승만 인간적 면모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서 정치적인 면도 정리해 나가겠습니다.
이승만이란 인물이 멀리 있는 거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재 정치인들 행태 에서도 이승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윤석열정권에 들어서 이승만 띄우기에 한창인 이 정권 핵심 윤석열 한동훈에게서 이승만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야당대표 이재명이나 조국에서도 이승만 모습이 가끔씩 보입니다.
이승만에게는 이처럼 양면성이 있습니다. 이승만이 극과극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승만을 제대로 알면 우리 역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지금도 살아있는 역사 입니다.
어쨌든 이번 시리즈는 내 개인 생각을 떠나 객관적으로 정리하려 합니다.
제 이승만시리즈를 잘 읽어 보시면 이승만뿐만 아니라 현재 정치인들에 대한 판단도 좀 더 올바르게 제대로 할 수 있을거라 봅니다.
여러분들이 다 읽어 보시고 각자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승만 생애 초기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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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1875년(고종 12년) 조선 황해도 평산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해김씨 김말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손위 두 형이 이승만 출생 전에 홍역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사실상 장남역할을 하며 6대독자가 된다.
이승만은 양녕대군 16대 직계후손 으로 알려졌다. 이승만이 조선왕가 후손이긴 했지만 직접적인 왕실과 관계는 멀어진 지 오래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자신을 '프린스 리'라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반대 편에서 이걸 가지고 이승만이 거짓말로 사기치고 다녔다고 매도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미국에서 현지 지식인, 엘리트 층들과 많이 만나고 인맥을 쌓아 가고 있을 때 그들은 이승만을 종종 듣도 보지도 못한 아시아 변방 조그마한 나라 출신이라고 잘 상대 해주지도 않았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공화국
으로 시작되었다 보니 황족, 왕족, 귀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이 '프린스 리' 라고 왕족으로 소개하니 잘 만나주었다 한다. 이승만이 양녕대군 직계후손 이니 완전 거짓말은 아니였다. 또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그랬으니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또 이승만 스스로가 왕족이라는 자의식이 높았고, 생긴 것도 말끔 하게 왕자같이 잘 생겨서 미국인들 에게 '프린스 리'가 아주 잘 먹혔다.
그러나 이런 점에서 이승만이 오만하고 거만해 자기밖에 모른다는 이미지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승만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여러 번 과거시험에 응시 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명석한 두뇌로 하버드, 프린스턴 대를 나와 '공부의 신'처럼 느껴지는 이승만이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여러 번 낙방했다는 것은 의외지만 당시 과거는 실력이 아닌 뇌물과 가문 끈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오죽 당시 과거시험 비리나 부패가 심했으면 구한말 모든 개혁조치에 '과거제도 폐지'가 올라와 있었을까?
이승만은 과거시험에 여러 번 낙방 후 조선 과거제도에 큰 실망을 하고 신학문에 눈을 돌린다.
이승만은 동학농민운동이 한참이던 1894년 19세에 신학문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미국인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을 가게 된 이유는 신학문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열심히 영어공부에 매진해 영어에 특출난 실력을 보인다. 이승만 이 특출난 영어실력이 이후 이승만 삷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영어보다 더 귀한 '자유민주주의' 라는 것에 대해서도 처음 배우게 되었다고 자신 자서전에서 언급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2년만에 졸업하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계몽운동에 참여한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실력으로 유명하였다. 또 '서재필' '박영효' '민영환'등 계몽운동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한다.
특히 이승만은 자기보다 12살이 더 많은 띠동갑 '서재필' 영향을 상당히 받는다.
'서재필'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과는 띠동갑 나이차이였지만 이승만 보다 먼저 미국으로 가서 이승만과는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른 행로를 보였다.
서재필이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스승같은 존재이기는 했지만 후에는 사이가 아주 안 좋아진다.
이런 이야기들은 너무 길어져서
다음 편에서 한 편으로 이승만과 서재필을 비교해서 자세히 정리 하겠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한국 최초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에서 23살 이승만은 연사로 나서 러시아 이권요구를 강력 규탄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조선 젊은리더로 부상하게 된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YMCA등 에서 활동한다.
1898년 4월에는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한국 최초 민간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했다.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이보다 2년 앞선 1896년 창간되었으나 주 3회 발간됐기때문에 일간지는 아니었다. 독립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시점은 1898년 7월로 매일신문보다 늦다. 어려운 국사시험에 가끔 나온다.^^)
이승만은 고종이 독립협회지도자를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진압 하는 과정에서 '박영효 황제퇴위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져 사형수가 된다. 그리고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승만은 77세 때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때때로 나는 꿈속에서 감방에 갇힌 자신을 발견한다.>
77세 때까지 이승만을 괴롭힐 정도로 감옥생활은 고통스러웠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이승만은 40년이 지난 1939년이 돼서야 비로소 붓글씨를 다시 쓸 수 있었다.
이승만이 죽을때까지 손을 호호부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고문 휴우증이라 한다.
이유불문 잘 나가던 20대 청년이 반역죄로 사형수가 되어 5년을 넘게 감방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해봐라!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오랜 감옥생활이 이승만에게 위기만은 아니였다.
사형수로서 위기는 이승만을 죽음 문턱 앞까지 내몰았고,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다.
이승만이 하버드대 입학당시 인생목표가 선교사라고 적을 정도였다.
이승만이 이때 다진 신념은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있는 정치가가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이란 토양 위에 자신 정치사상을 뿌리내리고, 독립운동과 국가운영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고취하려고 노력했던 기독교 정치사상가, 기독교 정치가였다.
또한 이승만은 감옥에서 사형수로 지내면서 죄수들 교사역할도 하고 '독립정신'이라는 책도 저술한다.
기독교 깊은 신앙에 빠져있던 이승만은 감옥에서 찍은사진
(아래사진)을 보면 사형수임에도 확신에 찬 아주 당당한 모습이다.
이승만은 다행히 '러일전쟁' 중에 사면된다. 사면된 이유는 이승만이 영어를 잘해서였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미국에 알리고 미국도움을 얻고 싶어했다. 이에 민영환 밀사 형식으로 영어를 잘하는 이승만을 미국에 홀로 파견시킨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배운 영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이승만 미국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어서 이승만 2, '서재필과 이승만' 편이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첫 번째 사진
이승만 어린시절(왼쪽)과
이승만 아버지(중앙)
두 번째 사진 사형수 이승만
세번째 사진 청년시절 이승만
마지막 사진 서재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