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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공적 4 농지개혁

작성자가을달|작성시간24.05.12|조회수50 목록 댓글 0

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635

ㅡ극과극 평가 속 인물, 이승만 10
(이승만 공적 4, 이승만 농지개혁)

윤석열정권 들어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 속에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몇천 년 동안 농사를 지어온 나라로, 특이한 점은 해방 이후 ‘지주 계급’이 없어졌다”며 “대한민국이 이 자리에 오게 한 결정적 장면”이라며 1949년 '농지개혁'을 언급한 바 있다.

한동훈 말대로 우리나라는 수 천년 동안 농업중심국가였다.

국가 경제활동에서 토지가 거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만큼 가지고 있는 토지를 빼앗아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아는 우리 역사 속 '토지개혁'은 고려말 이성계 일당이 정도전과 조준이 중심되어 고려 권문세가들 토지를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 바 있다. 이 '토지개혁'이 있었기에 이성계는 농민들 지지를 얻어 조선건국이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 토지개혁은 완벽했다 할 수 없었다. 토지장부도 정확하지 않았고 당시 한반도 전체적으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단지 몇 몇 권문세가 토지만 빼앗은 것 뿐이었다. 이성계 일파 토지는 그대로 둔체 말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진정한 '토지개혁' 은 해방직후에 분단된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먼저 토지개혁에 나선 것은 이북 쪽이었다.

이북 지역은 1945년~1949년 동안 소련군정 치하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원칙하에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토지개혁이 진행되었다. 이북은 이미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에 의해 공산화 되었기에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를 허용하지 않아야 했지만, 당시 '농민들' 지지를 얻으려면 지주 토지를 무상으로 빼앗아 우선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생각을 하며 진행했다. 그리고 1958년에 이르러서야 북한은 모든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형태로 법률을 수정하고, 집단 농장체제로 변하게 된다. 이런 토지개혁은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토지소유권이 농민들에게 가는 것이 아닌 국유화되어 집단농지화 되었기 때문이다. 지주들은 사라졌지만 토지소유권을 갖지 못하는 농민들 입장에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가장 큰 공적으로 '농지개혁'을 꼽는다. 그러나 이 농지개혁은 이승만이 아니라고해도 당시 누가 정권을 잡던지 반드시 해야만 했다.

미군정 당시에도 농지개혁을 시도했으나 친일파 지주들로 구성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과 대지주 등 반발로 일본지주들 귀속농지에 대한 분배작업만 개시되었을 뿐 실현되진 못하였다. 미군정이 남한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한민당 협조가 필수적이었기에 강제로 할 수 없었다.

드디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그리고 이승만은 놀랍게도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하고 농지개혁법 제정에 나선다. 조봉암 본인도 장관 임명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뒤에 후술하겠지만 여기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학위 소유자 다운 이승만 고도의 정치적 술수가 있었다.

이승만과 조봉암은 이북쪽과는 달리 1949년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법'을 제시한다.

조봉암은 미군정 측에서 냈던 안보다 지주들에게 일부 유리한 방식으로 수정하고 '한민당'을 설득해 간다. 이 당시 한민당은 이승만에 반기를 들고 해체되어 '민주국민당'(이하 민국당)으로 바뀌었다.

민국당도 더 이상 농지개혁을 안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남쪽에서도 농민들에게 사회주의가 대세였다. 이미 북쪽에서는 토지개혁이 시행되어 남쪽 농민들도 농지개혁에 목을 메고 있는 상태였다. 농지개혁이 조속히 실현되지 않으면 농민들에 의해 나라가 엎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민국당은 농지개혁을 반대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국당은 조금이나마 지주 쪽으로 유리하게 개정을 유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이에 1949년 6월 마침내 이승만정부와 민국당이 함께 '농지개혁법'을 제헌국회에서 통과시키고 법률 제31호로 공포되었다.

대한민국은 북한과 달리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법'이 시행되어 토지개혁을 한다.

한 농가 토지 소유한도는 3정보(1정보는 약 3,000평)로 정해졌다. 농지개혁 대상이 된 지주들에게는 유상매입하고, 국가사업 우선참여권이 주어져(예를 들어 적산공장 불하 등에 우선적 협상대상 등) 이들의 재산이 산업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김성수도 경성방직을 불하받아 대지주에서 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러나 빈농에게 농지가격 최대 30%까지 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제7조 제1항 제5호가 삭제되고 '정부보증융통식증권'을'지가증권'으로 바꾸는등 개정작업을 거치느라 곧 바로 집행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정부가 '유상분배' 한다해도 엄청난 예산이 필요했다. 그러나 막 수립된 대한민국에 그럴만한 돈이 있을리 없었다. 전적으로 미국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50년 3월 10일 법률 제108호로 개정이 완료되어 1950년 4월에 이르러서야 농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시작되었다. 5월부터는 토지장부 열람이 개시되었다. 그 결과 1945년 말 한국 전체 경지면적의 35%에 불과했던 자작농지가 1951년 말에는 96%로 치솟았다.

드디어 대부분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농지개혁법이 6.25 직전에 시행된 것은 이승만 정부 신의 한수가 되었다.

농지개혁법에의해 일제강점기 지주제가 사라지고 지주와 소작인 간의 대립을 줄이고 나아가 이 법안의 상정으로 6.25기간동안 북한점령 지역에서 주민들이 북한선전에 휩쓸리지 않는 데 도움이 되었다.

농지개혁법 본격 시행으로 농민들이 첫 수확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5월부터 개시한 토지대장 열람을 통해 최소한 정부가 인정한 내 소유의 땅이 있다는 인식 정도는 줄 수 있었다. 그 덕에 내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 정부에 협조해야 할 이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농지개혁법이 없었으면 6.25 전쟁 전황이 지금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궁극적으로 농지개혁을 완수시켜 준 것은 6.25 전쟁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는과정에서 조선인민군 점령지에서는 인민재판이 자행되어 1차적으로 지주들에 대한 숙청이 이뤄졌다. 서울 수복 이후에도 1.4 후퇴를 거치며 지주고 마름이고 소작농이고 할 것 없이 이리저리 피난을 다녀야 했다. 그 와중에 벌어진 갖가지 물리적, 사회적 혼란으로 토지와 건물, 그리고 그 권리관계와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 등이 대규모로 멸실되었다. 남은 것들도 높은 수준 가치하락을 겪으면서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계층은 소멸 수순을 밟게 되었다. 이에 따라 휴전 이후 큰 저항 없이 토지개혁이 완수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토지개혁으로 일제강점기까지 잔재해 남아있던 양반 상놈의 신분제도도 원천적으로 사라졌다.

토지개혁을 성공하면 나라가 안정화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패하면 국가경제가 크게 추락하거나 내전,
혁명으로 인해 대량살상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토지개혁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매우 어렵고 민감한 정책이었다.

토지개혁을 성공리에 마치고 경제 안정과 사회 안정을 이룬 국가는 발전했지만, 토지개혁에 실패한 나라는 경제적 격차와 사회갈등의 혼란이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토지개혁을 성공리에 끝냈다.

다른나라들과는 달리 대한민국 농지개혁은 국민들이 스스로 뽑은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정치적 갈등과 타협 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이승만과 당시 농림부장관 조봉암은 국회 내 소장파, 그리고 지주들에게 유리한 수정안을 낸 민국당 (한민당 후신)과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이 점은 모두 이승만 공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승만이 대통령 당시 이루어졌으니 이승만 큰 공적으로 새겨둘만 하다.

그런데 농지개혁을 단순히 봉건적 지주제를 없앤 사건만으로 이해해 서는 안 된다.

일제식민지 시절 경제구조 핵심은 쌀 단작 농장중심이었다. 일제강점기 다수 지주들은 농업기업가나 마찬가지였다. 농지개혁은 이런 식민지 잔재를 뿌리에서부터 청산하는 행위였다.

그 결과 경쟁 세력이던 민국당 기반이었던 지주들은 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서 이승만과 민국당(한민당)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승만은 민국당을 제압하기위해 농지개혁법을 더 강하게 밀어 부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한민당(한국민주당)은 1945년 창당한 극우 보수정당이다 
한민당의 수석이었던 인촌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 동아일보 계열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했다

이들 사상은 좌파를 타파하고 미군정에 우호 협력하는 극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구성원들 다수가 친일파들과 대지주 출신이었다

김성수와 송진우는 창당 당시에 이승만을 비롯한 항일인사들과 접촉했다. 그중에서도 이승만을 가장 먼저 접촉하였으며 그자리에서 한민당 영수 자리를 맡아줄것을 부탁한 것으로 전한다. 이것은 한민당이 친일행적을 덮기위한 수단이었다.

결국 이승만과 한민당은 결탁했다.

정확하게는 이승만이 설립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한민당이 합류하여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목적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승만과 한민당의 공식적인 협조 활동 시작이었다

1945년 12월 30일 한민당의 수석이었던 송진우가 암살됐다
용의자들은 모두 체포되었지만 미군정은 백범을 송진우 암살 주범으로 지목했다. 용의자들은 범행동기를 송진우가 신탁에 찬성했기 때문이라 진술했다

1947년 12월 2일 한민당 당수 장덕수가 또다시 피살됐다.

이번에도 용의자들은 한국독립당 당원이었고 그로인해 또다시 백범이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다.

이로인해 백범은 재판정에 출두하기 까지 한다.

이 와중에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백범과 단절하고 한민당과 더 강하게 연대한다.

암살 배후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로써 백범과 한민당은 영원한 앙숙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 역시 백범과 영영 결별하게 되었다

1948년 마침내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성공하였다

그러나 내각 수립과정에서 한민당은 이승만에게 배신당하고 마침내 당 전체가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애초에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면 한민당의 수석 김성수가 총리직을 맡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치 주도권을 쥐게된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이승만은 실권을 장악한 이후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출신자들을 모두 임명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사회주의자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임명하고 농지개혁법을 밀어부치기 시작한다. 당연히 대지주들로 구성된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실망한 한민당 의원 상당수가 이탈하기에 이르렀으며 1949년 결국 한민당은 해체되었다.

불과 3년여만에 한민당은 그렇게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민국당으로 재결성되어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야당이 된다.

농지개혁법에는 이런 정치적 술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농지개혁은 먹고사는 문제로 정치적 쟁점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이익을 획득한 보기드문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후 1950년 5월 총선에서 진보적 중도파가 약진하는 가운데, 이승만에게 우호적인 세력은 건재했다고 평가된다. 몰락한 것은 민국당이었다.

1956년 총선에서도 농촌에서 나타난 '자유당' 당세는 반지주 정서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자유당은 적극적으로 농지개혁 성과를 내세웠다. 민국당 후신인 '민주당'이 집권하면 농지개혁을 전복시킬 것이란 네거티브 캠페인도 함께였다.

이처럼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임기 내내 이용했다.

어쨌든 농지개혁은 거의 대다수 국민들이 농민이었던 시절 ‘먹고사는 문제’를 발본적으로 해결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개혁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정권이 10년 이상 지속해 갈 수 있었던 근본적 원동력도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승만 ‘농지개혁’을 지금 다시 짚어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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